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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심광수(沈光洙) |
본관 | 청송 심씨[1] |
출생 | 1911년 10월 15일 |
경기도
안성군 목촌면 강덕동 (現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강덕리 239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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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년 3월 21일 (향년 48세) |
서울특별시[2]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부부 위패 9판-2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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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1년 10월 15일 경기도 안성군 목촌면 강덕동(現 안성시 미양면 강덕리 239번지)에서 아버지 심일구(沈日求)와 어머니 박씨(朴氏)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건너갔다가, 1933년경 지청천이 이끄는 신한독립당에 입당하였고, 비슷한 시기 지청천의 장녀인 충주 지씨 지선학(池善學, 1913. 4. 9 ~ ?)[3]과 혼인하여 지청천의 맏사위가 되었다.[4] 그 뒤 신한독립당에서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교할 학생들을 모집할 때 이에 응하여 당의 추천을 받고 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35년 4월 1일 낙양분교를 졸업한 후에는 다른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작활동 일선에 나아가게 되었고, 1936년 3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해 중앙당 군사부원이 되었다. 1937년 3월에는 호남성 장사시(長沙市)에서 임시정부 선전부 출판물 간행요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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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5월 30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입수한 뒤 복제한 사진. |
1940년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했고, 1940년 12월 5일부터 1941년 1월 23일까지 민병길(閔丙吉) 등과 함께 내무부 산하 생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42년 10월 24일에는 중경시에서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3월 20일부터 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처의 서무담당에 취임하고 주석 판공실 비서를 겸임해 1944년 3월까지 근무했다. 1944년 6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선전부 총무과에 보직을 받아 근무했고, 1944년 6월 12일부터는 내무부 경위대[5] 대원도 겸직했다. 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의 서무과장으로 임명되어 광복군 참령으로 복무하는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오가며 중책을 맡았다.
8.15 광복 후 1945년 11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떠나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0년 3월 21일에 사망했다.[6]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납북인사DB에는 창신동에 거주 중 납북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22년 11월 1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심광식과 그의 배우자 지선영을 기리는 부부 위패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