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출처2017년 별 수호자 스킨 발매와 동시에 공개된 별 수호자 세계관 관련 단편 소설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스킨 세계관 및 별 수호자 문서 참고 바람.
2. 시작하는 이야기: 꿈
요즘 계속 꾸는 꿈이 있다. 처음은 칠흑같이 새까만 어둠에서 시작한다. 너무 깜깜해서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건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한밤중에 잠에서 깼는데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변의 익숙한 빛은 한 점 남김없이 사라졌다. 마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것처럼. 남은 것은 나와, 텅 빈 밤뿐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손을 뻗어본다. 이 암흑이 그저 정전 때문이기를 바라면서. 마치 이 묵직한 어둠이 두꺼운 담요를 여러 장 덮어쓴 것처럼, 팔을 내저으면 떨쳐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우물 속을 헤엄치듯 한밤의 암흑을 해치며 걸어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 아득한 공간 속에 나 혼자뿐이라는 암담한 고독이 시리도록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등을 타고 내려간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여기서는 솟아올라 뚫고 나갈 표면이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이 죄어온다. 공포가 점점 커지고, 숨을 쉬기도 어렵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갑자기 누군가가, 어쩌면 무엇인가가, 암흑의 밑바닥에 자리한 배수구 뚜껑을 뽑아버린 것 같다. 나는 먹물처럼 새까만 암흑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빨려내려 간다. 입을 열어 소리치려, 고함을 지르려 하지만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침묵뿐이다. 입안이 무(無)로 가득 찬 채, 나는 무엇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그리고 터질 듯이 빠르게 쿵쿵거린다. 마침내 포기할 즈음,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그들이 느껴진다. 잔나. 룰루. 뽀삐. 징크스. 그들의 빛이 느껴진다. 따스함, 즐거움, 아늑함, 웃음소리가 한데 뭉친 듯하다. 어찌나 단단히 뭉쳤는지 불이 안 붙을 수가 없다. 눈이 떠진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야 내 눈으로 그들을 볼 수 있다. 다들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에 더없이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암흑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양팔을 한껏 뻗어 보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그때서야 나는 우리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세계의 지평선이 거대하고 푸른 기세로 우리를 맞으러 달려든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위험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내 자매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발아래 행성이 보인다. 행성의 대기는 뜨겁다 못해 타오르고 있고, 그 빛은 불길이 되어 너울거린다. 양팔이 뼛속까지 아파온다. 그래도 한껏 뻗어 자매들을 잡으려 해보지만, 그들은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질 뿐이다. 내게는 그들을 붙잡을 만한 힘이 없다. 나는 그들에게 부족한 존재다. 내 손가락 끝에 불이 붙더니 떨어져 나간다. 내 눈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들의 휘장이 컴컴해지고, 그들의 빛이 산산이 부서지더니 잉걸불이 되어 비산하는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 이불은 온몸에 둘둘 감긴 채 땀에 흠뻑 젖어 있다. 어둠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흐릿한 회색이 채우고 있다. 나는 자기 전에 창문 하나를 열어 두었다. 창가로 다가가 거리를 내려다본다. 은은한 도시의 불빛이 나와 내 방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모두가 잠든 이 고요함. 하지만 그 위에 암흑이 깃들어 있다.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암흑이 계속해서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것을. 도시에서는 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밤하늘에 바늘 끝으로 찌른 듯 작디작은 빛의 점 몇 개뿐이다. 하지만 나는 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 저기 어딘가에. 나는 기다시피 침대로 돌아와 여명을 기다린다. 잠이 들지는 않는다. 잠을 잘 수가 없다. 그 꿈은 똑같으니까. 항상 똑같으니까. |
3. 제1장: 별 수호자 회의
“우리하고 같이 갈 거야?” 징크스는 뒷마당에 내놓은 플라스틱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시로와 쿠로는 그 발치 풀밭에서 낮잠을 즐기는 중이었다. 징크스가 내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엄청나게 큰 선글라스가 눈과 눈썹 대부분을 덮고, 왼쪽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쪽 이어폰은 뒤로 젖힌 의자 등으로 내려와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내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올 거지? 슬슬 시작해야 해.” 징크스는 형광색 껌을 입에 집어넣고는 요란스레 씹었다. 이로 딱딱 소리를 내면서 한참을 씹더니 커다란 분홍색 풍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껌 풍선이 선글라스를 가릴 정도로 커지자, 딱 소리와 함께 풍선을 꺼뜨리고는 다시 입안에 넣었다. “여름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럭스.” 징크스가 눈길도 주지 않으며 말하더니, 양팔로 머리 뒤를 받쳤다. 하늘을 떠다니는 깃털 같은 구름이 선글라스 렌즈에 비쳤다. “여름이 가기 전에 실컷 즐기는 게 좋을걸.” 징크스는 기다랗게 늘어뜨린 빨강색 갈래머리 끝을 손가락에 감아 빙글빙글 돌렸다. 자기가 안에 들어갈 만큼 의미 있는 일이 뭐냐고,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태도였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대꾸했다. 징크스는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 우리가 얘기를 좀…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개학하기 전에 말이야.” 징크스는 입술을 모으더니 야유하는 소리를 냈다. 쳇. 학교 얘기는 안 했어야 했나. 확실히 실수야. 징크스가 흥미를 잃었어. 나는 전략을 바꾸었다. “음… 뽀삐가 가져온 아이스바 안 먹을 거야?” 징크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긴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발치에서 쿠로가 화들짝 깨어나더니 하품을 하고는 아직 자고 있는 시로 위로 짓궂게 타고 넘었다. 징크스는 무지막지하게 큰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렸다. 마치 갈래머리에서 거대한 플라스틱 별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이스바?” “음.” 나는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모양이 로켓처럼 생겼더라.” 