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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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가타야마 데츠 |
제2대 스즈키 모사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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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카미 조타로(사회당 우파) | 스즈키 모사부로(사회당 좌파) | |||
제3대 스즈키 모사부로 |
제4대 아사누마 이네지로 |
대행 에다 사부로 |
제5대 가와카미 조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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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사사키 고조 |
제7대 가쓰마타 세이이치 |
제8대 나리타 도모미 |
제9대 아스카타 이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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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이시바시 마사시 |
제11대 도이 다카코 |
제12대 타나베 마코토 |
제13대 야마하나 사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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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무라야마 도미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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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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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제6대 중앙집행위원장 사사키 고조 佐々木更三 | Sasaki Kōz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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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3283><colcolor=white> 출생 | 1900년 5월 25일 |
일본 제국
미야기현 모토요시군 (현 토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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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5년 12월 24일 (향년 85세) |
일본 도쿄도 | |
학력 | 니혼대학 (정치학 / 학사) |
의원 선수 | 11 |
의원 대수 |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
지역구 | (구) 미야기 1구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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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파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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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미야기 일반노동조합 위원장 센다이시 시의원 미야기 1구 중의원 일본사회당 제6대 중앙집행위원장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6대 일본사회당 제6대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2. 생애
1900년 5월 25일 일본 미야기현 모토요시군 (현 토메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사키는 양부모가 모두 가출했을때 태어났기 때문에 11살이 될때까지 호적에 등재되지 못했고, 이때문에 소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숯을 굽는 일을 하는 등 힘든 유년시기를 보냈다. 이후 사회를 위해서 큰일을 하고자 결심했고 1924년 센다이시의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번 뒤 도쿄로 상경해 검정고시로 니혼대학 전문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니혼대학 졸업 이후 자전거회사에서 일하다 파업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고,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며 수많은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1937년 무소속으로 센다이시 시의원에 당선되지만, 이듬해 발생한 인민전선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어, 시의원직을 상실했다.
시의원직 상실 이후 책방을 운영하거나 연료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1945년 일본사회당의 결성에 참여하며 미야기현지부 창설에 힘을 쏟았다. 1946년 센다이시 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같은해 치러진 22회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미야기 전현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리고 1947년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미야기현 1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어 국회 첫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좌파사회당에 소속되어 스즈키 모사부로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스즈키파의 중진이 되었다. 이때 좌우파로 분열된 사회당의 통합에 앞장섰고 1955년 사회당이 다시 통합되자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합당에 반대한 와다 히로오와 친소련파인 사회주의협회와는 사이가 소원해졌다.
1960년 스즈키가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새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스즈키파로부터 사사키가 차기 서기장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가와카미파와 와다파로부터 반발이 나왔기 때문에, 사사키보다 정치 경력이 더 많은 에다 사부로를 서기장 후보로 추천했다.하지만 서기장이 된 에다가 언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자 사사키는 에다가 언론의 인기를 너무 노린다며 비판했다. 이후로도 에다가 구조개혁론을 주장하자 사사키는 사회주의협회와 손잡고 에다를 쫒아내려 했고, 두 파벌간의 항쟁은 갈수록 격해졌다.
1964년 아사누마의 피살 이후 후임 위원장에 오른 가와카미 조타로 위원장 아래 도입된 중앙집행부위원장에 와다 히로오와 함께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가와카미가 병으로 위원장직을 사임하자 와다도 위원장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사사키가 신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사키는 위원장 취임 연설에서 “미국 제국주의는 세계 인류의 적”이라고 말해 반미주의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선 사회당 위원장들은 대학교수, 학자 등 교육인 출신의 고학력자 출신이 많아 서민적이고 학벌이 다소 떨어지는 사사키는 사회당 지지자로부터 인기를 받기 어려울것 이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의외로 그의 도호쿠벤이 유권자들에게 호응을 받아 언론에서의 노출도 점차 많아졌다.[1]
1967년 제31회 중원선에선 의원 정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수가 줄어드는 패배를 당하고 건강보험특례법 처리 과정에서 소장파 의원들과 마찰을 빚다가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로도 에다 사부로가 당 고위직에 오르는것을 계속 방해했고, 나라자키 야노스케[2], 야마모토 고이치 등과 같이 자신의 파벌 의원들로부터 인망을 잃었다.
