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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市旗) | 문장(紋章) | ||||
<colbgcolor=#004094><colcolor=#fff> 국가 | 일본 | ||||
지방 | 규슈 | ||||
도도부현 | 나가사키현 | ||||
면적 | 82.97km² | ||||
인구 | 42,401명[1] | ||||
시장(市長) |
[[무소속(정치)| 무소속 ]] 후루카와 류자부로(古川 隆三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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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시화 | 매화(ウメ) | ||||
시목 | 녹나무(くすの木)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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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나가사키현 남동부인 시마바라반도에 위치한 도시.2. 역사
시마바라의 난 당시 많은 주민들이 반란에 참여하고 일부는 진압군 쪽에 가세하였다. 상당한 격전이 이루어졌으며 반란군 측은 이탈한 인원을 제외하곤 전멸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영주였던 아리마 나오즈미의 전봉[3] 후 새로 들어온 마츠쿠라 가문의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지역 규모 및 생산력에 맞지 않는 거성을 지어 버렸다.[4] 영민을 가혹하게 착취, 고문했는데 이는 기독교 탄압과 함께 시마바라의 난의 주 원인이 되었다. 결국 시마바라의 난으로 인해 반란에 동참한 다수의 영민들이 전멸하였으며 이후 잔존 신자들을 소탕하고 포교를 막기 위해 후미에를 실시하고 개종한 사람들의 후손들을 수 대에 걸쳐 감시하며 연좌제를 적용해 주민들 스스로도 서로를 감시하게 하였다.
한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1638년에 가이에키당했다.[5] 이후 새로 부임한 고리키 다다후사는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문제[6]를 해결하기 위해 타지의 농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다.[7] 그러나 그 뒤를 이은 고리키 다카나가도 실정을 저지르다가 1668년에 가이에키당했다.
이후 마츠다이라 가문이 1669년부터 1749년까지 5대 동안 통치했고 도다 가문이 1749년~1774년까지 잠깐 맡았다가 다시 마츠다이라 가문이 돌아와 1774년부터 1871년까지 8대 동안 통치했다. 도쿠가와 방계 가문이 이런 변방 소영지를 맡게 된 이유는 워낙 큰 걸 저지른 지역이고 카쿠레키리시탄의 완전 소탕에 실패했다 보니 불안한 막부에서 마츠다이라 가문에게 맡기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8] 게다가 전 영주의 실정 때문에 농민들이 들고 일어선 곳에서 새 영주가 또 실정을 하니 도저히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폐번치현 초기 잠깐 동안 시마바라현이 만들어진 적 있었지만 다시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 1940년 시마초, 안나카무라, 스기타니무라 등이 합병해 시마바라시가 되었다. 1956년 미에무라, 2006년 아리아케초를 편입했다.
시마바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운젠산이다. 1792년 대분화로 인해 15,000여 명이 사망한 후 한동안 조용하였는데 20세기 말 다시 대분화가 일어났다. 1990년부터 분화를 시작해 1996년까지 계속됐던 화산활동으로 인해 시마바라시와 미나미시마바라시는 큰 타격을 받았다.[9] 당시 화쇄류에 매몰된 주택들 중 일부가 현재 기념관 및 보존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보다 이전인 17세기에는 운젠의 끓는 물을 키리시탄 고문에 쓰다가 정말 큰 난리가 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운젠 지옥과 오바마 온천 등 화산의 산물들이 지역 관광 산업의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 화산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묘하지 않을 수 없다(...).
3. 지리
시마바라반도에 위치하며 인접한 운젠시와 마찬가지로 시의 대부분은 운젠산이다. 바다의 가까운 부분은 평야지대이며 시가지가 발달했다. 서쪽으로 운젠시, 남쪽으로 미나미시마바라시와 접하고 있다.시 남부에 수무천(水無川)이라는 하천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물이 흐르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1990년대의 운젠 분화 이후 분화 재발 시 화쇄류, 토석류 등에 대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산에서부터 아리아케해까지 이어지는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며 마을을 갈라 놓았다.
