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송두환(宋斗煥) |
생몰 | 1892년 11월 9일 |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상면 신암동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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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년 5월 28일 |
대구광역시 | |
묘소 | 국립신암선열공원 제4묘역-29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송두환은 1892년 11월 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상면 신암동(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에서 태어났다.그는 1910년 정운해, 최윤동 등과 함께 신배달회(信倍達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19년 5월 독립운동 비밀연락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사재(私財) 1,300원을 들여 대구와 신의주에 2채의 가옥을 매입하였다. 또한 1920년 5월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수성면장(壽城面長) 서재문(徐載文)의 협조로 2,350명의 농민회원을 규합하여 국산품 장려와 농민들의 생활향상에 힘썼다.
1919년 9월, 송두환은 무기 구입과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입한 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고 귀국했다. 이후 만주(滿洲)에서 권총을 구입하고 사형집행장을 전달받아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으며 1920년 12월 김종철(金鍾喆)·김봉규(金鳳奎)에게 권총과 사형집행장을 교부하여 이들로 하여금 경남 합천과 의령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4월 23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8월 29일 가출옥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1923년 1월 정동석에게 권총과 실탄의 보관을 위임하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했다. 그러나 그해 3월 다시 체포되었고,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 8월 16일 신간회 대구지회 총회에서 집행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30년 1월 7일 저녁 대구사회운동자(大邱社會運動者) 신년간친회(新年懇親會)를 마치고 8일에 류연술(柳淵述), 장인환(張仁煥)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0년 11월 9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5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송두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4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