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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고려 거란 전쟁)/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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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
2.1. 1회2.2. 2회2.3. 4회2.4. 5회2.5. 6회2.6. 7회2.7. 8회2.8. 9회2.9. 10회2.10. 11회2.11. 12회2.12. 13회2.13. 14회2.14. 15회2.15. 16회2.16. 17회2.17. 21회2.18. 22회2.19. 23회2.20. 24회2.21. 25회2.22. 27회2.23. 28회2.24. 29회2.25. 30회2.26. 31회2.27. 32회(최종회)

1. 개요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인 소배압의 작중 행적 문서.

2. 작중 행적

2.1. 1회

프롤로그에서 강감찬과 대결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검차로 돌격해오는 고려군을 보병들로 저지한 뒤 역습을 가해 고려 본대가 사각방진으로 수비에 치중하게 만든다.[1] 그렇게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강감찬이 직접 검차를 끌면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반대편 언덕에서는 고려의 중장기병대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뒤집어지며 프롤로그가 마무리된다.

2.2. 2회

노환으로 죽어가는 승천태후를 보살피던 황제 야율융서 옆에 선 모습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자신을 위해 섭정하면서 몸소 전장에 나가 요나라의 영토를 넓힌 모후의 활약[2]을 거론하며, 이제 자신이 그것을 이어가야 한다고 야율융서가 말하자, 소배압은 고려가 요에 공순하지 않고 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꺾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야율융서도 동의하며 태후께서 서방정토로 떠나시기 전까지 항하( 갠지스강)의 모래알 중 한 톨만한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침공의 명분을 찾아내라고 명령한다.[3][4]

2.3. 4회

요 성종 야율융서가 현종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고려의 사신을 노려보다 승천태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동요한다. 이후 성종이 태후의 3년상을 중단하고 고려로의 친정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황제의 바로 뒷 대열에 선다.

2.4. 5회

거란군 본진에서 야율융서가 군사는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묻자 동경[5]으로 집결하고 있으며 야율융서와 그 휘하 군대가 동경에 다다를 쯤에 군사 집결이 끝나있을 것이라며 보고하면서 동경요양부에서 고려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덧붙힌다. 그리고 야율융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넘어오고, 첫 전투의 선봉장을 야율분노에게 맡기겠다고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2.5. 6회

선봉 야율분노가 흥화진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자 도통으로서 거란군의 장점이 병사 수(인력)인 점을 다시 짚어주고, 고려군을 쉬지 못하게 교대로 계속 공격하라고 지시를 내린 직후 다른 병사에게 타초곡을 시행할 것을 명령하는데, 풀이하면 말먹이와 식량을 빼앗는다는 뜻으로, 이른바 약탈을 제도화한 것이다.[6] 하지만 흥화진이 결국 무려 일주일을 버텨내고 성종 야율융서가 분노해 야율분노를 질책하자, 고려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야율분노를 감싸지만 성종으로부터 변호하지 말라는 꾸지람만 듣는다.

2.6. 7회


인간 방패까지 동원했음에도 흥화진 함락에 실패하고 이에 분노한 야율융서가 지휘관들을 처벌하려 하자, 야율융서가 지휘관들을 처벌하면 이번 패배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니 저들을 용서해 패배의 무게를 낮추라는 간언을 올려 용서를 받아낸다. 그리고 야율분노와 야율적로에게는 용서를 받아냈으니 남하할 준비를 하라면서, 덧붙여 "흥화진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고 한다. 이후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과 격돌하는데,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선봉대로 철갑기병을 보냈지만, 고려군의 검차진에 의해 기병대를 잃으며 후퇴를 명령하게 된다.[7] 직후 다른 이들과 논의하여 약점을 찾으려고 하지만, 아율분노가 독단적으로 강조의 지휘부를 기습해 강조를 생포한다.[8]

2.7. 8회


야율분노가 강조를 생포해 오는데 성공했지만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에게 칼을 겨눈채 저들에 지휘관이 잡혀서 고려 병력들이 물리적으로 와해됨으로 죄다 튀어버리고 흩어졌기에 섬멸시킬 기회를 날려 버렸다며 발길질까지 해대면서 분노를 표출하고 서둘러 와해된 고려군들에 대한 섬멸을 명령한다.[9] 또한 평야에서의 대회전에서 섬멸을 실패했으니 이제부턴 성의 고려군과의 공성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오히려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난이도가 훨씬 더 올라가 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10] 게다가 초기에 내세운 전쟁명분이었던 강조까지 너무 일찍 사로잡은 바람에 전쟁을 더 길게 끌 명분을 조기에 달성해 외교적으로 불리해진 점[11]까지 지적하는 등 전략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인 안목까지 갖춘 노련한 숙장이란 점도 부각됐다. 야율융서와 소배압의 입장에서는 항하의 모래알이라도 골라내는 심정으로 명분을 잡아내야 했기에 강조의 정변이라는 명분은 그야말로 자신들이 치고 내려갈 최고의 명분이었다.[12][13] 이후에 거란의 신하로 전향한 이현운이 알려주는 정보와 계책 그리고 고려군의 약점의 정보 수집에 만족스러워하며, 가장 취약했던 곽주성과 영주성을 공략해 손쉽게 함락시킨다.[14]