나는 미닫이 유리문을 등 뒤에서 닫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5초 뒤 미닫이문이 다시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별들이시여 감사합니다. 징크스는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단 것 얘기가 나오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그 행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참, 탄약 얘기가 나와도 그렇지만. 하지만 내 마음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주방에 들어서니 뽀삐가 레인지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서서 번철에 올린 팬케이크를 뒤집고 있었다. 팔꿈치 각도와 큼직한 금속 뒤집개를 꽉 틀어쥔 손에서 단호한 결심과 집중력이 엿보였다. 주방 바닥에 팬케이크 반죽과 끈적끈적한 시럽을 잔뜩 흘린 자국이 냉장고에서 싱크대로, 싱크대에서 뽀삐에게로 이어졌다. “뽀삐, 이게 뭐야? 내가 나간 지 5분도 안 됐잖아?” 내가 말하는데 징크스가 나를 팔꿈치로 밀치고 주방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냉장고로 돌진했다. “룰루가 배고프다고 했어.” 뽀삐는 툭 던지듯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다시 얇은 팬케이크를 뒤집는 일에 열중했다. “나 팬케이크 만들었어.” 룰루는 주방 식탁에 앉아 한 손으로는 뭔가를 열심히 그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팬케이크를 한 주먹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주변에서 펼쳐지는 난장판은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요정 픽스는 뚜껑이 없는 녹색 마커펜을 물어뜯고 있었다. 룰루는 그리고 있는 그림에서 눈길도 들지 않고 픽스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잘하는데, 꼬맹이.” 징크스는 뽀삐의 등을 탁 치고는 식탁 의자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그러는 동안 로켓 모양의 아이스바를 쪽쪽 빠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로켓 모양으로 하나 만들어 줘. 아냐, 잠깐. 미사일 모양으로 만들어 줘. 아냐 아냐, 별 미사일 모양이 더 좋아. 무지개 토핑이 있어야겠는데!”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아.” 뽀삐가 번철에 대고 투덜거렸다. 아수라장이다. 그것도 이런 아수라장이 없다. 팬케이크 반죽이 천장에도 묻어 있다. 이렇게 한 집에 모여 있기만 해도 이 모양인데, 대체 우리가 무슨 재주로 우주를 구한다는 말인가? 잔나는 뽀삐가 쌓아놓은 엄청난 설거짓거리를 말없이 씻고 있었다. 서풍은 그녀 옆 싱크대에 올라앉아 발에 묻은 시럽을 핥으려 애쓰고 있었다. “다들 있잖아…” 나는 주방에 약간 남은 깨끗한 공간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내년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학교가 곧 개학할 거고…” “룰루, 뭘 그리고 있는 거야?” 징크스가 룰루의 어깨너머로 몸을 숙이고는 포크로 룰루의 팬케이크를 찍으려 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게 질색인 나머지 룰루에게 관심 있는 척이라도 해서 이 주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이건 별이 떨어지는 거야.” 이번에는 룰루가 내 말을 막았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않은 눈치였다. “새로운 별들이 나타나고 있어.” 룰루는 눈길을 들지도 않고 전단지 하나를 식탁에서 징크스 쪽으로 밀었다. 징크스가 전단지 쪽으로 슬쩍 몸을 내밀자, 그녀가 집어 올린 팬케이크에서 생크림과 토핑이 전단지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징크스는 히죽 웃더니 전단지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쪽에서 보니 전단지에는 그림은 하나뿐이고 단어는 10개가 넘었다. 그러니 징크스가 아무 관심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서성거리던 발걸음을 룰루 등 뒤에서 멈췄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우리의 꼬맹이 화가께서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널찍한 평지 주변을 나무 몇 그루가 둘러싸고 있었고, 우리 다섯이 가운데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이었다. 잔나는 키가 크고 보랏빛으로 그려졌고, 뽀삐는 망치를 들었으며, 징크스는 길고 빨간 갈래머리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둥그스름한 분홍색 형체가 나인 듯했다. 내 머리가 진짜 저렇게 양쪽으로 삐죽삐죽 나와 있단 말야? “이건 너야?” 나는 초록색과 검은색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목초지를 배경으로 초록색 머리카락을 한 형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룰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고는 어두운 청색 하늘에 열심히 음영을 넣었다. 연필로 그린 별들은 좀더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것들은 뭔데?” 징크스가 색색의 조그만 조각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히 새로운 별들이지.” 룰루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갈 거지?” “여기 새로운 별들이 더 있어.” 뽀삐가 팬케이크를 하나 더 뒤집으며 말했다. 싱크대에서 와장창 소리가 났다. 잔나가 접시 하나를 놓친 것이었다. “아, 미안.” 그녀는 접시를 집어올리며 더듬거렸다. 나는 잔나 쪽으로 걸어가 그 옆에 섰다. 주방 창 너머로 구름 몇 줄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널찍하고 텅 빈 여름 하늘이었다. 잔나는 아까 떨어뜨렸던 접시의 가장자리를 수세미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닦고 있었다. “용케 안 깼네.” 나는 잔나에게 행주를 건네며 말했다. “미끄러운 건 쥐고 있기 진짜 힘들지.” 잔나는 나를 흘긋 보고는 다시 닦고 있는 접시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태도였지만, 뺨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뭔가 있다. 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해진 접시를 식기 건조대에 놓았다. 라벤더 빛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는, 싱크대에서 시럽이 잔뜩 묻은 접시를 또 하나 집어들었다. 그래. 분명히 뭔가 있어. 징크스는 늘 그렇듯 주변 분위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팬케이크를 겹겹이 쌓아 시럽에 적시는 중이었다. 팬케이크 사이사이에는 생크림과 토핑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난 원래 저 파랑 머리 꼬맹이 말에 찬성하는 건 질색이지만 말야.” 징크스는 포크에 한가득 찍은 팬케이크를 입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은하계의 나쁜 것들이 난리를 치면 우리 말곤 막아낼 사람이 없잖아?” 룰루는 펜을 내려놓고 전단지를 집어들어 내게 건넸다. 나는 키친 타월로 징크스가 떨어뜨렸던 생크림과 토핑을 전단지에서 닦아냈다. 종이 윗부분에 무지갯빛 자국이 길게 남았다. “ 타곤 캠프의 여름 별똥별 이벤트!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여름 밤하늘을 수놓는 유성의 향연을 관찰하고, 새로운 별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각종 즐거운 놀이와 게임도 준비되어 있어요. 