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8:11:08

숙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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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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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0호 한양도성
숙정문
肅靖門 | Sukjeongmun
<colbgcolor=#bf1400><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5-22
건축시기 1396년 (창건)
1976년 (복원)
시설 1동
이칭 북대문(北大門)
숙청문(肅淸門)
숙지문(肅智門)
파일:attachment/640px-Sukjeongmun.jpg
<colbgcolor=#bf1400> 숙정문

1. 개요2. 명칭3. 특징4.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한양도성의 4대문 중 북문. 일명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1396년(태조 5년) 9월에 도성 사대문과 사소문을 준공할 때 함께 세운 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5-22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문루(門樓)가 없었지만[1] 1976년에 복원할 때 세웠다.

2. 명칭

원래는 '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의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으나 이후 중종 때에 '청()'을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자로 바꾸어 '숙정문'이 되었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정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굳은 듯 하다.

한양도성 사대문의 이름에는 음양오행사상이 강하게 영향을 주었으며, 5대 덕목 '인의예지신'과 동서남북이 서로가 서로에게 대응하도록 작명했다. 인()의 경우 어질다는 의미에 걸맞게 사계절 중 온화한 ()에 대응하며, 이는 오행사상에 따라 목()에 해당하는 동()문의 이름 ( 흥인지문)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의()는 엄정해야 하기에 계절로서는 가을()에 대응하며, 오행 중 금()에 해당하는 서( 西)문의 이름( 돈의문)으로 사용되었다. 예()는 화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여름()에 대응했으며, 오행 중에서는 화()에 해당하는 남()문의 이름( 숭례문)이 되었다. 지()는 공자의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행 중 수()에 대응하며, 계절로는 겨울()이 된다. 그래서 원래는 '지(智)'가 이름에 들어가야했지만 유독 여기만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숙정문의 원래 이름인 '숙청문(肅淸門)'의 '청(淸)'에 이미 물(水)이 있어 '지(智)'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과 원래 이름을 '숙청문'이 아니라 '소지문(昭智門)'으로 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증거는 부족해 뭐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인의예지를 제외하면 신자가 남는데 사방이 아닌 중앙을 뜻하며 보신각의 이름에 사용되었다.

대신 숙종 때 서울 한양도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탕춘대성의 성문 홍문(弘智門)에 지(智) 자를 써서 인의예지신을 완성했다고 보기도 한다.

3. 특징

일단 4대 성문 중 북문이지만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산 속에 지어진 탓에 실질적으로는 조선시대에도 성문의 기능은 하지 않았다. 대신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과 숙종 대에 만든 홍지문이 북문으로 실제 '북쪽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로서의 기능을 대신했다. 일례로 도성 각 대문의 바깥을 교()라고 해서 동교, 서교, 남교 등으로 불렀는데, 북교만은 창의문 바깥을 뜻했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을 의미하기도 해 기피대상이었던 것이 이유였다. 북쪽 문을 열어두면 여자들의 음기가 세진다는 이유로 풍수지리에서는 북쪽에 문을 놓지 않거나 놓더라도 일부러 왜소하고 좁게 지어놓고 닫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숙정문이 산 속에 지어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경복궁 신무문도 숙정문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지어졌다. 즉 음기를 쫓기 위해 숙정문은 무늬만 북쪽의 대문 형태로 취해놓고 닫아둔 다음, 실질적인 입구의 역할은 다른 문들이 대신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애초에 잘 열지도 않던 문인데,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이 문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며 상소를 올려 그 뒤로 소나무로 길까지 막았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자리까지 옮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옮겼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렇게 기피되는 문이다 보니 북대문(北大門)이라는 별칭도 당연히 붙지 않았다. 사실 "북대문" 자체가 최근에 와서야 붙은 별칭이다. 태조실록 1396년 9월 24일조를 보면 각 성문의 정식 명칭을 붙이면서 동대문, 남대문 등의 속칭을 일일이 붙여 주는데, 숙정문은 이때 아무 별칭도 안 붙은 쪽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출입은커녕 구경할 일조차 거의 없던 숙정문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버려진 문은 또 아니었는데, 그건 바로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양과 불의 기운을 가져오는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오히려 음과 물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숙정문을 활짝 열어 기우제를 지냈으며, 그러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경우 또 너무 많이 온다 싶으면 홍수를 막고자 도로 숙정문을 닫았다.

