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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블라의 아르와 앗 술라이히 모스크에 있는 무덤[1]
1. 개요
아랍어: أَرْوَى بِنْت أَحْمَد ٱلصُّلَيْحِي (아르와 빈트 아흐마드 앗 술라이히)[2]생몰 기간: 1048년~1138년 5월 5일
재위 기간: 1067년~1138년 5월 5일[3]
셰바의 작은 여왕(مَلِكَة سَبَأ ٱلصَّغِيْرَة)[4]
11~12세기 예멘 주요부를 다스린 술라이히 왕조의 마지막 군주. 드문 이슬람권의 여왕이라서 유명하다. 창건자 알리 앗 술라이히 때부터 부인 아스마를 공동 군주로 존중한 전례대로 그의 조카이자 며느리인 아르와 역시 1067년부터 남편 아흐마드와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남편이 장애를 입어 통치가 힘들어지고 시어머니 아스마도 죽자 1087년에 단독 군주로 등극하였고, 이후 약 반세기간 안정적으로 통치를 이어갔다. 열성적인 이스마일파였던 그녀는 각지에 다이 (선교사)들을 파견, 구자라트 등지에 이스마일리 공동체를 세웠다. 이스마일파의 분열에 있어 무스타일리에 이어 타이비를 지지한 그녀는 전쟁도 불사하며 타이비 이스마일파를 정착시켰고, 현재까지 다우디 보흐라로 이어져 내려온다. 사나의 여왕 아르와 대학교가 그녀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2. 생애
아르와의 칭호들: 앗 사이다 알 후라(ٱلسَّيِّدَة ٱلْحُرَّة), 알 말리크 알 후라(ٱلْحُرَّةُ ٱلْمَلِكَة), 사이다 빈트 아르와(سيدة بنت أحمد)[5]
1048년 예멘의 이스마일파 심장부인 하라즈에서 태어난 아르와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알리 앗 술라이히에게 거두어져 그의 사나 궁전에서 자랐다. 알리의 부인이자 공동 통치자인 아스마가 그녀의 교육을 맡았으며, 1066년 아르와는 사촌 아흐마드 이븐 알리와 결혼하였다. 아르와는 부유한 항구 도시 아덴을 지참금으로 받아 다스렸다. 그러던 이듬해, 술라이히 왕조와 철천지 원수인 바누 누자히의 기습으로 알리가 전사하고 아스마가 포로가 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덜컥 남편과 공동 통치자가 된 아르와는 10대의 나이에도 남편 아흐마드를 도와 수도 사나에서 세력을 추스른 후, 1082년 함께 자비드를 공격해 아스마를 구출하고 예멘 서부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아흐마드는 몸에 마비가 왔고, 아르와는 아스마의 도움으로 홀로 정무를 보았다. 1084년 아르와는 칼리파 조금 알 무스탄시르로부터 훗자 칭호를 받았는데, 쉬아 교리에서 훗자툴라는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고 쿠란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 지닌 대단한 지위였다. 그녀는 역사상 이 칭호를 얻은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이었다.
2.1. 단독 집권
아르와에 의해 세워진 사나 대사원의 서쪽 미나렛 | 그녀가 수도로 정한 지블라. 중앙 상붸 바치되어 있는 그녀의 궁전이 보인다. |
1086년 한계를 느낀 아흐마드는 조금씩 관여하던 정무도 포기, 아르와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은퇴하였다.[6] 이듬해 또다른 공동 통치자인 시어머니 아스마 역시 사망하며 아르와는 명실상부한 단독 군주가 되었고,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그녀의 이름은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다음으로 언급되었다. 정권을 잡은 후 그녀가 처음 착수한 일은 수도를 사나에서 험준한 요새인 지블라로 옮기는 것이었다. 군대를 양성한 아르와는 반간계로 알리의 원수인 바누 누자히의 사이드를 끌어내어 격파하였다. 1091년 아흐마드가 은퇴지에서 사망하자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권유로, 아르와는 내키진 않았지만 권력 유지를 위해 친척인 사바 이븐 아흐마드와 결혼하였다. 다만 아르와는 그와 사실상 별거하며 권력을 행사하였고 1101년 사바가 사망하자 다시 단독 군주가 되었다. 다만 바누 누자히와의 전쟁은 지블라 남쪽의 산악 요새 앗 타카르의 태수 알 무팟달 빈 아불 바라카트가 주도하였다.