여름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나는 큰 소리로 읽었다. “대학 천문학과에서 주관하는 이벤트로, 이 지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룰루는 다시 그림에 열중했고, 뽀삐와 징크스는 접시에 팬케이크를 자꾸자꾸 쌓아올리고 있었다. 누가 더 많이 먹나 경쟁할 작정인 듯했다. 주방 창문에 비치는 잔나의 얼굴은 다시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종이가 손 안에서 구겨지며 버스럭거렸다. 나는 손에서 힘을 뺐다. 그렇게 종이를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캠프 등록 마감일은 바로 오늘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나는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단원들을 바라보니 저마다 딴짓에 열중하고 있다. 여기 가자고 하면 안 좋아하겠지. 하지만 나는 단장이다. 얘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야. “우리한테도 좋을 거야.” 나는 내 결심을 확인하듯 말했다. “숙녀 여러분, 가방을 챙기시죠.” 나는 큰 소리로 말하며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쾌활함이 넘치는 자신감은 나 자신에게뿐 아니라 저들에게도 꽤 먹혀들어갔다. 단원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전단지에 적힌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별들을 환영하러 가야지.” |
4. 제2장: 타곤 캠프
징크스는 느긋하게 버스에서 내리며 챙이 늘어진 햇빛 차단용 모자를 눌러썼다. 버스를 타기 전부터 수영복을 입고 갈 거라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밉살스러울 정도로 야단스러운 색깔의 비키니 위에 그 못지않게 야단스러운 색깔의 얇은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미풍이 불어오자 가운 자락이 휘날렸다. “한심한 녀석들.” 징크스는 한숨을 쉬었다. “난 웅덩이를 찾아볼 거야. 대포알처럼 물에 풍덩 풍덩 뛰어들기 딱 좋은 날이잖아.” “웅덩이 아니고 호수.” 뽀삐가 정정했다. 그녀의 눈은 버스 기사가 우리 짐을 내리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그거지 뭐, 꼬맹아.” 징크스는 산더미처럼 쌓인 짐 꼭대기에서 자기 가방을 찾아 들었다. 무지막지하게 큰 총과 별이 잔뜩 그려진 가방이었다. 룰루 옆을 지나가며 그녀는 청록색 큼지막한 나비넥타이를 룰루의 머리에 얹었다. “다들 나중에 보자고.” 나는 뽀삐를 보았다. “쟤 설마 진짜 대포를 가져온 건 아니겠지?” 뽀삐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가져왔으면 자기 입으로 떠벌렸겠지. 쟤를 몰라?” 나는 징크스를 불러세우고 일행과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돌아보았다. 버스 기사가 짐칸에서 마지막 가방을 꺼내는 중이었다. 힘이 드는지 양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파란색 원통형 가방이었는데, 크기가 거의 뽀삐만 했다. 뽀삐는 버스 기사를 주시하며, 마른 풀 속에 묻힌 한 발로 초조하게 땅을 또닥거리고 있었다. 버스 기사는 끙끙거리며 원통형 가방을 땅에 내려놓았다. “얘야,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었니? 바위라도 넣었어?” “아뇨.” 뽀삐는 다가가서 가방 손잡이를 낚아채고는 반 바퀴 휙 둘러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주 가벼운 동작이었다. 그러고는 기사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럽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망치요.” 뽀삐는 나를 향해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버스를 타기 전에 모두에게 신신당부했는데. 우리가 이 캠프에 온 건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잘 지내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보통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뽀삐는 징크스가 잊어버리고 간 바퀴 달린 가방 손잡이를 쥐고 룰루를 툭 쳤다. “룰루, 빨리 가자. 야영할 준비를 해야지.” 신난다는 말투였다. 룰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만 아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뽀삐가 야영장으로 간다는 목표 하나만을 수행하며 길을 걷는 동안, 룰루는 들꽃이며 솔방울이며 조약돌에 이르기까지 야영지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이란 보물은 죄다 살펴보며 놀라워했다. 버스는 후진해서 도로에 올라섰다. 나는 바위와 나무 너머로 버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당장은 다시 오지 않겠지, 잔나?” 하지만 내 귀에는 소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버스에서 맨 마지막에 내린 사람들도 이미 야영장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지 오래였다. 버스가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잔나?”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마침내 잔나를 찾았다. 잔나는 둥그스름하고 흙먼지가 잔뜩 쌓인 화강암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양손으로 양팔을 감쌌고, 라벤더 빛깔 머리카락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풍에 곱슬곱슬 날리고 있었다. “잔나?” 나는 백팩을 풀더미에 내려놓고 바위를 올라가 잔나 옆에 섰다. 우리 발 아래는 야트막한 계곡이었고, 다른 야영객과 팀들이 야영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루나리 호수의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다. 징크스는 이미 저기 가 있겠지. 지금쯤 저 호숫물은 눈이 녹은 것이기에 얼음처럼 차디차다는 걸 깨달았을까? 이 생각이 떠오르자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잔나는 그 어느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잔나는 키가 아주 컸다. 나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햇빛을 가리고는 고개를 들어 몇 분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나가 무엇을 보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언제나처럼 쨍할 정도로 파란 여름 하늘이었다. 타곤 산의 험준한 봉우리와 하얀 구름 몇 점을 빼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자세를 바꾸는데 팔꿈치가 잔나의 팔을 건드렸다. 잔나가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 럭스.” 잔나는 내가 지금까지 5분 동안이나 바로 옆에 서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잔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잔나가 마음을 괴롭히는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잔나는 버스가 우리를 내려놓았던 장소를 돌아보았다. “다들 어디 갔어?” “세상에.”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아예 다른 세상에 가 있었구나?” 나는 짙은 색 솔잎 때문에 보랏빛을 띤 회색처럼 보이는 타곤 산의 윤곽선을 눈으로 훑었다. 지금은 여름 끝자락인데도 꼭대기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잔나는 양손으로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쓸면서, 갑자기 추워졌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추운 건 고사하고 시원하지조차 않은 날씨였다. 