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851a5><colcolor=#fff>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송상용 宋相庸|Song Sang-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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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7년 9월 20일 |
서울특별시 | |
사망 | 2024년 6월 6일 (향년 86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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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 / 학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 / 석사) 인디애나 대학교 대학원 (사학 / 석사) |
경력 |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한국과학사학회 회장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한국과학철학회 회장 한국생명윤리학회 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성균관대학교 화학과ㆍ낙농학과ㆍ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교무처장 한림대학교 인문학연구소장 한림대학교 인문대학장 동아시아STS네트워크 대표 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대학장 |
가족 | 2녀 송지연·송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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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수.2. 생애
그는 1937년 9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5년 서울대 화학과에 들어간 뒤 과학사에 관심을 두고 화학과 졸업 후 철학과에 학사 편입, 1962년 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서울대 의사학교실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가 창립되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1964년 미국과학사학회에 가입했다. 1965년부터 한국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한편,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1967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과학사를 공부했으며 당시 미국은 반전운동과 함께 반과학 운동 바람이 거세게 불던 때였다. 이때 토머스 쿤, 레이첼 카슨,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을 읽으며 과학주의적 인식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키웠다.1970년부터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 '과학사'와 '자연과학개론', '과학영어', '문화사' 등을 강의했다. 1973년부터는 '현대과학신서'(전파과학사)를 발간했고 1977년 성균관대 조교수로 임명됐다가 1980년 "정치교수로 찍혀" 해직됐다. 이후 1984년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개설로 결실을 맺었다. 동년 한림대 사학과 교수가 됐고, 교무처장·도서관장·인문대학장을 지냈다.
동시에 그가 1980년에 출간한 '과학사 중심 교양과학'은 1980년대 초반에 국내에 과학사 관련 서적이 거의 없을 때 지적 갈증을 풀어준 유일한 책으로 꼽혔다. 1970년~1982년 한국과학사학회 간사를 도맡아 금속활자, 첨성대,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 산소 발견 200주년, 양자역학 50주년 등을 주제로 토론회와 발표회를 개최하고 과학사를 대중에 알렸다. 1979년에 창간된 '한국과학사학회지' 초대 편집인을 맡아서 1990년까지 12년간 12권의 학회지를 만들었다. 그는 2002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실린 '한국 과학사학계와 송상용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런던(London)을 '란든'으로, 마르크스를 '마륵스', 엥겔스를 '엥엘스'로 바꾸는 등 우리가 보통 쓰는 영어 발음을 원어에 가깝게 고치곤 했다.
그는 또 북한 '비날론 박사' 리승기(1905~1996)의 생애와 업적을 한국에 소개하고 남북한 과학교류를 강조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사박물관 건립 필요성을 역설했고, 2000년부터 한국자연사박물관연구협의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이끌었으며 한국생명윤리학회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2년 사재 1천500만원을 기부해서 '한국과학사학회논문상'을 만들었다.
그는 20년간 한림대 사학과에서 후학 양성을 하며 강의 중에 조지프 니덤과의 이야기나 에릭 홉스봄과의 추억을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 같은 교수 생활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