2.8. 9회


거짓 친조를 요청하는 강감찬의 현란한 말솜씨에 야율융서가 넘어갈듯 하자, 항복의 진의를 의심하며 야율융서에게 계속 간언한다. 또한 야율융서가 결국 친조를 승인하며 진격과 타초곡을 금하자, 승전보를 가져온 사신을 융숭히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감찬의 즉시 복귀를 저지했고, 이후 군막 밖에서 이현운과 만나 강감찬의 의도를 파악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인다.[15] 이후 강감찬과 독대하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설전을 벌인다. 처음엔 다른 신하나 장군들 내비두고 왜 서로 늙은 사람을 내보냈냐고 유쾌하게 주고 받다가, 자신의 아우 소손녕이 고려 땅을 밟았을 때 서희라는 사람과 담판을 벌였던 사실을 언급하며 "고려의 관리들은 교활하니 절대 믿지 말라고 했다" 사기 피해자의 진술는 소손녕의 경고를 알려주며,[16] 강감찬에게 거란 사신을 딸려서 돌려보낼테니 내일까지 서경의 항복을 받아오라며 압박한다. 또한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다는 강감찬의 주장에 고려의 항복이 진심이라면 절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가 논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조차 막아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항복을 위해 보냈던 사신들이 돌아오지 않자, 야율융서에게 진격을 재개할 것을 청하고, 이에 서경 진격을 앞두고 군대를 출발시키려는 시점에 거란 군영으로 들어오는 강감찬과 마주친다.

2.9. 10회

강감찬이 올려보낸 서경의 항복문을 받고 진격을 중지하려는 야율융서에게 정황이 의심스럽다며 다시 생각할 것을 권하려 하지만, 야율융서가 "역사에 기록될 전쟁에 오점을 남기지 말라"[17]고 윽박지르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부하들에게 계속 척후병을 서경으로 보내서 상황을 파악하라고 한 뒤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으면 바로 진격할 것이라고 벼른다. 결국 척후병들에 의해 서경에 동북면 군사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이럴줄 알았다"라며 서둘러 진격 명령을 내리고 이후 강감찬을 체포하러 갔지만 이미 그는 도주한 뒤였다.

2.10. 11회

서경에 맹공을 가하던 중, 전쟁이 너무 끌어지게 된다는 거란 측 중신과의 이야기를 통해 본인들이 고려군을 너무 얕보았다면서 이제는 속전속결이 아닌 주변부터 확실하게 점령하면서 포위하는 형식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나 자신을 호출하여 서경 대신 개경으로 바로 진격하겠다는 야율융서의 말에 중간 거점을 곽주 하나만 두게 된다면 너무 위험하다며 만류하나 야율융서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이기지 못해 서경을 포기하고는 개경으로 진격하게 된다. 직후 해당 방침을 제의한 야율분노에게 따졌으나 이것이야말로 승리의 길이라는 야율분노의 주장에 "고려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냐"며 "또 네 놈이 전쟁을 망치고 있다"고 한소리한다.[18][19] 이후 개경의 궁성까지 장악하여 개경에 진입한다.

2.11. 12회

개경 궁성에 진입하여 고려 국왕을 잡으러 정전에 들어갔지만 이미 정전이 빈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돌려 추격한다. 이후 말을 타고 동쪽으로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고 추적하지만 사실 그건 강감찬의 위장, 유인책이었고 결국 강감찬이 따돌리자, "고려 사신 또 네 놈이냐"라고 허공에다 소리 지르며 역정을 낸다. 이후 개경에 들어온 야율융서에게 고려 국왕이 도망쳤다고 보고하고, 이 와중에 곽주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남진해서 고려 왕을 잡자는 야율분노의 무모한 발언에 "15살짜리가 군사를 지휘해도 이렇게 생각 없이는 안 한다"며 비판하며 반대하지만 결국 야율융서는 고려 국왕을 추격할 것을 명한다.[20] 이후 야율융서와의 독대에서 자신이 고려군을 너무 얕봤다며 이제부터는 신중해야 한다고 고언하지만, 야율융서는 고려 국왕을 잡지 못하면 남진할 것이라고 하여 소배압을 경악하게 만든다. 고민하던 와중 이현운이 입안한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으로 서북면 고려군의 항전 의지를 없애버리자"는 작전을 받아들여 사신을 보내어 심리전을 걸지만 하필 서경에 나타난 강감찬이 현종의 생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며 실패로 돌아가고, 거란 고관으로부터 작전을 무너뜨린 게 사신으로 왔던 예부시랑 강감찬이라는 말을 듣자 "강감찬, 또 네 놈이구나"라며 이를 간다.

2.12. 13회

전리품을 받지 못해 불만이 쌓인 거란 병사들의 난동을 보고는 병사들에게 떠밀려 넘어진 보초를 베어 겁을 주고 황제께서 전리품을 나누어 줄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군사들의 불만을 억누른다. 이후, 요 성종에게 철군을 하여야 한다고 충언을 하지만, 야율분노와 다른 장수들의 반대와 황제의 강한 의지에 밀려 이를 설득하지 못한다. [21] 이후 대도수로 인해 발생한 소란을 듣고 달려와 호통을 치며 상황을 확인했는데, 대도수와 이현운이 죽어있는 현장을 보고 표정이 굳는다.[22] 그러던 와중 통주성으로 보냈던 사신과 노전이 돌아오자,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며 묻더니 거란인 사신은 돌려보내고, 함께 살아돌아온 노전에게는 의심을 품는데, 노전은 도순검사가 자신을 방면하면서 은밀히 말을 전하라고 했다며 강감찬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절령에서 강감찬과 다시 대면한다.

