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7 17:53:39

사덕제(명군이 되어보세!)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

원 역사 베트남 응우옌 왕조 뜨득 황제와 동일인물이다.

2. 작중 행적

소치제의 차남. 초명은 완복홍임.

부황 소치제처럼 프랑스의 세력을 끌어들여 대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부황 이상으로 대한에 반감이 커서 대한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다 싫어하는데 혐한이 도가 지나쳐 원 역사에서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시킨 암군의 면모를 잘 드러냈다.

대한에서 개발했다는 이유로 관민에서 편의성 때문에 잘만 쓰이던 국문(한글) 사용을 금지했는데, 지네가 기어가는 것 같은 문자라고 폄하하는건 덤이다.[1]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환자들에게 대한 황후가 개발했다는 이유로 한후수(경구수액) 사용을 금지했는데, 현장의 의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지만 관에서 약을 공급하지 않자 사망자가 폭증했으며 종두도 반대해서 본인 또한 종두를 맞지 않았다. 부황 소치제 당시 프랑스가 안남을 통해 태평천국에 무기를 판매하는걸 묵인한 행위에 대해 대한이 해명을 요구할 때에는 숙여도 모자를 판에 모든 걸 서나라 때문이라며 남탓하는 4과문을 보내 대한의 심기를 거스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친 프랑스&반 대한 정책을 밀어붙이고 대한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주장한다. 정작 전쟁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고, 안남군은 딱 봐도 대한의 상대조차 못 되는 처지였다.

거기다 국론과 민심을 통합시킨답시고 정복한 타민족들을 대상으로 과격하고 극단적인 민족동화정책을 펼쳤는데, 이름부터 시작해 언어와 문자, 의식주, 종교까지 전부 안남식으로 바꿀 것과 안남인과의 결혼을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이다. 말이 민족동화지, 문화말살에 가까우며, 심지어 이러한 정책을 엄연한 상국의 백성인 대한인에 적용한다. 보다 못한 온건파 신하들이 이를 만류하자 전혀 듣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었는데, 이런 식으로 공포정치를 벌여대니 대다수 신하들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더더욱 위축되어 무조건 따르는 예스맨이 되어버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반한감정으로 종두를 맞지 않은 게 화근이 되어 천연두에 걸려 쓰러지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원 역사대로 고자가 되었다. 기어이 군대를 키워 대한이 맞서겠다는 망상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 죽은 물건 세워보겠다고 구차하게 그렇게 싫어하던 대한산 홍삼탕을 꾸역꾸역 마시는 모습이 가관.[2] 홍삼탕 한 그릇을 먹은 후 지나가던 궁녀를 아무나 잡아다 성폭행에 가까운 성관계를 시도하려다가 안 서면 쫓아내는 일을 반복, 그렇게 홍삼탕을 400그릇, 홍삼 뿌리도 200개, 마카 분말도 한 가마니 넘게 먹고도 안 서자 태의한테 홍삼탕 444그릇을 먹기 전에 자기 물건이 안 서면 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등 추태를 부린다. 그러다 441그릇째 홍삼탕을 먹고 겨우 죽은 물건을 세우는데 성공하고, 기쁨에 겨워 태후와 대신들을 죄다 불러서 자기 성관계 장면을 직관하게 하는 기행을 선보인다.[3]

발기는 가능해졌지만 그 안의 생식 능력이 돌아왔는지는 미지수이며 무엇보다 유교 사회에서 어머니한테 그걸 직관하게 만든 건 빼도박도 못 할 패륜이라 완복시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다. 태후에게 공개 섹스쇼를 선보이며 충격을 준 완복시는 본인이 효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유독 태후의 의견에만 정면으로 거스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기 나름대로 어머니를 아끼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완복시의 사고방식이 워낙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서, 어머니에게 아들의 성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효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후 대한 덕분에 성기능을 되찾았으니 토지 국유화는 유보하겠지만 강제동화는 계속 하겠다고 선언, 이걸 대한에 국서로 통보하는 정신나간 짓까지 저지른다. 분노한 대한이 계속해서 치죄사를 보내 사죄를 요구하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적반하장을 시전[4], 대한의 안남 정벌을 확정지어 버린다.