1972년 중일 수교 당시 사사키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요청으로 사회당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 공명당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즈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극비리에 방문해 중일교류의 초석을 쌓았고, 이후 사회당 내 친중파로 활약했다.
친소파인 사회주의협회가 세력을 확장하자 사사키와 사회주의협회와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74년 에다와 화해한 사사키는 가쓰마타 세이이치 전 위원장, 미야케 쇼이치 부위원장과 함께 7인위원회를 결성해 사회주의협회와 대립했다.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대교체의 여파로 낙선했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77년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중국과의 우호를 호소했지만 친소파 출신 대의원들에게 야유와 조롱을 받았고, 1978년 민주 캄푸치아를 방문해 폴 포트 등의 인사를 만난 뒤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 행위는 없었고 캄보디아 집단학살은 악의적인 선전이라 주장했다.[3]
1985년 12월 2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평가
1960년대~1970년대 좌파사회당의 리더로서 구조개혁론을 주장했던 에다 사부로 등의 인사들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으며 당 내 파벌 항쟁을 극대화 시켰고, 이는 사회당의 극좌화와 함께 점점 일반대중의 민심을 잃고 사회당이 쇠퇴하는데 기여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있다. 또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비롯되는 에다 비전을 무시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당시 기세가 오르고 있던 사회당의 당세에 찬물을 끼얹으며 만년 야당으로 전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4]게다가 킬링필드로 비롯되는 크메르주르의 학살을 미화한 것은 두고두고 까여도 할 말 없는 존재로 여겨지며, 전직 총리인 다나카 가쿠에이도 "사사키가 에다 사부로를 짓밟은 시점에서 사회당의 정권 교체 가능성은 사라졌다"라고 회상했다.
4. 소속 정당
<rowcolor=white>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7 - 1945 | 정계입문 |
|
1945 - 1950 | 창당 |
|
1950 - 1955 | 분당 |
|
1955 - 1985 |
합당 정계은퇴 사망 |
5. 선거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7 | 센다이 시의원 선거 | 센다이 선거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당선 | 초선 |
1946 | 센다이시 시장 선거 | 센다이시 | ? (?%) | 낙선 | ||
제2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미야기 전현구 |
|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미야기 1구 | 35,623 (11.2%) | 당선 (4위) | 초선 |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26,719 (7.7%) | 당선 (5위) | 재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44,275 (10.6%) | 당선 (3위) | 3선[a]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48,358 (11.9%) | 당선 (5위) | 4선[a]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5,224 (14.4%) | 당선 (3위) | 5선[a]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5,917 (14.1%) | 당선 (3위) | 6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8,797 (12.8%) | 당선 (5위) | 7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2,989 (13.2%) | 당선 (4위) | 8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99,214 (18.3%) | 당선 (3위) | 9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9,349 (11.8%) | 당선 (5위) | 10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91,041 (13.8%) | 당선 (3위) | 11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75,573 (10.1%) | 낙선 (6위) |
[1]
그러나 자신이 에다에게 언론빨로 인기를 얻었다는 발언을 했다는것을 생각하면 언동에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인 행위라고 할수있다.
[2]
1920-2011,
록히드 사건,
리쿠르트 사건과 같은 정부 여당의 비리 스캔들을 폭로하며 국회의 폭탄남이란 별칭이 있었다.
[3]
하지만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 실태를 몰랐다는 핑계도 대기 어려운 것이,
크메르 루주가 사사키 의원을 초청해서 자국을 둘러보게 하고 귀일(帰日)한뒤 이런 쉴드를 쳤다. 즉,
킬링필드의 실태를 보고도 크메르 루주 정권을 지지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좌파사회당에 포섭된 후 노골적으로 당내 좌파를 편들던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조차도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논고 단계에서 기각했다.
[4]
이때 사회당의 파벌싸움과 극좌화에 반발한 지지층들은
일본공산당과
사회민주연합 등으로 흩어지며, 두 당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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