철군을 도와주겠다는 강감찬의 말에 그 진의를 의심하지만, 강감찬은 이번엔 숨기지 않고 거란을 철군시킨 뒤 돌아가는 길에 섬멸해버릴 작정이라고 대놓고 털어놓는다. 철군을 하기 위한 명분을 찾아주겠다는 강감찬의 말에 고려 황제의 항복을 받아오던가, 아니면 고려황제가 거란 황제에게 친조를 청하겠다는 표문을 지어오라는 말을 한다. 그것은 항복보다 더 큰 굴욕이라는 강감찬의 말에 "하겠다는 말만 전해라. 실행은 나중 일이다"라고 전하며 3일 안에 표문을 갖고 오라고 요구한다. 이후 돌아가기 전, "네 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을 막는 고려군을 섬멸하고 유유히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라며 큰소리친다. 이후, 야율분노에게 강감찬이 잡혀 거란 군영으로 압송을 당하고, 자신의 군영 이탈을 야율분노가 일러바치자 황제 야율융서에게 추궁을 받는데, 처음에는 자신은 정찰을 나간 것이지 강감찬을 만나지 않았으며, 그를 발견하지도 못했다며 발뺌하지만, 함께 나갔던 병사들과 대질을 하겠다는 말에, 자신을 의심하는 황제에게 자신은 그동안 늘 황제를 위해 일하였고, 황제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번 일을 불문에 부쳐달라고 호소하며 야율융서와 갈등 구도로 들어선다.

2.13. 14회

침소에 있던 야율융서에게 병사들이 군영을 이탈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군 기강이 무너지고 있으니 이만 철군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하지만 야율융서는 소배압의 계획은 어찌 되어가냐며 묻고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지만 서두르라는 말을 한다. 이후 군사들을 이끌고 와 감옥에 붙잡혀 있던 강감찬을 만나러 가는데, 남편을 치료하고 감옥 앞에 있던 강감찬 처는 그에게 거란은 포로를 이렇게 대우하냐며 차라리 남편을 죽이고 자신도 죽이라고 일갈한다. 결국 강감찬과 아내를 풀어주고 숨겨준다. 들키면 어떻게 하냐는 부하의 걱정에는 '저 자가 입을 열면 오히려 폐하께서 더 위험해지니, 이게 다 폐하를 위한 일이다'라는 말로 설득하며 함구할 것을 명령한다.[23] 사신을 통해 친조를 전달한 고려 국왕 현종의 태도에 분노한 야율융서가 제후국들에게 위엄을 보이겠다는 명목으로 개경에서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하자 기뻐하는 야율분노, 야율적로 등 다른 장수들의 태도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족 관료들과 함께 당황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2.14. 15회

처음엔 야율융서를 만나러 갔지만, 야율분노가 "도통을 들이지 말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다"며 저지당한다. 거란군이 이동 준비를 마친 후 다시 부름을 받는데, 남쪽으로 진군하라는 명을 거부하고, 다시 한 번 철군을 간언한다. 야율융서는 고려 사신과 내통한 것도 참아줬는데 고작 거짓 표문을 가져왔냐며 화를 내지만, "그 표문마저도 없으면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 거란의 황제는 일생을 전쟁을 하며 살아가야 하며, 그렇기에 한 전쟁에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 된다"며 야율융서를 설득, 결국 철군 윤허를 받아낸다. 진군 준비를 마친 휘하 장수들에게 폐하의 명이 철군이라고 전하며, 약탈품과 포로들을 챙기고 개경을 불태우라고 명하고, 본인이 직접 고려의 황궁을 불태우고 떠난다.[24] 이후 귀주 방면으로 향하는 이유를 야율융서가 묻자 적이 서경과 통주 방면에 함정을 깔아두었는지라 안전한 길로 우회한다며 안심시키지만, 귀주 협곡에서 야율분노 포함 선발대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자, 노전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노발대발하며 노전을 잡아오라 하지만 노전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이후 계속 양규의 부대에게 공격당하자 자신의 불찰이라며 죄를 청하지만, 야율융서는 "고려가 원래 교활한 나라라 그렇다"며 체념한듯 분노를 삭인다.

2.15. 16회

성종 야율융서의 명으로 양규와 결사대를 잡을 덫을 치고, 계획대로 그들을 포위하는데 성공하나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결사대가 결사항전을 무릅쓰고 야율융서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궁수 부대를 투입시켜야 한다고 권한다. 하지만 야율융서는 더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오히려 보병 부대를 더 밀어넣으라고 한다. 그러나 양규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야율융서를 노리며 다가오자 결국 직접 궁수 부대에게 제압하라고 지시한다. 궁수 부대는 말그대로 양규와 김숙흥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어 결국 둘을 죽인다. 이후 허탈해하는 야율융서를 다독이며 압록강을 건너 거란으로 돌아갔다.