대한의 안남 정벌이 시작된 후 정신줄을 놓아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충효사상에 호응해 안남군도 결사항전에 나서지만 그런 항전이 무색하게 안남군은 대한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대한군에 의해 수도 후에가 포위당한다. 후에가 함락되기 직전까지 가자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북쪽으로 몽진하는데 그 와중에도 안남이 프랑스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될 각종 문서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형제들은 물론 삼촌, 사촌, 오촌 당숙, 육촌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온 일가친척들을 다 챙겨갔는데, 혈육의 정이라기보다는 종친이 대한 손에 넘어가면 대한이 다음 안남왕으로 옹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파천길에선 뒤늦게나마 정신을 좀 차리고 피난길에서 군사들을 잘 독려하며 사기를 유지하고 자기 소생 아들들을 도주시킨 선황의 후궁 서빈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등 나름 개념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도 잠시, 전술한 서빈의 아들들 완복홍항과 완복홍일이 자신을 떠나 도주하고 이복형 안풍공도 도망치려다가 붙잡힌 후 면전에서 그의 막장 행각을 비판하는 등 형제들까지 자신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다시 평정을 상실, 풍군왕을 처형해버리고[5] (이미 대한과 안남을 분할하기로 합의한) 후송군의 지원을 받아 대한군을 물리치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우는[6] 등 답이 없다. 이후로도 폭주해서 날뛰다가 진정해서 상식적인 지시를 내렸다가를 반복한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면 자신을 지원하리라 생각했던 나폴레옹 2세 마저 그를 손절하면서 고립무원의 신세에 놓인다.

자신을 잡으러 온 대한군이 자신이 몽진한 동하, 동해, 하정에 이어 영까지 함락시키자 인질로 끌고온 왕족들과 대신들까지 전부 버린 채 대비만 데리고 밀림으로 도망친다. 대한군이 보낸 추격대와 공중강습까지 죄다 피해가며 원 역사의 선조와 인조를 능가하는 도망 실력을 선보인다. 그와중에 의병 활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열심히 뿌리면서 분탕을 치는 바람에 열받은 재석은 완복시를 잡는 이에게 3품 벼슬에 은 1천냥을 주겠다는 포상까지 내건다. 그러나 밀림에서 대한군과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한동안 자제하던 색욕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마을에 머물 때마다 현지 여자들을 강제로 징발해 범하기를 반복, 어느 마을에서 잠자리 상대로 고른 소녀를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해 며칠씩이고 검열삭제에 심취해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대한군 편에 선 몽족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붙잡히고 만다.

이후 대한으로 압송되는데, 재석은 완복시에게 그간 매우 열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한의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순교자로 만들어주기는 싫었기에 그가 무릎을 꿇고 사죄를 청할 경우 한양에 집 한 채를 내주어 살게 해 사실상 연금시키고, 뉘우치지 않을 경우 울릉도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한다.[7] 한편 완복시 본인은 대한으로 끌려가면 살긴 글렀으리라고 체념해 절명시를 남기고 당당하게 죽으려 했으나, 대한에 와서 대한의 위상을 실감하고 나서야 자기가 어떤 나라를 건드린 건지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재석한테 바로 머리를 박고 백배 사죄한다. 모든 일에 대해 다 자신이 어리석었고 정말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를 정도로 머리를 박는 모습을 보여 대신들에게 동정까지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모친(+안남에서 데려온 하인들 6명)과 함께 한양 도성에 거처를 받는다. 물론 시가지 한복판은 아니고 북한산성에 유폐된다.

유폐와 동시에 안남후라는 봉작도 받았는데 이로 인해 예전 직책이던 대남국 황제는 물론 남월왕이 된 이복동생 완복승과 자신의 옛 신하였던 점파공보다 신분이 낮아지게 되었다.

3. 평가

독자들의 평가는 가히 최악이다. 2부의 만력제에 버금갈 정도.

응우옌 왕조 자체가 서산당에 의해 나라가 망했던 것을 대한의 지원 덕분에 나라를 재건한 것은 물론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통일 베트남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응우옌 왕조에게 있어서 대한은 문자 그대로의 '재조지은'을 베풀은 국가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시대의 일반적인 식민지 국가들과 달리 대한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조공-책봉 체제에 기반한 번국 체제라서 타 식민지들보다 훨씬 괜찮은 대우를 해주었고, 대한은 삼국시대~조선시대 중국을 상대로 상당히 널널한 대우를 받았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남국처럼 나름 한가닥하는 나라가 상대라면 더더욱 비슷한 대우를 해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4부에서 뒷배가 필요한 몇몇 소국들이 스스로 번국이 되기를 자처할 정도다.

