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婦好상나라 21대 왕 무정의 왕비 중 한 명. 시호는 모신.
2. 생애
사기에는 기록이 없지만, 부호에 대한 갑골문만 해도 수백 점에 이를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각종 희생제례, 제의를 집전하는 여 제사장이었다.여장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갑골문에 의하면 이민족 등에 의해 수도권 2곳이 피해를 입자 1만 3000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귀방(鬼方)과 토방(土方), 강방(羌方), 파방(巴方) 등 주변국들을 정벌하는데 성공했다.[1][2]
하지만 무리했는지 몸이 망가지고 출산을 마친 후에 여러 지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기원전 1200년에 사망했다. 왕 무정이 무척 아낀 모양인지 쾌차를 바라는 제사까지 지낼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결국 부호가 사망하자 곡제를 지내며 슬퍼했다고 한다.
3. 무덤
부호가 널리 알려진 계기는 상나라 수도 은허에서 발굴된 부호릉 때문인데,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내부에서 온갖 귀중한 유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호릉은 현재까진 유일하게 온전하게 보존된 상나라 왕릉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뒤에 은허에 있던 상나라 역대 왕릉 구역을 철저하게 훼손하여 없애버렸는데, 부호의 능은 상나라의 왕릉 구역에 위치하지 않았고, 부호의 친정 가문의 묘역에 위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부호릉에선 개 6마리, 순장된 16명의 유골들, 청동기 440여 기, 옥세공품 6백여 기, 석기류, 골각기와 더불어 화폐로 쓰인 듯 보이는 조개 껍데기 4400여 개가 출토되었다. 부호릉에서 발견된 청동 기물의 명문과 함께 발견된 다양한 화폐, 옥, 무기, 기타 부장품들을 볼 때 부호는 여성이면서도 당시 큰 사회, 군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무정 시기의 상나라 갑골문에도 부호가 제후를 접견하고 주변국을 정벌하는 등의 내용이 나와 있어, 이러한 면모가 교차 검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