2.16. 17회

거란의 수도 상경에서 야율융서와 함께 다시 한번 고려 정벌을 두고 상의한다. 동원 계획을 보고하며 이번에 징발될 군사가 10만[25]이라고 보고하자, 야율융서는 실망한다. 이번엔 야율융서의 친조 없이 에게 고려 정벌을 맡기라고 간언한다. 한편, 어떤 명분을 찾을 것이냐는 성종의 물음에, 이미 명분은 저들(고려)에서 쥐어줬다며 '고려 국왕의 거란 친조'를 언급한다.

2.17. 21회

고려의 사신들이 친조 문제로 거란의 행궁(게르)에 올 때 성종 야율융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또한 2차 여요전쟁이 끝나고 도통(사령관)직을 내려놨기 때문에 이제 작호인 난릉군왕(蘭陵郡王)[26]으로 호칭된다. 급변 사태가 발발해 행궁이 급박하게 수도인 상경으로 복귀해야되는 상황이 되면서 소배압 본인 역시 상경으로 이동한다. 이후 다시는 사신을 파견하지 말라는 성종 야율융서의 명에도 고려가 다시 김은부를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한번 분노한 야율융서는 소배압에게 사신이 오는대로 목을 베라고 명한다.

2.18. 22회

거란에 사신으로 온 김은부를 성종 야율융서의 명을 받들어 참하려고 하나, 갑자기 나타난 송 사신과 당항 사신이 제지하여 일단 물러난다. 이 과정에서 송 사신과 당항 사신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됐는지 묻는데 두 사신은 거란의 한 관리가 와서 알려줬다고 밝혔고 소배압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27] 이후 야율융서에게 외국의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고려의 사신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데다가 김은부가 현종의 장인이기에 그를 억류하는 것이 더 좋고, 천령절이 끝나고 다른 사신들이 다 물러날 즈음에 처리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모은 병사를 서북 변경의 반란 징후를 진압하기 위해 이동시켜야한다고 성종 야율융서에게 보고하고, 고려를 공격할 기회는 다시 올 것이라고 타이른다. 한편 3천의 군사를 고려-거란 국경으로 보내 거란의 선발대가 출동한 것으로 오인하도록 기만전술을 펼친다. 이후 상경에 찾아온 하공진을 만나 야율융서가 그를 아껴 남경에 집과 배우자를 선물한 사실을 언급하며 그런데도 왜 남경이 아니라 상경에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하공진이 성종의 천령절 하례를 위해 머무르고 둘러대고 가자 그를 넌지시 노려본다. 하공진의 도움을 받아 상경을 탈출하려던 김은부를 다시 억류한 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게 아니냐며 웃는다. 이후 2차 여요전쟁 중에 고려가 자신들을 기만했듯 자신들도 고려를 똑같이 기만하고 있을 뿐이라고 힐난한다.[28] 또한 김은부에게 거란 사신단의 진짜 목적은 현종의 친조나 강동 6주 전체가 아니라, 흥화진임을 밝히며 흥화진이 거란으로 할양되어야만 김은부 본인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웃는다.

2.19. 23회


김은부가 탈출한 것을 두고 야율융서에서 직접 가서 김은부를 체포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고려가 자신이 온 것을 보고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 국경에서 체포된 하공진을 보고 네 놈이 결국 어리석은 짓을 벌였구나라고 꾸짖은 뒤 하공진을 야율융서에게 보낸다. 그 후 내원성에서 김은부와 차 한잔 마시면서 죽음을 맞는 공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자업자득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는 질문에 죽음을 자청하는 고려인들에게 늘 해주고 싶었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은부를 처형하려는데 거란 사신이 억류된 것을 듣고 강감찬과 압록강에서 만나는데 고려 국경으로 직접 건너가서 이야기 한다. 용케도 불에 타죽지 않았다면서 안부인사를 전하고 협상을 하는데 내부의 반란, 고려, 송의 3면 전쟁에 시달리고 싶냐는 강감찬의 이야기를 듣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말하면서 돌아간다.

그 후 부관들이 고려를 공격하자고 이야기 하나 본군은 없으며 현재 내원성에 주둔하고 있는 3천이 전부라고 말하면서 고려가 쳐들어오면 동경까지도 내어주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란 국경으로 찾아온 강감찬과 다시 협상한다. 부관들이 고려가 우리를 공격할 확률은 100분의 1 확률도 안되니 김은부를 죽이라고 조언 했던 일을 말하면서 그러나 그 확률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거란 사신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면서 고려 사신은 몇달 뒤에 보내겠다고 말한다. 왜 그래야 하냐는 질문에 거란의 위신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면서 대신 김은부를 내원성에 두고 자신이 폐하를 설득하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내원성이 아니라 여진족들의 영역에 두어 고려가 직접 보살핀 후, 내원성을 통해 돌려받겠다고 받아치는 강감찬의 이야기를 듣고 또 폐하를 속이라는 말이냐고 짜증을 내지만 거란을 위해 다시 한번 적과 내통하라는 강감찬의 말에 수긍한다.

2.20. 24회

야율융서에게 김은부의 일을 두고 또 다시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후 고려는 언제 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서북쪽 국경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반란의 징후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한번 역심을 품은 자는 그 마음에 사로잡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에나 고려를 공격할 수 있음을 알린다.[29] 그 후 1014년에 다시 고려를 재침하지만 정신용의 분전에 힘입어 실패했다고 나레이션이 언급한다.