따라서 대남국이 반한 정책이네 뭐네 하며 쓸데없이 대한에게 어그로 끌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비위를 맞추면서 외왕내제를 하고 살았으면 대한도 굳이 대남국을 터치하지 않았을 것이다.[8] 이재석이 4부에서 적극적인 확장주의 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달리 자신의 협력국들에게도 지분을 나누어 주는 특성상 대남이 평소에 대한의 비위를 적당한 선에서 맞추며 협력을 했다면 오히려 대한의 인도차이나 확장 과정에서 여러 이익을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남국의 역대 황제들은 반한 감정을 내세우며 어그로를 끌고 있었는데, 명명제는 어느 정도 선을 봐가면서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이 대남국을 치려 하지 않았고, 소치제도 딱 좋은 타이밍에 사망한 덕분에 사덕제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설령 대한의 침공을 피하지 못해 영토를 상실당하는 최후를 피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남부만 참파령으로 분리되거나, 혹은 북부까지 후송에게 빼앗긴다 쳐도 응우옌 왕조의 근거지인 중부에 남아 세를 이어나가며 후대를 기약할 수도 있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덕제의 잘못된 판단이 겹쳐 단순히 대남이 3분할당하는 걸 넘어 응우옌 왕조는 왕조의 근본이었던 후에를 잃고 남부의 남월로 추방되었고, 대한 직할령인 된 산번과 점파공부(참파)이 떨어져 나갔으며, 원 간섭기 시대의 고려처럼 다른 번국들 이상의 강력한 간섭을 받게 되었으니 잘못된 외교적 판단으로 응우옌 왕조를 몰락시킨 응우옌 왕조 최악의 암군이다.

아우 완복홍항의 술회에 따르면 왕자 시절까지만 해도 노름과 주색잡기에 빠져 사는 형 완복홍보와 반대로 효심 깊고 공부에 전념해 평판에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후궁들에게도 예를 갖추고, 형 완복홍보를 제외한 다른 이복형제들에게는 우애가 깊었다고. 그를 무척 싫어하는 북부 출신 고백적 역시 사람은 무척 좋았다고 회상한 걸 보면 자기 가족과 유학자인 사대부들을 대하는 태도는 괜찮았던 게 확실하다.

하지만 정학이라며 성리학, 그것도 안남식 성리학만 맹목적으로 파고들며 다른 학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세상을 보는 눈이 극도로 좁아졌고 제위에 올라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지자 행실마저 더러워지며 현실을 안 보고 망상과 아집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었다. 성리학 원리주의 성향에 엽색 행각, 입으로는 성현의 가르침을 주워 섬기지만 기실 치졸하고 잔인한 성격이란 점에서 2부의 원본 경성군과 판박이다. 이 때문에 재석이 빙의하지 않고 경성군이 계속 재위한 조선의 말로를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이 많다.

이후에 터진 세포이의 난 때에는 반란을 일으킨 세포이들이 대한 불교도들을 학살하면서 대한의 분노를 산 사태를 두고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북태평양을 통째로 지배할 만큼 강하면서도 주변국들에 관대한, 정말로 신뢰할 만한 상대였는데 그런 상대를 건드린 거다"라고 평하는 등 작중 대한은 굉장히 신용도가 높으면서 관대한 나라라는 평을 듣는데, 대체 완씨네는 교육을 어떻게 하길래 무굴 황제도 아는 걸 완씨네는 몰라서 제 명을 재촉한 거냐고 더 까였다.

4. 기타

문인을 자처하여 종종 측근들을 데리고 시를 지었는데 문학적 소양은 없었는지 사덕제가 지은 시를 정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고백적은 시가 아주 형편없었다며 진저리를 친다. 건륭제도 시 짓기를 좋아한 것과 별개로 건륭제가 지은 시의 평은 영 좋지않았으며 수집한 서화에다 자기 도장을 마구 찍어 테러리스트라고 학계에서 욕먹는 것을 생각한다면 참 유사하다.