하늘은 맑고 머리 위 햇살은 따가웠다. 처음으로 징크스가 조언한 대로 수영복과 반바지를 입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캠프 등록증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이제 가자.” 잔나가 길쭉한 다리를 움직여 바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사뿐한 동작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바위에서 내려섰고, 잔나는 고개를 돌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시 하늘을 본 후에는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폭풍이 오고 있어.” “뭐?” 나는 놀라서 하늘을 다시 보려 하다가 자갈이 모인 곳에서 한 발이 미끄러졌다. 항상 이렇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생긴다. 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쪽 다리 뒤쪽이 바위에 그대로 긁혔다. “아우.” 나는 따가운 통증 때문에 움찔했다. 어쩌면 만사가 이렇게 척척 들어맞을까. 룰루, 뽀삐, 징크스는 야영지 곳곳으로 흩어져 버렸고, 잔나는 아예 다른 행성에 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수장이라는 작자는 발을 헛디디기나 하고 있다. “죽여주는데.” 나는 얼굴을 문지르던 손에 대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땀에 젖어 목 뒤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드니 잔나가 치유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아냐, 괜찮아.”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얘기했지? 여기선 우리 능력을 쓰면 안 돼.” 잔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좀 더 조심해야지. 우리한테 단장은 한 명뿐인데.” 잔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머릿속에서 온갖 의심이 좌충우돌하며 내는 소리를 다 듣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고, 잔나는 야영지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서두르자.” 잔나가 어깨너머로 말했다. “너 없으면 우린 모두 길 잃은 어린애에 불과해.” 나는 내내 참아왔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두려운 거야.’ |
5. 제3장: 잘나신 아이들
캠프 안내 탁자 주위에는 어두운 보랏빛 천이 둘러져 있었다. 탁자에 쌓인 여러 가지 전단지 뭉치는 돌과 큼직한 솔방울로 눌러 놓았다. 탁자 너머에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아니, 소녀는 아니었다. 고등학생이라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였고 여름 캠프의 먼지투성이 탁자에 앉은 사람치고는 너무 ‘쿨’한 인상이었다. 그럼 이 캠프를 후원한다는 대학 천문학과 학생인가 보지. 내가 그 여자 쪽으로 다가가는데 뒤에서 잔나가 걸어오다 우뚝 멈추는 기색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별로 유쾌한 상황이 못 될 거라는 징조처럼 느껴졌다. 나는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우뚝 솟은 소나무 사이사이로 찔러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 때문에 어느 쪽에 서도 눈이 부셨다. 빛과 그늘의 대비가 너무 심해서 탁자 너머의 여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늘에서 나와 주기는커녕 내가 앞이 잘 보이는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여자가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 쪽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이름.” 환대와는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게다가 여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 발짝 왼쪽에 있었다. “럭스예요.” 나는 약간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니, 럭산나예요. 우리 팀 이름은…” “흠… ‘별의 자매들’이라.” 여자가 내 말을 가로챘다. 목소리에는 못마땅해하며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주… 귀여운 이름이네. 두 사람, 제일 늦게 온 거 알아? 리더는 대개 제일 먼저 와서 등록증을 제출하는데.” 그녀는 자기 말을 강조하듯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햇빛의 각도가 조금 바뀌었는지 드디어 우리의 깐깐하신 대학생 심판님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렸던 적이 훨씬 더 나았다. 여자는 뭔가 역겨운 걸 방금 삼켰지만 그나마 예의상 대놓고 뱉지는 않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목에 건 명찰에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글씨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신드라.’ “죄송해요.” 나는 좀 더 자신감 있는 말투로 말하려고 애를 썼다. 상대가 누구든 성실한 말투를 써야 해. “우리 팀 짐이 버스에서 다 내려졌는지 확인하느라 늦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야영장에 온다고 너무 신나서 말이죠.” 잔나가 나를 지지하듯 손끝으로 내 팔을 살짝 눌렀다. 나는 잔나를 돌아보았다. 평소 늘 차분하던 그녀가 탁자 너머의 여자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잠시 멍해 있다가 간신히 여자와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튼 다 왔습니다.” 잔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아.” 신드라가 말했다. 하지만 어투는 내용과 정반대였다. “2016번 자리야. 일행 중에 벌써 거기 가 있는 사람이 있네. 호수에도 시끄러운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아무래도 그쪽 일행인 것 같단 말야.” 징크스… 죽여주는군. 신드라는 탁자에서 색깔 있는 종이를 몇 장 집어 들었다. 징크스가 호수에서 노는 것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하나 생각하는데, 신드라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건 팀 리더가 관리를 해야지. 이건 지도하고 일정표야. 유성우는 자정 이후에 보는 게 제일 장관이지.” 신드라는 종이뭉치를 내게 건네면서 최종 평가라도 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평가 점수에 못 미친 게 분명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팀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야 해. 리더로서 그럴 책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네.”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나는 머저리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모두 한 자리에 있도록 할게요. 약속하겠습니다.” 내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다른 쪽 길을 통해 네 명의 일행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야영지 한가운데에서 초신성이 빛나는 듯 쿨한 등장이었다. 야영객들이 인기 연예인이라도 나타난 양 그 네 명의 뒤를 줄줄 따라왔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그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그쪽이 보고 배워야 할 팀이 오는데.” 