2.21. 25회

연이은 국지전에서의 패전에 대하여 본인이 출정하지도 않았는데도 대신 사과하지만, 야율융서가 직접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며, 속히 고려를 다시 침공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놀라면서도 명을 따르기로 한다.

2.22. 27회

고려의 정변을 일으킨 자에 대해서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가 질문하자 소배압은 최질은 강조보다 못한 자라고 말한다. 그 후 현종을 거란의 인질로 억류하려는 야율융서의 생각에 옳은 판단이라면서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면 고려의 병사들도 우리 군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2.23. 28회

성종 야율융서에게 고려의 집권자들이 직접 현종을 친조의 형식으로 거란에게 넘길 것이라고 보고한다. 야율융서가 이를 의심하며 경계를 풀지 않자 고려 국왕을 거란의 인질로 삼으라는 고려 집정자들의 요구가 있었다는 사신들의 말을 전하면서 그렇게만 된다면 고려를 침공할 필요가 없다고 진언한다. 이에 야율융서는 압록강 건너편에 주둔중인 거란군에 일단 대기하라고 명한다.[30]

2.24. 29회


1018년,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기로 결정하면서 10만 대군을 이끌 도통으로 임명된다. 도통으로서 출정에 나서는 자리에서 성종 야율융서에게 직접 지휘봉을 하사받은 후 황제 친위대인 우피실군까지 데려가 이 전쟁을 반드시 끝내라는 명을 받는다. 이후 압록강을 넘기 전 막사에서 장군들에게 고려군을 결코 얕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소배압이 따로 고려군 정탐의 임무를 맡긴 장수가 돌아와 고려군의 사령관이 다름 아닌 강감찬이라는 사실을 전하자 인연이라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다시 장수가 고려군 규모가 20만이라며 그 숫자가 많다고 경계하자 병사의 숫자가 많아봤자 움직임만 둔해진다고 평가한 뒤, 우리의 목표는 고려군의 격파가 아니라 단 한 사람, 고려 국왕을 잡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2.25. 30회


압록강 앞에 당도하고 귀주쪽은 기병위주인 거란군에게 위험하다고 판단. 흥화진을 우회하여 통주쪽으로 가려고 계획하며 "고려는 늪과 같은 나라이며 말을 멈추는 순간 진창속으로 빠트린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강감찬이 먼저 흥화진 옆에 진을 쳐 대회전을 준비하는 걸 알고 한방 먹었다고 말하며 진격로를 뚫기 위해 흥화진 삼교천에서 야습을 가하지만 강민첨이 매복하여 별동대를 격파하고, 본대는 김종현이 이끄는 중갑기병대의 공격에 대패한다. 하지만 이는 소배압의 전략이었고, 삼교천에서 일부 군사를 희생하면서 고려군의 주의를 돌린 후 몰래 귀주쪽으로 우회하여 개경 직도 전략을 이행한다. 나중에 이를 눈치챈 강감찬이 보낸 강민첨, 조원의 추격대에게 서경 인근 자주, 마탄에서 공격받지만 일부 부대를 희생시켜[31] 추격을 막게하고 또 군사 일부를 매복시켜 김종현이 이끄는 중갑기병대의 추격을 저지한다.[32] 그리고 개경 근처에 도착한 후, 개경에는 군사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날이 밝으면 기병 300기를 데리고 성 주변을 정찰하라고 지시한다.
강감찬. 이번엔 네가 졌다.

여담으로 2차 전쟁 시기와 달리 이번 3차 전쟁에서는 갑옷 위에 짐승의 가죽으로 된 털옷을 착용했다. 이는 군왕의 작호에 봉해진 사실과 더불어 3차 여요전쟁의 발발 당시의 계절이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고증한 것으로 보인다.

2.26. 31회

강감찬이 징집한 군사들에 의해 개경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쭉 남진을 밀어붙인 뒤 정탐을 위해 선발대를 보냈지만 유방과 지채문이 이끄는 고작 100명의 기병과 이자림이 이끄는 궁수 부대에 의해 선발대가 전멸한다. 결국 긴 고민 끝에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직접 내려가 현종을 잡기로 하지만, 개경 앞에 다다른 순간[33] 수많은 횃불들을 보고 잠시 멈춘다.[34] 선발대의 정찰 실패로 인해 안그래도 흔들리고 있던 휘하 장군들이 크게 동요하였지만 소배압은 상대의 기만술을 읽어내고 계속 진격하려고 한다. 그러나 직후 개경의 백성들까지 차례로 횃불을 들고 나타나 현종과 대신들이 있는 대열에 합류하자 마치 대병이 개경의 본대에 합류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고, 이 모습을 보고 기가 죽은 부하들은 다시 북쪽으로 도망칠 것을 권한다.