사실 현대 기준으로도 북악산 외진 곳에 있는 곳인데다 하필이면 숙정문 턱밑에 청와대와 총리공관, 경복궁[2], 정부청사 등 국가 주요시설이 죄다 들어서고 90년대 이후에는 외국 대사관[3]들까지 들어서면서 최근까지도 일반인들의 출입이 까다로운 곳이였다.[4] 하지만 이 때문에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다보니 사대문 중에서는 원형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현재의 현판은 1976년 문루 복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은 한문 가로쓰기다.

4. 여담

  • 1963년 1월 21일 이후로 서울 한양도성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5년이 지나 1968년 1월 21일. 1.21사태가 일어나 봉쇄되었고, 그로부터 38년이 더 지난 2006년 4월이 되어서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 현대는 풍수지리가 단순한 미신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숙정문을 닫아두고 그러진 않는다. 하지만 산자락에 위치한 열악한 입지조건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므로, 오늘날에 들어서도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흥인지문이나 숭례문과는 다르게 접근성이 아주 떨어지며 이 곳으로 직행하는 대중교통도 없다. 도로는 이 문 밑에 있는 삼청터널로 통과하기 때문에 자동차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굳이 찾아가려면 종로02번 종점이나 종로11번 종점에서 내려 서울 한양도성을 따라가야 한참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숙정문을 포함하는 부분은 한양도성 성곽 중에서도 아주 가파른 산길이다. 그나마 가장 편한 루트는 안국역에서 서울 버스 종로02를 타고 와룡공원 앞에 내려서 말바위 안내소로 향하는 것이 그나마 오르막길을 조금 덜 걷는 루트이긴 하지만 현재는 성곽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폐쇄되어 약간 돌아가야 한다.
  • 한양도성 성곽부분에서 숙정문을 포함하는 부분은 군사보호구역이라 정해진 시간대에만 출입이 허용된다. 하절기에는 오전9시부터 오후 4시, 동절기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며 오후 6시까지는 무조건 퇴장해야 한다. 신분증을 지참해야 했으나 2019년부터 필요 없다. #
  • 존재감이 적다. 숭례문 흥인지문이야 그렇다 쳐도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서 없어진 돈의문조차 서대문형무소, 신문로, 새문안, 서대문구 등의 지명에 남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살아남고 복원 예정인 반면, 숙정문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술했듯 실질적으로 문의 역할을 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결과.

파일:external/www.seongbuk.go.kr/contents277_1_cmyk.jpg }}} ||<width=490>
파일:창의문_지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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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숙정문으로 잘못 알려진 창의문 사진 <colbgcolor=#bf1400> 창의문 부근의 지형[5]
왼쪽 흑백 사진에 있는 문이 숙정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 사실은 창의문을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 사진의 지형과 흑백 사진의 지형을 비교해 보면 흑백 사진에 찍힌 것이 창의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숙정문은 산 위에 있기 때문에 근처에 초가집이 보일 수가 없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nGate1.jpg
일제강점기때 문루가 없다가 1976년에 문루가 생겼는데 고지도나 한양도성도를 보면 숙정문의 문루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아예 문루가 없던 문이 아니었냐는 의견이 있다. 혹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문루가 파괴된걸 방치한거여서 일수도 있으나 현재로선 알방법이 없다.

[1] 고지도에도 숙정문은 문루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아예 문루가 없던 문이 아니었냐는 의견이 있다. [2] 의아할 수 있겠지만 경복궁은 95년 조선총독부 철거 이전까지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태원전 자리에는 청와대와 서울시내를 방어하는 30경비단이 주둔해 있었고 청와대와 직결되는 신무문 인근에는 대대급 부대가 주둔하여 민간인들의 출입이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3] 베트남 대사관과 앙골라대사관이 인근에 있고 주한일본대사관저와 네덜란드대사관저도 이쪽이다. [4] 여기에 더해 1.21 사태가 인근에서 일어나기도 했고 차로 불과 5분거리에 10.26 사태가 발생한 궁정동 안전가옥이 위치해 있는 등 대한민국의 온갖 민감한 사건들이 인근에서 모조리 일어났다. [5] 사진 출처 - 국도교통부 V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