4. 관광
시마바라 성을 중심으로 무사저택, 시마바라 용수관, 시메이소가 유명하다. 물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는데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수로와 족욕탕이 형성되어 있다.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며 잉어를 여럿 풀어놓아 헤엄치는 모습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 남부에는 운젠 재해기념관이 있는데 운젠 분화 당시 화산재에 매몰된 지역 일부를 당시 그대로 보존해놓았다.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음식으로는 구조니가 있는데 일본식 국물의 찹쌀떡국으로 장어, 어묵, 연근 등 건더기가 풍성하게 들어간다. 기원은 시마바라의 난 당시 농성하던 반군 쪽이 만들어 먹은 것이라고 한다. 일본식 전통 떡국인 오조니와 흡사하나 건더기의 구성에 차이가 있다.
5. 교통
5.1. 철도 교통
시마바라 철도의 시마바라 철도선이 지나며 아리아케유에역부터 현 종점인 시마바라항역까지 시마바라시에 속한다. 과거에는 미나미시마바라시의 카즈사역까지 80km에 달하는 노선이었지만 인구 감소, 운젠 분화, 버스로의 수요 이탈 등 여러 이유로 2008년에 폐선했으며 이 중 시마바라시 구간도 일부 포함됐다.5.2. 도로 교통
57번 국도, 251번 국도가 지난다.후쿠오카현 하카타 버스터미널~시마바라, 나가사키 공항~이사하야~시마바라반도 간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5.3. 해상 교통
오무타시의 미이케 항~시마바라 항 간 고속선과 구마모토시 구마모토 항~시마바라시 시마바라항 간 구마모토 오션애로우 페리, 큐쇼 페리가 운행 중이다. 오션애로우는 약 30분, 큐쇼 페리는 1시간이 소요되고 가격도 오션애로우 쪽이 더 비싼데 SUNQ 패스는 오션애로우 페리만 탑승할 수 있어 이득이다.6. 자매도시
- 제주특별자치도: 정확히는 시마바라반도와 제주특별자치도라는 두 세계지질공원 간 자매결연이다.
7. 기타
시마바라반도의 세 행정구역 중 인구가 가장 많지만 사실상 도토리 키재기다.[10]
[1]
추계인구 2021년 8월 1일 기준
[2]
현재 사이트 오류
[3]
쫒겨난 것이 아니라 본인 요청에 의한 것이다. 전 영주이자 아버지였던 아리마 하루노부가 키리시탄 및 서양 세력과 얽혀 처형된 이후, 영지 대부분을 차지한 키리시탄 영민, 가신들에 대한 악감정이 크게 작용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예수회 사료에 1613년 나오즈미가 세례명을 받은 자신의 두 이복동생들을 8세와 6세일 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토벌군으로 참전해 과거 자신의 영민과 가신이었던 반군들을 마음껏 썰고 다닌다(...).
[4]
당시 시마바라 번은 4만 석이었는데 이조차도 현실 상황보다 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마바라 성의 규모는 10만 석(...)
[5]
에도 시대 다이묘들 중 유일하게 할복이 아닌 참수로 가이에키당했다.
이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으니 화가 난 막부가 그럴 만하다.
[6]
작은 영지에서 주민 다수가 반란군, 일부는 진압군으로서 참가해 반란군 쪽에서만 3만 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왔고 이후 크리스찬의 색출과 처분까지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아마쿠사에서 봉기한 이들을 합친 숫자임을 감안해야 하지만 변두리 도서 지역에게 있어서는 궤멸적인 피해이다. 특히 미나미시마바라 쪽은 거의 다 반란에 가담했고 최후의 농성지였으니 반란 후의 상황은...
[7]
실제로 시마바라의 명물인 시마바라 소면은 당시 히로시마에서 온 이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8]
실제로 같이 봉기한 아마쿠사 지역은 이후 폐번치현 때까지 막부 직할령으로 바뀌었다.
[9]
지역의 철도 교통을 담당하던 시마바라 철도 또한 이것이 직격타가 되어 손님 감소에 허덕이다가 2008년 전체 노선의 절반 가까이 되는 치치부가우라역~카즈사역 구간을 폐선시켜 버리고 2009년 버스 회사인
나가사키 자동차에 인수되고 말았다.
[10]
추계인구 2021년 7월 기준 시마바라시 42,449명 / 미나미시마바라시 41,423명 / 운젠시 40,75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