그럼에도 부하에게 칼을 겨누며 끝내 개경으로 진격을 강행하려하지만 그 순간 도착한 전령으로부터 1만의 기병대가 개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칼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이 교활한 고려놈들!!"이라며 분노한다. 결국 상황이 잘못되면 부하들의 말대로 앞뒤로 고려군에게 포위될 수 있다고 오판해 귀주 쪽으로 후퇴하고 만다. 이후 군영에 머물던 와중 강감찬이 전달한 서찰을 전해받고, 강감찬과 자신이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귀주 벌판에서 벌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라고 군사들에게 명한다.[35] 다음날이 밝으면서 타초곡기를 통해 일부러 흙먼지를 일으켜 군사들의 움직임을 숨기고, 서전 의식을 벌인 다음 궁병들을 통해 수많은 화살을 퍼부어 먼저 겁을 주고, 기병들을 돌격시켜 고려군의 검차진을 보호 및 은둔시키는 방패진을 뚫고 1차 검차진을 공략한다.[36]

2.27. 32회(최종회)

1차 검차진을 돌파하여 고립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강감찬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2차 검차진이 끈질기게 버티는 와중에 바람 방향이 바뀌고 고려군 중갑기병대가 도착하자 다급해진 나머지 진영을 떠나 직접 병사들을 독려하며 호위병들과 타초곡기까지 동원해 돌파를 시도한다.[37] 그러나 돌파에 실패하고 전방에 강감찬, 강민첨이 이끄는 검차부대, 후방에 김종현이 이끄는 중갑기병대에 완전히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고 서서히 병사들의 사기가 꺾여가자 패배를 직감, 멘탈이 깨져 검을 떨어뜨린다. 결국 10만의 군사들 중 살아남은 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한 참패를 당하고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압록강을 건넌다.

거란 황궁으로 돌아온 소배압은 패전의 책임을 모두 지고 야율융서의 손에 처형당할 걸 각오하고 꿇어앉는다. 아율융서는 한순간 도끼를 들어 그를 죽이려다가 결국 처형하지 못하고 "고생했소, 가서 쉬시오."라고 말하며 도끼를 내려놓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궁을 나가고, 그 자리에서 소배압은 그대로 꿇어앉은 채로 비참하게 흐느끼며 통곡한다.[38] 이후 강감찬이 보낸 반협박성 서찰[39]을 읽으며 한순간에 입장이 뒤집혀진 현실에 좌절한다. # 결국 야율융서에게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 고언하고, 고려 사신을 다시 접대하는 것으로 출연을 마친다.


