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의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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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悉直國원삼국시대 진한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삼척시, 태백시 일대에 위치했다. 다른 이칭으로는 실직곡국(悉直谷國)이라고도 한다.
동해안을 따라 북쪽 강릉시의 동예, 남쪽 울진군의 파조국과 함께 창해삼국(滄海三國)으로 불렸다.
출토된 유물에 따르면 실직국의 중심지는 동해역 일대이다. 동해역 문서 참고.
2. 역사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모여살았던 땅이었고 원삼국시대에는 성읍 국가까지 형성했다. 아랫동네 울진군에는 파조국(波朝國)[1]이 있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서기 50년경에 실직국 안일왕(安逸王) 때 파조국을 침공해 합병했다. 10여년 뒤 윗쪽( 강릉시 방면)에서 동예가 쳐들어오자 안일왕은 잠시 나라를 남쪽인 파조국으로 옮겼다.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에 이때 임시수도로 쌓은 안일왕 산성이 있다. 현지 사람들은 애밀왕 성터라고도 부른다.신라 파사 이사금 23년(서기 102년)에 남쪽의 음즙벌국(지금의 경주시 안강읍)과 영토 분쟁으로 싸움이 벌어지자 당시 동네에서 잘 나가던 나라인 신라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 신라는 금관국 수로왕에게 떠밀었고, 수로왕은 분쟁 지역을 음즙벌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판결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두고서 생각하면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삼척은 초창기 신라의 영역인 경주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실직국도 지금의 삼척보다 좀 더 남쪽 지역인 울진군과 영덕군 지역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음즙벌국이 그 당시에 중심지가 안강이 아닌 포항 지역이라면 이 일이 사실일 수도 있다. 설명하자면 강원도 삼척 근방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실직곡국과 안강면에 있는 음즙벌국이 영토 분쟁을 했다는 것은 두 나라가 너무 떨어져 위치하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 발전 정도를 보면 어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즙벌국이 포항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안강읍, 북쪽으로 영덕군으로 본다면 영토가 길게 뻗어있게 보이고, 실직곡국도 삼척으로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울진, 북쪽은 동예와 국경을 마주하는 강릉 일대에 뻗어있는 나라라고 본다면, 영덕과 울진의 경계 지점에서 양국 간의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고 보면, 두 나라의 영토 분쟁 기사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이후 신라 귀족을 살해한 범죄자를 음즙벌국이 보호하다가 신라의 침공에 크게 털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 타자가 될까 겁을 먹은 실직국도 알아서 신라에 자진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뒤인 파사 이사금 25년(서기 104년) 허무하게 항복한 것이 아쉬웠는지 주전파와 주화파가 갑론을박하다 주전파가 힘을 얻었는지 곧 신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결국 신라가 보낸 토벌군에 패해 망했다. 이후 남은 실직국의 포로들은 삼척이 경주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남쪽으로 이주시켜 관리했다고 한다. 이후 실직은 신라의 속령이 된다.
동해시 송정동 유적이 실직국 관련 유적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로 보건대, 삼한 지역에서 장신구로 널리 사용되었던 옥류가 출토되고 영남지방에서 출토되는 양식의 토기가 약간 출토되는 등 진·변한의 영향이 있기는 하나, 집자리나 묘제[2]에서 동예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3]. 3세기 후반부터 실직국 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점점 사라지고, 신라(경주)식으로 전환된다.
3. 역대 군주
대수 | 왕호 | 휘 | 재위기간 |
?? | 안일왕(安逸王) | ? | ? ~ ? |
[1]
파단국(波但國)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위와 외위는 관등명이 맞대어 지는데 파진찬에 맞대어지는 피일(彼日)은 금석문에서 파일(波日), 파단(波旦)으로 나타난다.
파진찬(波珍飡)을 해간(海干)으로 부르기도 했고 파조현(波朝縣)을 해곡(海曲)으로 바꾼걸로 보아 파단국의 파단은 바다를 뜻한다. 파조현은 삼국사기에선 파차현(波且縣) 조선시대 서적에선 파조현이라 적혀있다. 조선에선 단(旦)자를 조(朝)자로 피휘했으므로 차(且)는 단(旦)의 오기로 보인다.
[2]
진한과
변한이 있었던
경상도 지역에서는 목관묘와 목곽묘가 주류 묘제로 사용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이 되고 있지만, 실직곡국이 있었던
삼척 지역에서는 고분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선
바다를 이용해 장례를 치렀거나,
옥저처럼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뼈만 다시 추려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이 성행해서 묘제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3]
출처: 박지희, 「실직국의 역사고고학적 연구」,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육대학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