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d1c27><colcolor=#fff> 신진순 申辰淳 | 申眞順[1] |
|
출생 | 1917년 5월 8일 |
경기도 이천군 | |
사망 | 2002년 10월 30일 (향년 85세) |
학력 |
이천공립보통학교 (졸업)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중퇴)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 / 학사) |
경력 |
북조선민주녀성동맹 부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운곡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장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중앙위 위원 |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여성 정치인.2. 생애
1917년 5월 8일 경기도 이천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하급관리였으나 경술국치 후 이천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생활하다가 신진순이 6살 때 사망했다.이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30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비밀독서회를 조직하고 동맹휴학을 주도해 강제 출학 처분을 받았다. 1933년 동맹휴학 주모자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일종의 가택연금인 두문형을 받고 이천으로 내려왔다.
형을 마친 후에도 개전의 정이 없다는 이유로 모교로의 복교는 물론 다른 학교로의 편입도 모두 거절당했으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 이만규가 그녀를 받아주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36년 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화여전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며, 유창한 영어는 미국인 교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화여전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후 1940년 선과생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영어영문학 전공으로 입학했다. 선과는 일종의 편입으로, 당시 경성제대 예과에는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으나 선과를 통해 본과에 입학하는 것은 여성도 가능했다.
1945년 졸업[2] 앞두고 있던 그녀는 8.15 광복을 맞이하자 바로 평양으로 가 평안남도 당 선전부와 평양시 당 부녀회장 및 북조선민주녀성동맹( 여맹) 부위원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경성제대 학사 출신의 여성 인텔리가 공산주의 혁명을 하겠다고 찾아온 것에 대해 김일성과 김정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의 영어교원이 되었다.
남편 김기준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당간부 재교육 기관인 중앙당학교 교수로 재직 중 6.25 전쟁에서 사망했다.
1954년 운곡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62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문예 활동을 주도하면서 장편소설, 시와 노랫말을 창작했다.
1970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71년 정부 문화대표단 부단장으로 스리랑카를 방문했고, 1985년 루이제 린저가 방북했을 때 접견하는 등 외국 문예인들과 교류 활동도 벌였다.
1991년부터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중앙위 위원으로 일했으며, 1993년 러시아 민족가무단이 방북하여 김정일을 접견했을 때 배석했다.
1987년 70살 생일에는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훈하고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금시계를 받았다. 1997년 80살 생일에는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았다.
2002년 10월 30일 20시 10분에 8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신진순동지는 광복 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품속에서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재능있는 작가로, 녀성사회활동가로 자라나 우리 당의 주체적인 문에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주체의 문학예술발전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쳤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
3. 저술
- 장편소설
- 산천의 새력사 (1983)
- 남녘마을 사람들 (1991)
- 시
- 다듬질 (1936, 등단작)
- 은혜로운 품 (1971)
- 마산은 행진한다 (1960)
- 행군의 자욱소리 (1964)
- 상봉 (1965)
- 청년돌격대 나아가는 곳 (1965)
- 존슨이 붙잡히는 검불 (1967)
- 그 사람들 (1974)
- 오, 개선문 (1982)
- 개선광장에 (1985)
- 만수무강하소서 (1987)
- 횃불 (1988)
- 설인사 (1989)
- 40여년 (1990)
- 2월의 아침에 (1992)
4. 기타
- 숙명여고보에 재학 당시 한 일본인 여교사는 “30년 교사 생활 중에 신진순처럼 재능있는 학생은 처음 봤다”고 평할 정도로 수재로 평가받았다.
- 7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루이제 린저는 그녀의 재능과 교양에 감탄해 북한 작가들의 수준을 새로 인식했다고 전한다.
[1]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까지의 신문 기사 및 서울대학교총동창회 졸업명부에는 모두 申辰淳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현 북한지역정보넷이나 통일부 '북한의 주요인물(2005)'에는 申眞順으로 표기
[2]
당시 전시 수업연한 임시단축령이 시행 중이라 9월에 졸업식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