[1] 역사서에서는 10만 정예 기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프롤로그에서 등장하는 거란군의 대다수는 보병이다. 이게 이렇게 되는 이유는 제작 환경상 말을 그렇게까지 많이 동원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사실 상황으로 보아도 딱히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검차의 용도가 기병 돌격 막기에 최적화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정예 기병들이 말에서 내려서 보병화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검차의 돌격을 통나무로 능숙하게 막은 것도 그렇고, FPS 검차 밑으로 파고 들어서 싸우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보통 병사들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이들이 출세라고 하면서 신나게 돌격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호전적인 게 아니라 이들의 최정예 직업군인으로서 전공을 세우면 정말 출세가 보장되는 이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소배압이 이끈 정예 병사 10만명 중에는 황제 최정예 부대인 우피실군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런 이들은 전공 세우면 출세가 보장이 된다. [2] 실제로 송태종 연운 16주를 회복할 목적으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나라를 침공하자 태후 본인이 직접 나서 송군을 꺾었고, 이후에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역으로 공격해 전연의 맹을 체결한다. [3] 항하의 모래라는 표현은 불교에서 자주 쓰는 비유다. 요나라가 대승 불교를 깊게 숭상하는 국가였다는 걸 반영한 것이다. [4] 정확히는 소배압 옆의 한족 신하가 현재 고려와 전쟁을 벌일 명분이 없다는 말에 자극을 받아서 명을 내린 것이다. [5] 동경요양부. 현재 중국 랴오양 시. [6] 사실 원작에서는 흥화진을 상대로 한 공성전을 야율분노가 아니라 소배압 등이 주도하는데, 거란군은 이후 소배압의 명을 받들어 소혜의 지시 하에 북과 징을 치면서 공격하는 척 해서 고려군이 잠들지 못하도록 지치게끔 하려고 시도하며, 약탈을 허용한 것도 흥화진 전투 도중이 아니라 곽주와 안주가 거란군의 손 안에 들어와 고려군이 저항이 미미해졌을 것이라고 판단한 후의 일이다. 다만 흥화진이 산성이라서 급하게 공략하기 어렵다고 장수들에게 말하는 부분이나 귀주군 등의 고려군에 비해 거란군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을 통해 격파가 어렵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장면도 원작에 존재한다. [7] 원작에서는 처음엔 야전에서 고려군을 무찌르겠다고 야율융서 앞에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가 후퇴하고 나서 패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작전 회의 직후 토성을 쌓도록 지시하는데, 고려군이 또 검차로 방해하자 일단 아쉬워하면서도 다시 쌓으라고 명하는 동시에 거란군이 고려군보다 정예병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을 이용하여 저녁부터 자정까지 적당한 휴식과 함께 한 시진 단위로 군사들을 보내어 고려군을 지치게 하면서 거란군이 강조의 방진을 습득하고 연구하도록 지휘한다. 이 과정에서 검차진 아래로 들어갔다가 나온 병사도 있었고, 몇몇 기병 및 보병들은 또 피해를 입기도 한다. [8] 원작에서는 삼수채에서의 격전 동안 적극 참여하지 않아 힘을 비축하고 있던 야율적로와 우피실군 부대가 시체를 산으로 쌓아서라도 새벽에 선봉으로 나아가겠다고 하자 새벽에 야율분노 등의 선봉 지휘관들과의 합의 하에 강조를 포함한 고려군의 장수들을 생포하도록 본인이 지시한다. [9] 기록에 따르면 3만명의 고려군이 전사하였다고 적혀있지만, 30만명에 달하는 고려군 총 병력을 감안하면 지휘부 일부를 포함해 10%정도만 거란군이 섬멸한 것이고, 거란군이 전술적으로는 이겼어도 전략적으로는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다. 추가적인 정보도 없는 이상 저 3만명의 손실이 광군을 피하고 모조리 고려의 전투부대만 족족 골라 죽인 거라는 상정은 아무 근거도 없고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는다. 달아난 건 30만 전군이지, 전투병만 달아나다가 썰린 게 아니다. 오히려 정규군이 광군보다 후퇴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을 것임을 생각해보면 정규군보다 광군들이 더 많이 죽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실제로도 장수들의 지시 아래에 체계적으로 후퇴한 패잔병들은 되려 추적해오는 적들을 격퇴하며 후퇴하기도 했다. [10] 실제로 와해된 병력들이 곳곳에서 섬멸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병력이 통주, 곽주, 영주 등 여러 성으로 흩어졌고, 최사위가 나머지 병력들을 수습하여 개경 쪽으로 향했다. 게다가 상대는 초전에서의 섬멸에 눈이 멀어 수적, 질적 열세에도 검차만을 믿고 평지에서 대회전을 걸어온 만큼 기병이 강력한 거란에게 있어 이만한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 후로 여요전쟁은 수성, 기습. 그리고 외교적 기만을 중시한 고려에게 휘둘리다 돌아가는 길에 공격을 당하는 전개가 이어지면서 요나라가 멸망하는 날까지 고려에게 이보다 우세를 점하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게 됐다. [11] 실제로 강감찬이 야율융서에게 친조를 빙자한 기만전술을 실행할 때 오히려 야율융서 측이 몰아붙이려 했지만, 강감찬은 뻑하면 강조를 들먹이면서 거란 입장에서 추궁할 것들을 전부 강조 책임이라고 돌려버리니 거란 측에서는 더 이상 강감찬을 몰아붙이지 못하고 그의 언변에 휘말려야만 했다. [12] 원작에서는 처음부터 제장들을 잡고 고려군의 주력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거란에 있어 통주 전투의 최고 시나리오는 단순히 모랄빵으로 상대 본군을 일시적으로 괴멸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병사들은 섬멸시키되 강조는 탈출하게 두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강조의 위신이 떨어져 고려 조정이 분열과 혼란이 심화되고 자신은 역적 강조를 잡아야겠다며 더 밀고 내려갈 수 있는 명분은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 확실하게 전쟁을 더 이어갈 수 있는 시나리오가 된다. 때문에 야율융서도 제장들에게 통주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면서도 "만족스럽진 않지만"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13] 다만 작중 야율분노가 얌전히 있었어도 소배압의 의도대로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강조 역시 그런 소배압의 의도까지 내다보면서 파훼를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다. 서로가 전멸을 자신하며 건곤일척을 준비한 용호상박의 상황을 야율분노가 허무하게 무산시킨 것이다. 연출만 좋았다면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 수 있는 구도가 되었겠지만 지나치게 날림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 많다. [14] 원작에서는 야율융서가 제장들을 잡은 성과에 흡족하여 소배압에게 흥화진 및 통주성에 항복 사신을 보내고 속히 고려 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며, 소배압은 남쪽에 있는 예비대에 대해서는 어차피 시간을 버는 부대일 뿐이고 물러나지 않는다면 우회 기동로를 확보하여 전멸시킬 것이라고 자신감 있게 말한다. 이후 통주성 함락에 실패하자 곧바로 야율융서의 뜻에 따라 곽주로 가서 사흘간 일부러 남서쪽만 공격한 다음 고려군이 피로로 지친 사이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를 북쪽에 투입시켜 성벽을 넘어 대장대를 점령한 다음 항복을 받아내며, 안주는 박섬이 도망간 덕분에 무혈입성한다. [15] 거짓 항복인 건 알겠는데 뭘 믿고 했는지 알아야 한다. 