신드라가 날카롭게 말했다. 나를 비난하는 표정이 서서히 미소로 바뀌더니, 새된 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 별처럼 반짝이는 일행 중에서도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별이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 옆쪽을 완벽하게 감싼 복숭앗빛 단발머리를 쓸어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큰 빨강 머리 소녀, 초록색이 살짝 감도는 박하 빛 머리칼의 조용한 소녀, 그리고 금발에 좀 잘생긴 남자가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그 아리라는 리더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 팀보다 훨씬 잘나고, 마치 자석이 끌어당기듯 추종자를 무수히 거느리는 팀이었다. 팀원 한 명 한 명도 매력이 넘쳤지만, 같이 있는 모습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부럽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신드라.” 아리가 말했다. “이젠 끝났어? 오늘 오후 하이킹에 너만 못 왔잖아.” “늦게 온 사람들 기다리느라고.” 신드라가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아리에게 돌아서며 미소를 짓고 한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럭스야 그쪽은—" “그래.” 아리가 말했다. 시작하지도 않은 대화를 끝낸다는 말투였다. 그러고는 내민 채 허공에 멈춰 있는 내 손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내가 무안해하는 것을 모두에게 확실히 인식시켜 주겠다는 듯. 마침내 손톱 손질을 완벽하게 한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을 슬쩍 건드리며 건성으로 악수를 했다. “나, 맘에 들지?” 아리는 신드라에게 돌아섰다. 나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확실했다. “그래.” 나는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만나서 반가웠어.” 야영지에 미풍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휙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아까 왔던 방향으로, 아니 아무 방향이나 좋다. 이 탁자 쪽으로 가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방향이 잔나와 정면 충돌하는 방향이었다. 신드라에게 받아든 전단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지금까지 창피를 당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확인 사살인 거야? 나는 또 한번 엉덩방아를 찧었고, 먼지투성이 풀밭에서 잔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때서야 나는 잔나의 표정을 제대로 보았고, 그 순간 짜증은 확 날아가 버렸다. 아까까지는 그저 찌푸린 표정이었으나, 지금 잔나의 얼굴은 어두웠고 아예 일그러져 있었다. 주변의 미풍이 갑자기 한바탕 돌풍이 되어 몰아쳤다. “나 산책 좀 할게.” 잔나가 말했다. 내게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잔나는 아예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잔나가 이렇게… 뭐랄까, 분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잔나…” 나는 날아다니는 종이를 그러잡는 한편 자꾸 입속으로 들어오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느라 허둥지둥했다. “저 사람들이 우리더러 한데 모여 있으라고 했잖아.” 하지만 늦었다. 잔나는 이미 바람을 몰고 그늘이 드리워진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등 뒤에서 잦아드는 바람 소리를 누르고 신드라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아리가 뭔가 재미있는 말을 했기 때문에 웃는 것이기를 바랐지만, 조심스레 돌아보니 신드라는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나는 몸을 돌리고 종이를 모으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흩어져 버린 종이를 따라가다 보니 저 잘나신 팀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
6. 제4장: 지도가 왜 필요해?
마지막 한 장 남은 종이는 나무줄기의 푹 패인 곳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종이를 끄집어내는 대신, 솔잎 더미 위에 주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내 앞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지만, 여기가 야영지 어디쯤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몸을 한껏 젖히자 나무껍질에 등이 따끔거렸다. 내가 원하던 캠프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나. 한 팀으로 뭉치기는커녕 한데 모이는 것도 안 되다니.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목 뒤가 뻐근했다. 앞쪽 호숫물에서 반사되는 빛이 약간 흐려졌다.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감정 따윈 집어치워. 나는 간신히 모은 전단지를 뒤적거리며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 했다. “하필 그 멍청한 지도만 없네.” 나는 짜증이 나서 내뱉았다.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팀을 이끄는 리더가 되겠다는 거야?” “맞아, 사실 지도는 과대평가된 면이 많지.” 멀리서 야영객들이 내는 소리를 누르고, 가까이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씨구. 아리의 휘황찬란 수행단의 그 잘생긴 금발 남자애잖아. 나는 얼른 일어서서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그래도 지도가 꼭 필요하다면, 이걸 줄게. 마침 내가 찾았어.” 남자애는 바람에 구겨진 야영장 지도를 건넸다. 우리 팀 위치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고, 신드라의 완벽한 글씨체로 번호가 쓰여 있었다. 남자애가 입 한쪽이 처지게 씩 웃었다. “내가 분실물을 좀 잘 찾는 재주가 있어서. 난 이즈리얼이야. 이즈라고 불러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를 훌쩍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남자애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한테 작업 거는 건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애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밀었다. “고마워.” 나는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남자애의 눈은 소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데도 아주 선연한 파란색이었다. “혹시 우리 팀을 찾는 것도 좀 도와줄래?” 나는 주변의 나무들을 가리켜 보였다. 야영지의 한구석인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나하고 너 빼고는 다 길을 잃었나 봐.” “그거 좋지.” 남자애는 눈까지 내려온 금발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기고는 예의 바른 손동작으로 야영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이름이 럭스라고 했지? ‘빛’이라는 뜻 맞아?”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의미가 뭔지 알면 기절초풍하겠지. “엄마가 책상 스탠드를 아주 좋아하셔서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어.” 