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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모토타로



시마다 모토타로
[ruby(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ruby=島田元太郎)]
주요 직책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조선 평양 위안소 경영자, 사할린섬 석유개발
출생 1870년 나가사키현
사망 1945년 조선 평양 (향년 75세)
파일:시마다 모토타로.jpg
1. 개요2. 생애3.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사할린섬과 연해주 진출을 이끈 사람중 한명4. 관련 인물5. 관련 자료 출처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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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이름은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이다.
1886년 7월 21일경 아무르강 하류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니항 = Nikolaevsk-on-Amur)시로 이주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앙으로 개종하고 정교회 이름과 애칭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를 사용했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의 시베리아, 사할린주 진출을 주도한 사람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출병) 시기, 사할린주 주도 니항일대의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이었으며 일본 해군부의 지원을 받은 최고위급 밀정이었다.
밀정행위, 인신매매 성매매업(일명 : 가라유키상), 사할린섬 석유개발, 금광 광산업 등으로 일본 제국 성장에 크게 기여하여 천황에게서 수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870년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1920년경 러시아 극동 사할린 주의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가(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 성매매업 종사자(일명 : 위안소 운영, 가라유키상 Караюки-Сан 상인), 니항사건 관련 사진에 맨 먼저 등장하는 무역 회사 '시마다 상회'의 소유자였으며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활용하기도 했다.
파일:니항위안소인근.jpg
니콜라예프스크에 있었던 일본군 위안소 인근의 일본인 거주지 전경

3.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사할린섬과 연해주 진출을 이끈 사람중 한명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침략 시기 시베리아와 몽골 일대의 일본인 밀정 수는 대략 4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것은 일본 군대내의 정보원과 일본인 민간인(상인) 밀정 등을 모두 합한 수로 볼 수 있다.

시마다는 일본 해군 고위층의 지원으로 동시베리아 사할린주 일대에서는 일본인중에서 최대 규모의 무역회사와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들을 위한 성매매업소(일명 : 위안소)를 경영했다.
파일:시마다천황보고서.png
< 밀정 활동을 하던 시마다가 천황에게 보고한 사할린섬 석유관련 문서>

러시아 적백내전 무렵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맹활약한 배정자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정을 위해 엄청난 맹활약을 하였으며, 조선인 노예 노동자를 적극 활용했던 사람중 한명이다.

주로 일본, 사할린섬,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주, 연해주, 조선 평안도, 경남 진해,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시 등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에는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화폐로 활용된 돈까지 발행했다.
파일:시마다의편지.jpg
시마다가 진해의 일본해군 장성 다나카 각하에게 보낸 엽서

1920년 초 발생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일명 : 니항사건)에서 재산을 잃었고, 니콜라예프스크와 일본 본토에 일본군 충혼탑, 니항사건 순난자비( 尼港事件 殉難者碑) 건립과 일본, 조선, 시베리아에서 당시 일본육군상 다나카 기이치,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일본 황족, 해군 장성 다나카 고타로(해군) 등과 함께 니항사건 초혼제 행사를 주도하였고
니항사건에서 생환한 생환자들에 대한 보상 소송에도 앞장섰다.

1922년 일본군이 점령한 북위 50도 이상 북사할린섬에서 석유 개발업도 하였으나, 1925년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수 후 조선총독부 관보 등에 따르면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 광산업을 하였다.

조선 평안도에서의 광산업은 신통치 않았고,
평소 잘하던 가라유키상 성매매업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등 일본군의 잦은 전쟁으로 괜찮았다고 한다.

1945년 소련군이 평안도 평양에 들어올 무렵 소식이 끊어졌으며,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관련 인물

