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01:50:57

사광욱

파일:중앙선거관리위원회 휘장.svg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선거심사위원회 위원장 (1948)
초대
김용무
선거위원회 위원장 (1948~1960)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1960~1963)
초대
노진설
제2대
조용순
제3대
김두일
제4대
고재호
제5대
이갑성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63~현재)
초대
사광욱
제2-4대
주재황
제5대
김중서
제6대
강우영
제7대
윤일영
제8대
이회창
제9대
윤관
제10대
김석수
제11대
최종영
제12대
이용훈
제13대
유지담
제14대
손지열
제15대
고현철
제16대
양승태
제17대
김능환
제18대
이인복
제19대
김용덕
제20대
권순일
제21대
노정희
제22대
노태악
}}}}}}}}}
파일:사광욱.jpg
<colcolor=#fff><colbgcolor=#e59f00> 출생 1909년 10월 7일
평안북도 철산군
사망 1983년 1월 2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묘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선영
본관 경주 사씨[2]
재임기간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63년 1월 19일 ~ 1968년 1월 19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59f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사병철
형제자매 형 사경욱(史敬郁)[3]
자녀 슬하 2남 4녀
학력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
경력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 서기과 통역생·서기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평양지방법원 사법관 시보
서울지법 부장판사
대법관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2. 생애

1909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사병철(史秉哲)[4]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33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제11회로 졸업했다. # 졸업 직후인 1934년부터 약 1년 간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판임관으로 견습생활을 하였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 서기과 서기 및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다. 1938년 8월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5] #,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직후에 史村光郁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부터 1년 간 평양지방법원 사법관시보로 근무하였으며 이후 1943년부터 판사로 재직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었고, 1950년 국회프락치 사건의 주심판사로 피고인 김약수 등에게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1952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및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59년부터 대법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국학대학 강사로 잠시 활동하다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으며 1971년 국가배상법 제2조 1항과 법원조직법 제59조 1항의 위헌 의견에 찬성했고, 이 판결을 계기로 대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83년 1월 2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

3. 기타

일제 말기에 판사로 근무한 이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되었다.


[1] 일본식 이름은 史村光郁(시무라 미쓰후미). [2] # [3] 1931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 1932년부터 1934년까지 함흥지방법원 서기과에서 판임관으로 견습생활을 했으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전라북도 산업부 산업과에서 속(屬)으로 근무했다. #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부산지방법원 사법관시보로 견습생활을 하다가, 1943년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군산지방법원 검사국, 전주지방법원 검사국 등지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 8.15 광복 후에는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전라북도 산림연합회 이사, 전라북도 인사위원, 전북대학교 법학과 강사, 대한적십자사 전라북도지사장 등을 역임했다. # [4] 구한말인 1908년 대한협회 철산지회 회원 #, 1909년 대한협회 철산지회 평의원 # 등으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1915년 12월 15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목회자가 되어 활동하였고 #, 1918년부터 도량형기 판매에 종사했으며 # 1922년 3월 20일에는 철산군 부서면 선리동 수운도 강난기(姜蘭基)의 어장을 대여받아 1925년 3월 19일까지 운영했다. # 또한 1922년 4월 12일 철산금융조합 감사에 선임되었다. # 1936년 4월 6일 동아일보사 철산지국 고문에 임명되었다. # [5]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윤길중도 이때 함께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