내 버릇인, 명랑 쾌활한 말투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징크스가 항상 진절머리난다고 얘기하는 그 말투. 이즈리얼의 얼굴에서 자신만만한 미소가 잠시 사라졌다. 내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다. 이젠 내가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너무 활짝 웃는 건 아닌가? “농담이야.” “스탠드도 괜찮은데 뭐.” 남자애는 안도했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빛은 아니야.” “제일 좋아하는 빛이 있다고?” “그럼. 다들 그렇지 않아?” 이즈리얼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돌아왔다. 우리는 작은 오솔길을 지나 좀 더 넓은 길로 들어선 참이었다. 호숫가에서 시작하여 야영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말해 줄 거야, 아니면 내가 추측해야 해?”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 신세 한탄을 하고 있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캠프에 온 후 처음으로, 아무 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징크스가 나타났다. 짓궂은 미소가 얼굴을 가득 덮었고, 머리카락은 호숫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즈리얼이 나무 그늘에서 나와 걸어오자, 그제야 이즈리얼을 본 징크스의 미소가 약간 굳어졌다. “럭스, 새 친구를 사귄 거야?” 징크스가 내 등을 철썩 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징크스에게 대답하려다가 혀를 씹을 뻔했다. “징크스, 여긴 이즈야.” 기침이 나오는 바람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즈, 여긴 징크스라고 해.” 이즈리얼이 징크스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징크스는 그 손을 덥석 잡고는 단단히 조이더니, 마구잡이로 아래위로 흔들어댔다. 하지만 징크스가 놀랍게도, 이즈리얼은 이 무지막지한 악수를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자 징크스는 이즈리얼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너, 우리 럭스한테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낮은 속삭임이었지만 내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내 얼굴이 내 머리카락보다 더 발갛게 물들었다. “아니… 우린…” 이즈는 말을 더듬었다. “우린 그냥 어떤 빛을 제일 좋아하는지 얘기하고 있었어. 넌… 제일 좋아하는 빛이 있니?” 잘했어, 이즈. 징크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게 하나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거든. “그럼, 당연하지.” 징크스는 힘을 풀고 이즈리얼의 손을 놔주었다. 이즈리얼은 손가락을 폈다 구부렸다 하며 무사한지 확인했다. “정말?” 나는 놀라서 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빛이 있다고?” 징크스는 나를 보았다. “물론이지. 다들 그렇지 않아?” 이즈리얼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돌아왔다. “이즈리얼, 괜찮은 거야?”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또 무슨 일이 생기려나. 아리의 휘황찬란 수행단에서 두 번째로 화려한, 키 큰 빨강 머리 소녀가 저 멀리 야영지 쪽에서부터 이리로 다가왔다. 우리를 보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징크스를 보는 표정이. “괜찮아, 사라.” 이즈리얼이 대답했다. 빨강 머리 소녀가 나와 징크스를 대놓고 무시하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애를 쓰면서. “안녕, 난 럭스야.” 나는 바지에 손을 닦고 악수를 청했다. 빨강 머리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나를 훑었다. 갑자기 해부용 현미경으로 관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불안하고 초조해지자 주체할 수 없이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줄줄 쏟아져나왔다. “어… 음, 만나서 반가워, 사라. 머리 색깔 진짜 쿨한데! 그렇게 예쁜 빨간색이 있을 줄은 몰랐어. 진짜 그 색깔은 정말—" “ 미스 포츈이야.” 여자애가 말을 잘랐다. “사라는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니 나는 그 친구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난 럭스야. 아까 말했던가? 각 팀에 주는 간식을 받으러 왔다가 잠깐 길을 헷갈려서 말이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뒤져 몇 분 전에 봤던 정보를 찾아냈다. “맞아, 팀 간식. 여기 공동 천막에 있는 거네. 초콜릿 칩 쿠키랑… 그리고… 오렌지구나.” “난 오렌지는 질색이야.” 미스 포츈이 차갑게 말하며 이즈리얼을 보았다. “아리가 해 떨어지기 전에 주변을 탐색해 보자는데.” 이즈리얼은 과장된 동작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네, 선장님!” 미스 포츈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야영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징크스는 나를 반대 방향으로 밀었다. “나중에 봐, 럭스.” 이즈리얼이 미스 포츈을 따라가며 말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 뒤에 대고 소리쳤다. “제일 좋아하는 빛이 뭔지 얘기 안 했잖아!” 이즈리얼은 멈춰서더니 눈까지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넘기고는 양손을 입 앞에 동그랗게 모아 쥐었다. “별빛이야!”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졌음에도, 한쪽 입가가 처지는 그 웃음이 선명히 보였다. 그 말만 남기고 이즈리얼은 돌아서서 미스 포츈을 따라 뛰어갔다. “의왼데.” 징크스가 생각에 잠긴 투로 말했다. “미인을 봤을 때 눈앞이 아찔해지는 그 빛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이젠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나는 징크스의 팔을 주먹으로 살짝 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쿠키나 받으러 가자.” |
7. 제5장: 무서운 이야기
징크스와 내가 야영지로 돌아올 때에는 이미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려 하고 있었다. 뽀삐가 장작을 패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징크스는 우리가 왔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쿠키를 또 하나 요란하게 씹어먹었다. “너무 오래 걸렸잖아.” 뽀삐가 투덜거리면서 장작을 또 하나 갈랐다. “으아, 왔구나!” 룰루가 앉아 있던 그루터기에서 펄쩍 뛰어내리더니 나에게 달려와 포옹을 했다. 그래도 우릴 반겨주는 사람이 있긴 하네. “오래 기다렸지?” 징크스가 피크닉 테이블 위에 오렌지가 든 봉지를 던지듯 놓았다. “오렌지랑 쿠키 가져왔어.” 징크스는 봉지를 또 들여다보더니 먹다 남은 마지막 쿠키를 꺼냈다. “정확히 말하면 오렌지랑 쿠키 하나.” 징크스는 쿠키를 둘로 쪼개 반쪽을 룰루에게 주고, 남은 반쪽은 자기가 챙겼다. “자, 됐지? 꼬맹아. 그럼 나 혼자 다 먹은 게 아냐.” 징크스가 말했다. 룰루는 징크스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뽀삐가 끙하는 소리를 냈다. “알았어, 알았다고.” 징크스가 말했다. “네가 나보다 더 또라이니까.” 징크스는 룰루에게 남은 반쪽도 마저 건넸다. “난 뽀삐에게 뭐 주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냥 네가 먹어.” 그러고는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근데, 이런 데선 불같은 거 피우는 거 아냐?” “캠프파이어 말이겠지.”