[1] 그렇다고 쯔꾸옥응으을 채용한 것도 아니고, 천주교 박해 때문에 이쪽은 국문보다 더 심하게 박해받았는데, 한자와 쯔놈은 일반 백성이 배우기엔 너무 난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색이 유학자면서 문맹 퇴치나 교육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2] 사실 홍삼을 이 지경으로 과용하면 간부터 작살나기 시작해 몸이 다 망가진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다 천연두에 걸리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라 버티고 있는 듯. [3]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생각 없이 저질러 놓고 갖다 붙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정사에 복귀하고 나서 본인이 벌인 기행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는 했으며, 왜 그런 기행을 벌인 거냐는 이복동생 완복홍의의 질문에 본인은 의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고자라는 소문을 확실하게 반박하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조작이 어렵도록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성행위 장면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적장자가 없는 국왕에게 성기능 이상이 왔다는 소문은 작게는 체면 손상에서부터 크게는 후계구도에 대한 불안감까지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공개 성행위로 이미 깎인 체면을 좀 더 깎는 대신 후계구도 불안정성에 대한 의심을 말소하려는 의도였다면 나름대로 참작은 가능하다. [4] 심지어 한황에게 받아먹은 홍삼탕을 돌려주겠다며 자기가 싼 똥을 상자에 담아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모두가 그것만은 안 된다며 만류하여 이뤄지지는 않았다. [5] 그의 가솔들 일부가 달아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완복시 일행의 행방을 대한군에 토설하는 일을 막으려면 살려서 인질로 두는 게 맞았다. [6] 이를 위해 후송과 협상하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여동생들을 전부 후송 황제에게 후궁으로 바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막장스런 생각까지 한다. [7] 20세기 초까지는 신분이 인종보다도 위였다. 아무리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라도 일국의 군주가 외세의 침략으로 살해당한다면 해당국가는 이를 계기로 침략한 외세에게 반발하고 저항하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원 역사의 구한말 의병들처럼 성리학 이념을 배우고 반골 기질까지 남다른 안남은 더하면 더했지 다른 나라들 못지 않게 저항할 것이다. 여기에 원 역사의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전투에선 승리했으나 민사작전에 실패해 결과적으로 물러난 사례들을 알고 있는 재석은 완복시를 당장 죽이는 것보단 적국에서 안락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근왕주의자들이 저항 의지를 잃고 내부에서 극심한 분열이 일어나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기에 살려두기로 한 것. [8] 3부의 유구국이 실제로 이랬다. 작중의 유구국은 대남국과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국가 체급 때문에 3부 무렵부는 거의 대한의 번국이나 마찬가지인 보호국 신세였지만, 칭신만은 면하게 해 달라며 대한 측에게 싹싹 빌다시피 하며 대한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보답품도 받지 않는 선조공을 바치는 등 명목상의 독립 타이틀을 빼면 대한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성의는 다 보였다. 때문에 재석을 비롯한 대한의 태황들은 유구가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계속해서 인정해 줬고 심지어 그 작은 국가 체급으로 칭제건원을 선언하는 돌발 행보에도, 칭제 선언을 한 유구 황제 상익은 그 시점의 태황이던 3부의 재석에게 유구가 명목상의 독립국 지위와는 별개로 앞으로도 계속 대한의 실질적인 번국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등 대한의 비위를 잘 맞췄으며, 그 후 손님 자격으로 한-건주 동맹의 결속을 선언하는 행사인 심양회맹에 참석한 상익이 회담 후 귀국길에 폐렴으로 급사하는 돌발 사태가 터지자 이로 인해 생긴 대한 측의 죄책감으로 인한 배려 및 대한-일본간의 외교적 안정을 위해 유구를 공식적으로 번국으로 편입하기 힘들었던 대한 측의 외교적 입장이 맞물린 점 덕분에 명목상의 황제국 지위를 100여년 넘게 유지하는 행보를 보일 수 있었다. 물론 명목상의 대접과는 별개로 주변 동북아 강국들에게 유구 정도의 나라가 뭔 황제국이냐는 비웃음을 사긴 했고, 결국 4부 시점에서는 대한의 광덕제가 일본과 체결한 밀약을 통해 독립국 자리를 공식적으로 박탈당하고 정식으로 대한의 번국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대한에게 조공 면제 등의 혜택을 받는 등 원역사의 유구나 작중의 대남국의 행보보다는 훨씬 국가의 운명이 잘 풀린 편이었다. [9] 2부에서 일본은 규슈를 빼앗겼지만 2~3부 사이 경신대기근을 틈타 규슈 중부와 남부는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해 대한도 이를 용인했다. 즉 응우옌 왕조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