통치에 있어 아르와는 멘토인 아스마처럼 히잡 없이 각료 회의에 나서진 않았으나 발 (장막) 뒤에 있지는 않고 신료들과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다. 그녀는 기존 수도이자 중심 도시인 사나의 대사원을 확장하고 사마라와의 도로를 개선하였다. 지블라에선 365개의 방을 갖춘 새로운 궁전을 세우고 옛 궁전 다르 알 잇즈는 대사원으로 개조하였다.[7] 둘다 그녀의 이름이 붙여졌고, 사후 후자에 안장된다. 그녀의 무덤은 후에 타이비 이스마일리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외에 아르와는 왕국 내에 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고, 농업 진흥을 통해 경제를 키웠다. 용감하고, 헌신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이던 그녀는 고등 교육을 받은 덕에 매우 지적이었으며, 시조와 역사적 사건들을 외우고 쿠란과 하디스에 뛰어난데다 미모까지 출중했다고 한다.
2.2. 종교적 위업
1094년 알 무스탄시르 사후 이스마일파가 니자리와 무스탈리로 분열되었을 때에 아르와는 칼리파를 따라 무스탈리를 지지하였다. 알 무스탈리, 알 아미르가 사망하고 후자의 어린 아들 타이브 대신 방계인 알 하피즈가 계승하자 이번엔 타이브를 지지하며 이집트와 대립하였다. 예멘 본토에서 알 하피즈에 충성하는 하피지 세력이 봉기했지만 진압되었다. 이로써 성립된 타이비 이스마일파에 의하면 알 아미르는 임종 전에 아르와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를 자신의 어린 아들의 대리인으로 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권위를 앞세워 아르와는 조엡 이븐 무사를 다이 알 무틀라크로 임명하였고, 이 계보는 현재까지 타이비 종파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1171년 파티마 조의 멸망과 2년 후 아이유브 조의 예멘 정복으로 하피지 세력은 소멸된 반면 아르와에 의해 구축된 타이비 종파는 현재까지 인도 서북부 등에서 세를 유지하고 있다.2.3. 치세 후반과 죽음
아르와가 매장된 지블라의 대사원
1111년 알 무팟달이 사망이 사망하자 칼리파 알 아미르가 개입해 예멘에 대리인을 파견하였고, 그는 1119년 당도한 이븐 나지브 앗 다울라였다. 그는 예멘 남부의 반발 세력들을 일소하고 바누 누자히를 격파하였다. 그러던 1125년, 70대 후반에 이르른 아르와가 통치하기에 너무 고령이라 판단한 그는 1125년 정변을 시도했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이븐 나지브 앗 다울라는 나무 우리에 갇혀 이집트로 되보내졌고, 여정 도중 사망하였다. 이후의 기록은 희박하고, 1138년 아르와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더이상의 후계자가 없던 술라이히 조는 조용히 사라졌다. 술라이히 조에 복속하였던 자이디 이맘, 함단 왕조 등이 재차 독립하였고, 예멘의 패권은 남부의 같은 이스마일파 번국이던 주라이 왕조가 1174년 아이유브 군의 침공 전까지 지니게 된다.[8]
[1]
벽을 두른 것이고 그 안쪽에 석관이 있다.
[2]
풀네임: أَرْوَى بِنْت أَحْمَد ابْن مُحَمَّد ابْن جَعْفَر ابْن مُوْسَى ٱلصُّلَيْحِي,(아르와 빈트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자파르 이븐 무사 앗 술라이히)
[3]
단독 재위 기간 뿐만 아니라 첫 남편 아흐마드, 시어머니 아스마, 새 남편 사바와의 공동 통치 기간까지 모두 포함한 기간이다.
[4]
가장 유명한 별명으로, 셰바는 전설의 고대 왕국 시바다.
[5]
자유롭다는 후라, 고귀하다는 사이다가 그녀를 잘 대변한다.
[6]
그는 아쉬야에서 1091년 사망함. 다만 1098년이라고도 한다.
[7]
현재까지도 그 부속 마드라사는 쿠란 교육에 활용된다.
[8]
다만 기존 수도이던 사나 역시 아르와의 치세가 한창이던 1098년 즈음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