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0년 12월 10일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1] | |
사망 | 1924년 10월 10일 (향년 23세) |
전라남도 장성군 | |
본관 | 고령 신씨[2] |
이명 | 신경호(申景浩)·신국홍(申國洪) |
가족 | 배우자 이점연[3]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6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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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신태식의 5촌 조카(당질)이기도 하다.2. 생애
1900년 12월 10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아버지 신병식(申昞植, 1879.3.12. ~ ?)[4]과 어머니 제주 고씨(1879. ~ 1914.2.29.)[5]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6] 이후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예암(豫庵) 신경식(申耕植, 1876.7.6. ~ ?)[7]에게 입양되었다.[8] 일찍이 광주군의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9]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1919년 4월 3일 저녁, 그는 아버지 신경식과 고용석·유상순(柳相淳)· 유상설· 정병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아버지 신경식, 5촌 당숙 신태식, 12촌 지간의 족조(族祖) 신상우, 한문교사 정병모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 박광우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니,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신국호는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광주감옥, 대구감옥, 전주감옥 등지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 4월 출옥한 뒤 귀가했으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4년 10월 10일에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사망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3년 10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독립유공자
신상우·
신태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
[2]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진사공(進士公) 성준(成準)파 26세 호(浩) 항렬.
[3]
전주 이씨이다.
[4]
자는 선명(善明),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신정(申楨).
[5]
장흥백파(長興伯派)
고경명의 후손으로, 고제원(高濟元)의 딸이다.
[6]
생부 신병식은 1914년 첫째 부인
제주 고씨가 사망하자 곧 이문례(李文禮)의 딸
전주 이씨(1887.4.22. ~ ?)를 재취로 들여 두 아들을 두었다.
[7]
자는 준명(濬明).
[8]
신국호 사망 후 1930년 2월 8일, 양부 신경식과 양모 김요석(金堯碩)의 딸
울산 김씨(1878. ~ ?)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 신방호(申邦浩, 1930.2.8. ~ ?)가 태어나긴 한다.
[9]
1869 ~ 1918. 자 평중(平仲).
기대승의 후손으로
전라도 광주목 광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의
행주 기씨 집성촌에서 기창현(奇昌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 1894년 식년(式年) 생원시에 3등 84위로
입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