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런 거.” 징크스는 별과 탄약 그림이 잔뜩 그려진 자기 가방에 손을 뻗었다. 가방 안에서 쿠로가 내는 끽끽 소리와 방아쇠가 짤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돼, 안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능력을 쓰는 건 금지야.” “흥 깨는 덴 선수라니까.” 징크스가 눈을 굴렸다. 뽀삐가 도끼를 휘두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잔나는 둥그렇게 장작을 모아놓은 더미로 몸을 숙였다. 마른 소나무 잎에 성냥불을 갖다대자 금방 불이 붙었다. 연기 한 줄기가 가느다랗게 솟아올랐고, 잔나는 잔가지 하나를 찔러넣으며 숨을 살짝 불었다. 불은 가지로 옮겨붙었고, 잔나는 불붙은 가지를 장작더미 중간에 끼워 넣고 징크스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건 속임수가 아니란 말이야?” 징크스는 빈 쿠키 봉지를 테이블에 놓으며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작대기를 찾기 시작했다. “아님 됐고. 우리 마시멜로 갖고 왔지?” 뽀삐가 일정한 크기로 깔끔하게 자른 통나무를 잔나 옆에 쌓아 올렸다. “네가 갖고 온 게 마시멜로밖에 없잖아?” “아아아아 맞아.” 징크스는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 아까 아무데나 떨구었던 자기 가방을 다시 찾아 그 안에서 마시멜로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작대기에 마시멜로 네 개를 끼웠다. “꼬맹이, 난 수건도 갖고 왔다고. 이래 봬도 책임감이 있다니까?” 나는 잔나 옆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잔나는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 보였다. “이제 괜찮아?” 내가 묻자, 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까 나아졌어. 진작 이럴 걸 그랬어.” 나는 주변의 나무들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마침 딱 좋은 데로 왔잖아?” 잔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처럼 열의를 담지는 않았다.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룰루가 손에 묻은 쿠키 가루를 털면서 잔나 옆으로 올라왔다. “잔나, 이야기 하나 해줘.” “난 이야기 잘 몰라, 룰루.” “무서운 이야기 어때, 잔나?” 징크스가 거들었다. “넌 나이가 많으니까 무서운 이야기 좀 알고 있을 거 같은데?” 잔나는 징크스를 보며 라벤더 빛 눈썹 하나를 치켜올렸다. “해줘, 응?” 룰루가 졸랐다. 잔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오늘 밤 룰루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래… 옛날 옛적에, 아주 어두운 암흑 속에서 혼자 반짝이던 빛이 하나 있었어.” ”태초의 별이지?” 룰루가 물었다. 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 태초의 별은 혼자였어.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혼자인 게 싫어졌지. 그래서 자신의 별빛을 한껏 끌어올려서 밤하늘에 널리 퍼뜨렸어.” 잔나는 우아한 동작으로 한 손을 들어 우리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무리를 가리켰다. “바로 거기서 우리가 나온 거고.” 룰루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너와 나. 그리고 동물과 나무들도. 심지어 징크스도 그렇지.” 잔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 세상 모두는 저마다 그 빛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어. 아주 강력한 빛이고, 태초의 별은 그 빛을 어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 태초의 별 수호자는 아주 강하고 빛으로 가득 차 있어야만 선택받을 수 있다고 해.” 잔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타오를수록 빨리 타버리는 법이야.”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아냐?” 뽀삐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태초의 별빛 모두를 보호하는 게 우리 의무잖아.” “맞아.” 잔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건 의무 이상의, 우리 운명이야. 그리고 그 일을 함께 하는 게 우리 운명이지. 태초의 별은 알고 있었거든.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우며, 그 일을 혼자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근데 말이야, 혹시 그 운명 어쩌고를 거스른 사람도 있어? 자기 운명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도 있냐고.” 징크스는 마시멜로를 끼운 작대기를 불붙은 통나무 하나에 끼워 넣으며 잉걸불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나는 징크스의 말에 놀랐다. 지금 징크스가 마시멜로 말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별 수호자 중에 그만하면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지. 별빛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거지.” “그거 흥미로운데.” 징크스가 잔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암흑으로 가득 찬 세계로 가버렸다고 해.” 잔나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 같은 자매가 있었어?” 룰루가 물었다. “그럼. 그리고 그녀가 있던 쪽의 은하계는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에겐 자매들이 전부였어. 한동안은 다들 행복했었지. 그녀도 자매들과 행복했었고. 그런데 어느 날, 전투가 벌어졌어. 아주 사악한 존재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덮쳐온 거야. 그녀는 그 싸움에서 자매들을 잃었고, 몹시 슬퍼했어.” “나라도 슬펐을 거야.” 룰루가 훌쩍였다. “나도 그랬을 거야, 룰루.” 잔나는 룰루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까지나 슬퍼하진 않았다고 해. 슬픔 다음엔 분노가 일었고, 결국 그녀는 태초의 별빛에서 등을 돌려버렸어. 소문으로는 그녀가 그 사악한 존재를 따라 그 존재가 왔던 곳으로 갔다고 해. 자신의 운명을 돌이킬 방법을 찾고 싶어서.” 룰루는 몸을 떨며 잔나에게 바싹 다가붙었다. “그 여자 아직 살아 있어?” 뽀삐가 물었다. “모르겠어.” 잔나는 생각에 잠겼다. “살아 있다면 그녀의 빛은 지금쯤 꽤 늙었겠지.” “잔나 너보다도?” 징크스가 놀렸다. “당연한 거 아냐?” 잔나가 받아쳤다. “나보다 더 오래됐겠지.” 룰루는 하품을 했다. “그거 진짜 있었던 이야기야?” “나도 더는 몰라, 룰루.” 잔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사방이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장작이 불에 타는 소리뿐, 밤의 무게가 우리에게 내려앉았다. 나는 침묵을 깨기로 마음먹었다. “자, 유성우는 네 시간쯤 후에 시작될 거야. 그때까지 잠 좀 자두자.” 잔나는 잠에 반쯤 취한 룰루를 일으켜세워 천막 두 개 중 하나로 데려갔다.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데, 뽀삐가 나를 막고는 다른 천막을 가리켰다. “네가 징크스랑 자.” 뽀삐는 잔나의 천막 쪽으로 가며 속삭였다. “쟨 코 곤단 말야.” “다 들려, 못된 꼬맹이.” 징크스가 마시멜로를 입에 한 가득 밀어넣으며 말했다. “이쪽은 내가 맡을 게. 걱정 마.” 잔나가 룰루를 천막 안으로 들여보내며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짓고, 모닥불을 끄기 위해 물이 든 양동이를 가져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너무 많아. 우리 같은 별 수호자보다 별이 더 많겠지. 나 혼자만 외따로 떨어졌다는 느낌이 없으면 참 좋을 텐데. 나는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떨쳐내고, 물을 모닥불에 부었다. 장작이 물에 젖자 치이이익 소리와 함께 연기가 솟았다. 불이 꺼지자 밤하늘 아래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천막 안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징크스는 이미 휘파람 같은 코골이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저쪽 천막에서는 뽀삐가 입술을 쩝쩝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린 같이 있다. 천막 지붕에는 구멍이 네 개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나는 우리 머리 위쪽에 얼마나 많이 별이 있을까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 개까지 세기도 전에 빨려들 듯 잠들었다. |