당연히 이현운은 강조와 더불어 최고 사령관이니 고려의 군사체제와 운영방식을 모조리 알고 있으니 거란에게는 최고의 보배이자 고려에게는 매국노다. [16] 즉, 자신은 여전히 강감찬의 이번 친조 요청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17] 야율융서와 소배압이 요나라 역사에, 나아가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군과 명장인데 고려 한정해서 흑역사를 만든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대사. [18] 이후 2차 전쟁의 경과를 보면 야율융서를 비롯한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했으나 나주까지 몽진한 현종을 끝내 붙잡지 못한 채 그 사이 양규가 곽주를 탈환하면서 졸지에 중간 거점을 잃으면서 뒤가 끊어지게 된다. 이것이 2차 전쟁 당시 거란이 물러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 데다 이후 퇴각길에 계속 공격당하면서 피해를 입기까지 했으니 정말 소배압의 말대로 야율분노 때문에 전쟁을 망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소배압의 주장대로 주변부터 점령한 뒤 서경까지 완벽하게 점령했으면 개경을 점령하고도 계속 현종을 쫓을 여력이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19] 원작 소설에서도 야율분노가 개경 진격을 주장한 것은 동일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개적인 회의 자리에서 의견을 낸 것이며 야율요질을 제외한 다른 신료들은 반대하여 철군을 주장한다. 또한 원작에서 소배압은 야율융서가 야율분노의 의견을 마음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았고, 드라마와는 달리 본인도 예상치 못한 곽주 탈환 이후 생각이 확고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야율분노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는지 개경으로 진격하면 자신들을 막을 고려군을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야율융서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의견을 묵살하고 바로 수도로 들어가자고 주장한다. [20] 추격대는 현종을 쫒아서 가지만 평생 평야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고려의 험준한 산지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산에서 같은 곳을 빙빙 돌다가 지채문에게 전멸된다. [21] 단순 공이나 고집이 아니라 군사력과 관용으로 통치하는 거란 입장에서 제후국(형식상)인 고려를 제압하지 못하면 주변 제후국에 준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황제도 이를 염려했다. 소배압도 이를 알기에 이 문제를 말했을 때 반론을 못했다. [22]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현운은 요충지인 곽주성의 기밀정보를 넘겨 거란군이 곽주를 점령해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드는 등 거란군에게 있어 최고의 전향자이자 인재였기 때문이다. 당장 도망친 현종만 해도 그를 쫓으려면 고려 남쪽의 지리 정보가 절실한데, 그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제공해줄 인물을 허무하게 잃어버렸으니 생각지도 못한 악재였다. 실제로 소배압은 이후 고려의 남은 전력이 어떤지에 대한 예측 정보를 노전에게서 묻는데, 이미 이중스파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강감찬과 이야기가 되어있던 노전은 일부러 과장된 정보를 알려주어 소배압이 남아있는 고려군의 역량을 과대평가하여 과하게 신중하도록 만드는 오판을 저지르게 했다. [23] 야율분노는 그가 강감찬을 풀어줬다는 사실에 성질을 내지만 포로가 어디에 있는지, 소배압이 왜 풀어줬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24] 떠나면서 자신이 빼돌린 강감찬과 그의 처가 있는 쪽을 슬쩍 보고 간다. [25] 3차 여요전쟁 때 소배압이 데려온 군사의 수가 1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가 아니라도 역사적으로 거란이 총사령관을 도통단위로 임명하여 침공하는 경우 동원한 병력규모는 보통 전투병이 8만에서 10만사이, 보조병까지 모두 쳐도 대략 15만정도의 규모라고 한다. 2차에서 3차 사이의 3차례정도의 국지전때도 총사령관이 도통인 규모의 침공군이었다. [26] 실제로 요사 소배압 열전에 따르면 2차 여요전쟁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황제(성종)이 그를 칭찬하며 난릉군왕에 봉한다. [27] 아마 이쯤 하공진이 개입한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듯 하다. [28] 이후 김은부가 먼저 침공한 거란이 악이고 고려는 살아남기 위해 기만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자 태생에는 선악이 없고, 거란은 정복해야만 살수 있는 숙명을 지고 있다고 반박한다. [29] 그리고 이 장면에서 고려의 역심을 품은 장수를 비춘다. [30] 실제 역사에서는 김훈·최질의 난이 진압(1015년 3월)되기 전 통주를 다시 한번 침공(1015년 1월)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김훈·최질의 난 진압 이후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31] 극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이 과정에서 거란군이 입은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마탄에서는 군 전체의 1/10인 1만명이 고려군의 유격대에게 희생당했다. [32] 실제 역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일이다. 아마도 강감찬의 명령으로 개경을 구원하기 위해 떠난 후, 귀주대첩에서 재합류할때까지 병마판관 김종현이 이끄는 1만 기병대의 행적이 묘연한 것을 이렇게 묘사한 듯 하다. [33] 이 때 군사들의 정확한 수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소등하라고 명령한다. 소배압의 지략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연출로 볼 수 있다. [34] 현종과 신하들, 몇 안되는 군사들이 대군이 온 것처럼 횃불을 들고 기만 전술을 쓴 것. [35]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직도 전략을 펼쳐놓고 개경 공략에 실패해 적의 영토 한복판에 갇혀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공을 세울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귀주에서 고려 본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36] 이 시점에서는 프롤로그와 마찬가지로 몽골어로만 얘기하고, 이는 다른 장수와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또한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프롤로그에서 보여주지 않은 서전 의식 등의 연출도 보여준다. [37] 여기에 더해 소수 병력을 분단시켜 검차진의 약점인 취약한 측면을 노리는 등 노련하게 돌파구를 뚫으려 하지만 예측하고 있던 고려군에 막히게 된다. [38]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낯가죽을 벗겨내겠다는 수준의 극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극중 묘사만으로도 소배압의 소위 리즈 시절 귀주대첩에서의 대참패와 함께 완전히 끝장나버렸음을 알 수 있다. [39] 거란이 고려의 황제를 책봉하지 않을 경우 고려와 송이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할 수 있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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