5. 관련 자료 출처

6. 참고문헌

  • アナトリイ・ヤコフレビッチ・グートマン(A.Ya.Gutman)著 エラ・リューリ・ウィスウェル(Ella.Lury.Wiswell)米訳 齊藤学和訳『ニコラエフスクの破壊 =尼港事件総括報告書=』(原題:Gibel Nikolaevska-na-Amure 米題:THE DESTRCTION OF NIKOLAEVSK-ON-AMUR) ユーラシア貨幣歴史研究所、2001年
  • (친일파) A.Y.구트만(혹은 ‘굿맨’=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 ГУТМАН А. Я.), 「니콜라예프스크의 죽음( 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Английский перевод: Gutman, Anatoly. Ella Lury Wiswell (trans.); Richard A. Pierce (ed.)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 Limestone Press, 1993. — ISBN 0-919642-35-7.)​ : 한국 독립군이 약 1~2명의 민간인을 처형했다고 주장함.
  • 하라 테루유키 = 原暉之「「尼港事件」の諸問題」、『ロシア史研究』23 (1975年)pp.2-17、NAID 110001365635
  • 하라 테루유키 = 原暉之『シベリア出兵 : 革命と干渉1917-1922』筑摩書房、1989年
  • 하라 테루유키 = Hara, Teruyuki. Niko Jiken no Shomondai (Problems in the Incident at Nikolaevsk-na-Amure) // Roshiashi Kekyuu, 1975, No. 23.
  • В. Г. スモリャーク著、藤本和貴夫訳「ニコラエフスク事件」、『ロシア史研究』45(1987年)pp. 61-70、NAID 110001365266
  • 外務省編『日本外交文書 大正9年』第一冊下巻 「14尼港事件及樺太内必要地点ノ一時占領ニ関スル件」(外務省外交史料館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 参謀本部編『大正七年及至十一年西伯利出兵史』新時代社、1972年(参謀本部印刷所 大正13年印刷の復刻)
  • 香月鍈一『西伯利出兵史要』財団法人偕行社、大正14年(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憲兵司令部編『西伯利出兵 憲兵史』国書刊行会、昭和51年復刻
  • 井竿富雄「初期シベリア出兵の研究」九州大学出版会、2003年 ISBN 978-4-87378-772-5
  • 井竿富雄「尼港事件と日本社会、一九二〇年」、『山口県立大学学術情報』2(2009年)NAID 110007057358
  • 井竿富雄「尼港事件・オホーツク事件損害に対する再救恤、一九二六年」、『山口県立大学学術情報』3(2010年)NAID 110007522679
  • 小林啓治『総力戦とデモクラシー 第一次世界大戦・シベリア干渉戦争』吉川弘文館、2008年
  • 伊藤秀一「ニコラエフスク事件と中国砲艦」、『ロシア史研究』23 (1975年)pp. 18-32、NAID 110001365636
  • 陳抜談、陳鐸記、伊藤秀一和訳「ニコラエフスクの回想』ロシア史研究23 (1975年)pp. 32-36、NAID 110001365637
  • 佐々木春隆『朝鮮戦争前史としての韓国独立運動の研究』国書刊行会、1985年4月20日。NDLJP:12173181。
  • 溝口白羊 국욕기( 国辱記)日本評論社出版部、大正9年
  • 溝口白羊 『校訂 国辱記』日本評論社出版部、大正10年
  • 堀江則雄『極東共和国の夢』未来社、1999年 ISBN 978-4-624-11174-8
  • 이오키 료조 = 五百木良三『尼港問題を通して 所謂時代精神の暴露』純労倶楽部、大正9年(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石塚経二『尼港事件秘録 アムールのささやき』千軒社、昭和47年
  • 『中央公論 七月号』中央公論社、大正9年
  • 『調査彙纂 第3巻 第2号』北海道拓殖銀行、大正9年(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薩哈嗹州内占領ノ件』。ウィキソースより閲覧。
  •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 島田元太郎 :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니항사변 회고 자료(尼港在住の実業家で日本軍への協力者). 니항사건 이후 순난자비 건립 및 가라유키상 유곽 운영
  • 니항사건에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 石田虎松( Исида Торамац) <尼港事件のときの尼港副領事>관련 기사
  • Hosoya Chihiro(1920년생~2011년 사망), “ORIGIN OF THE SIBERIAN INTERVENTION, 1917—1918.” / The Annals of the Hitotsubashi Academy, vol. 9, no. 1, 1958, pp. 91–108. // JSTOR.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1.03.21)
  •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만주의 친일파 ‘시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62쪽.
  • 에치(В. Эч), <사라진 도시(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블라디보스토크, 1920. 70쪽. 일본군 점령지를 방문해 볼셰비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
  • 이르쿠츠크파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 (친일파) 예밀야노프(К. А. Емельянов), <지옥의 사람들> (A.Y.구트만과 라비치의 백파군대 소설에도 자주 등장함)
  • (만주의 친일파, 미국 이주) 라비치(Яков Львович Лович), <적(Враги) : 소설 이름임​>,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만주·연해주·사할린주에서의 백파군대와 일본군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볼셰비키의 만행을 폭로
  •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 일본군 북사할린섬 점령선언을 1920년 7월로 기재. 북사할린섬 공격은 1920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파르티잔 토벌후 1920년 7월 점령을 선언한 것임. 점령선언과 공격은 다른 것임)
  •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니항사건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라고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