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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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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1년 1월 3일
경상북도 의성군
사망 1944년 5월 25일
사망지 미상
서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그는 1920년 음력 12월경 경북 의성에서 차경석[1]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해, 겉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했다.

흠치교는 교주 밑에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 밑에 6인조, 6인조 밑에 각 12인조, 12인조 밑에 각 8인조, 8인조 밑에 각 15인조 등을 두는 조직 체계를 구성했다. 이 같은 조직구성으로 흠치교는 경북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이들은 1924년 갑자해에 흠치교의 힘에 의해 조선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모집 및 교도증대에 힘을 쏟았는데, 손양중은 8인조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손양중은 이 일로 인해 1921년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도 종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8년경 전북 정읍에서 김언수의 신흥종교 창단에 동의하고 활동하였다. 1940년 음력 4월 전북 정읍에서 김언수, 황의붕 등 12인과 함께 최제우를 교조로 하는 시천교와 강증산을 교조로 하는 증산교를 합일시킨 종교적 성격을 가지며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건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후 1940년 음력 5월부터 11월까지 신도를 모집하고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 보천교의 교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