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3:23:05

성제묘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6호 7호 8호
용양봉저정 성제묘 사육신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
성제묘
聖帝廟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385-1
(방산동4가 96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수량 / 면적 건물 1棟, 토지 21.4㎡
지정연도 1972년 5월 25일
관리자
(관리단체)
국유
파일:성제묘.jpg
파일:view_14691575752701.jpg
<colbgcolor=#ae1932> 성제묘[1]
1. 개요2. 역사3. 제사4. 현성전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Guanyu-1.jpg
<colbgcolor=#ae1932> 성제묘의 주신(主神) 관우
중국 삼국시대의 장수 관우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사당.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385-1, 방산동4가 96번지에 있다.

관우는 '관왕(關王)' 이란 호칭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관우의 사당을 일컬어 ' 관왕묘'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 역사

삼국시대 중국의 장군을 한국에서 기리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을 도우러 파병나온 명나라 군이 관우 신앙을 전파했으며, 명나라 장군들이 진중 근처에 관왕묘를 세웠다. 그 영향으로 인해 '관우의 음덕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조선군에게도 퍼져나갔다. 이에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조선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관왕묘 건립을 논의했고 국가차원의 관왕묘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관왕묘를 여러 곳에 세웠는데 방산동 성제묘도 그 중 하나였다. 첫 이름은 그냥 '관왕묘(關王廟)'였고, 대한제국 수립 후인 1902년( 광무 6년) 경에 고종 관우를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로 높이면서[2] 관왕묘도 '성제묘(聖帝廟)'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성묘(顯聖廟)'란 별칭도 이때 생겨났다.

성제묘가 있던 곳은 조선 초기에는 훈련원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훈련도감에 속했던 염초청이 있던 자리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성제묘를 원래 염초청 소속 관왕묘로 보기도 한다. #

3. 제사

현재까지 제사가 치러지는 현역 사당이다. 방산시장 상인들이 시장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관우의 생일 및 사망일마다 제사를 올렸으나 지금은 사망일인 음력 10월 19일에만 지낸다.

유교식으로 제례 의식을 진행한다. 상차린 후 다음 잔을 올려 재배하며, 참석자는 3명씩 함께 들어가서 같이 절한다. 제수 생선포, 제육, , 3색 과일, 조기, 막걸리 등이며, 장례를 치르거나 아이를 낳는 집에는 출입하지 않는 금기를 지킨다. #

4. 현성전

  • 본전인 현성전은 정면 1칸, 측면 2칸, 총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한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다.
  • 정면의 외면에는 세살문이 달려있으며 측면과 배면 외면은 노란색 벽이다. 정면 전면에 '顯聖殿(현성전)'이란 현판이 달려있다.

파일:성제묘 관우초상.png }}} ||
<colbgcolor=#ae1932> 성제묘 관우 부부 초상
본전 가운데에는 관우 부부의 영정이 있다. 관우는 붉은 얼굴에 조선 임금과 같은 복식을 하고 있고, 관우의 부인은 옅은 녹색 당의에 홍색치마를 입고 있으며 가체머리를 하고 있다.

5. 같이보기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서울 2천년사 18 조선시대 서울의 종교와 신앙, 423쪽
[2] '현령소덕무안왕(顯靈昭德武安王)'은 명나라 만력제가 내린 이름이고, 고종이 저기에다 '의열(義烈)'을 추가하고 '왕(王)'을 '성제(聖帝)'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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