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2:14:49

사회당(1948년)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제1공화국 ~ 노태우 정부
(1948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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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활동

1. 개요

1948년 12월 조소앙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창당한 정당. 조소앙은 원래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었지만 이후 남북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현실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김구를 떠나 이 정당을 창당해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또한 자신의 삼균주의를 실천하는 정당을 만드려는 목적도 있었다.

창당 준비 과정에서 '한국사회당' 또는 '민족사회당'을 당명으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굳이 '한국'이나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여 당명은 사회당으로 정해졌다. 사회당 창당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 공산당과 싸우는 나라에서는 사회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익정당 일색인 마당에 사회당이 생긴다니 반갑고, 더구나 조소앙 선생이 이 당을 한다니 반갑다"며 축사를 했다.[1] 그러나 일부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면서 당의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다.

2. 활동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8명이 입후보하였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한 조소앙은 우익의 거물 조병옥을 제치고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고,[2] 조시원 양주군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면서 총합 2석을 얻었다. 조소앙은 6월 19일 실시된 국회의장 선거 1차 투표에서 48표를 얻어 이승만이 민 오화영(46표)을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고작 1달 만에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 납북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이게 한국 현대사 전체로 봐도 비극인게, 이때 조소앙을 비롯해 김규식, 윤기섭, 안재홍, 원세훈 등 당시 남한 정국에서 중도파를 이루던 핵심 인사들이 대거 납북되었고, 전쟁 이후 남한 정계는 극단주의 세력들이 판치기 쉬운 환경이 이뤄질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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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하자면 온건한 사회주의 정당을 수용함으로써 대중들이 극단적 공산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앉혀 1949년 농지개혁법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공산주의 동조를 줄이고자 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물론 조봉암을 사법살인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후의 행보는 이때 본인 말과는 영 다른 행보를 보여주는게 문제지만 말이다. [2] 조병옥 측은 선거 전날인 5월 29일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찌라시 벽보와 전단을 성북구 일대에 뿌렸으나 참패하였다. 역사가 생각보다 유구한 가짜뉴스. 선거 유세 마지막 날 조소앙이 직접 모습을 보이며 유세하여 자신의 건재를 과시한 게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