8. 제6장: 다시 꾸는 꿈
캄캄한 암흑인 것은 같았지만, 이번의 꿈은 소름이 끼친다는 점에서 달랐다. 이전에는 나 혼자 우물 바닥에서 고독에 떨었지만, 이번에는 다 함께 있다. 룰루, 잔나, 징크스, 뽀삐까지. 우리는 모두 암흑 속에서 갈 곳을 잃었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평정을 유지하던 단원들은 결국 공포에 사로잡힌다. 저마다 내는 숨막힌 듯한 목소리가 겹쳐지며,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 나에게 애원한다. 우리 머리 위로, 아주 멀리 위쪽에, 한 줌 정도 되는 별들이 보인다. 별빛은 흔들리듯 깜박였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다. 그 별들 역시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까지 갈 수 없다. 아니,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위쪽에서 벌겋게 단 재가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반짝거린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희미하던 빛이 완전히 꺼져 버린다. 별 수호자 휘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내 몸에서 공기를 다 빼내고도 모자라, 나를 더 아래로 내리누른다. 머리 위 별빛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점점 더 멀어져간다. 묵직한 것은 아래 위로 튀며 나를 마구 흔들어댄다. 하지만 내 팔과 다리는 더 무겁게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암흑 속에서 얼어붙은 채 굳어 있다. 갑자기 무거운 것이 더 이상 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아래로 가라앉는다. “소용없어.” 뽀삐의 목소리는 짜증과 체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보여줄게.” 금속이 긁히는 소리와 액체가 철벅이는 소리가 난다. 차가운 물이 온몸에 떨어진다. 나는 훅하고 숨을 들이켠다. 물 속에 빠졌어. 이젠 진짜로, 익사하고 있는 거야. 나는 목소리를 내려 애쓰면서 눈을 깜박인다. 그냥 꿈이었구나. 그게… 내 가슴에 얹힌 묵직한 것은 확실히 뽀삐의 형체를 하고 있다. 징크스는 한 손에 빈 물통을 들고 서서 나와 뽀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우리의 용감무쌍한 단장님께서 드디어 깨어나셨어.” “너네 둘, 꼭 이럴 필요가 있었어?” 나는 눈을 비비면서 한 벌 더 가져온 웃옷으로 침낭을 적신 물을 닦아냈다. “룰루가 없어졌어.” 뽀삐가 얼른 말했다. 나는 천막 밖으로 나와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룰루의 천막 덮개를 열어보니 룰루의 침낭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잔나의 침낭도. “잔나는 내가 만들어 준 지팡이도 안 가져갔어.” 징크스가 덧붙였다. 그 목소리에 진짜로 염려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할망구, 넘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이건 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다. “너 없이는 걔들을 찾으러 갈 수가 없었어.” 뽀삐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 같이 있는 게 우리 의무라고 네가 그랬잖아.” “난 그냥 너한테 물을 한 통 부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 했던 것뿐이야.” 징크스가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투였지만 얼굴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젠 가도 되지?” 뽀삐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잔나의 베개 위에는 룰루가 그린, 우리 다섯이 목초지에 서 있는 그림이 놓여 있었다. 모두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룰루가 그랬지. 새로운 별들이라고. 나는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이 반딧불이들. 우리를 둘러싼 검은색과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것들. 너무나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뽀삐와 징크스를 보았다. 저 둘이 같은 표정을 짓는 게 대체 얼마 만이지. 둘 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늘 밤은 손전등으로는 어림도 없겠어. “뽀삐, 망치를 갖고 가자. 징크스 넌 시로와 쿠로를 깨워. 지금이야말로 화력이 필요해.” |
9. 제7장: 별은 떨어지고
내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은 손전등과 비교도 안 되게 밝았지만, 튀어나올 듯 쿵쿵거리는 심장 고동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한쪽 손에 구겨 쥐고 있던 지도를 폈다. 불행히도 룰루는 아주 구석진 곳을 찾아낸 듯했다. 지금 우리는 야영지 경계선을 한참 지나 있었다. “지도를 보니 이 근처에 공터가 하나 있어.” 내가 말했다. “옆은 절벽이라 다른 쪽에서는 거기로 갈 수 없는 모양이야.” “새로운 별들을 환영하기에 딱 좋은 곳이겠는데.” 징크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언덕을 오르고 있다 해도 좀 지나치게 호흡이 가빴다. “쿠키 좀 작작 먹을걸.” 뽀삐가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자.”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던 나무가 점점 적어지더니, 마침내 탁 트인 목초지가 나왔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징크스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름다운 경치였다. 안개가 낮게 내려와 얇은 누비이불처럼 사방을 덮었다. 들장미와 밤메꽃이 한데 피어 있고, 작고 파란 꽃이 그 위에 활 모양으로 피어나 안개와 섞였다. 하얀 화강암 바위들이 달빛을 반사하여 은색으로 빛났고, 어두운 목초지에 드문드문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밤하늘에 별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위 하늘에서는 유성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목초지에는 빨갛고 하얀 체크무늬 피크닉 돗자리가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틀림없는 우리의 초록머리 꼬맹이 룰루였다. 심지어 옆에는 오렌지도 놓여 있었다. “태초의 별이시여 감사합니다. 쟤 여기 있었구나.” 잔나가 우리 옆, 키 큰 소나무 뒤에서 나왔다. 그녀를 따라 미풍 한 줄기가 일더니 우리 부근의 안개를 잠깐 걷어냈다. 잔나는 야영지의 반대편에서 여기로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드물게도 숨을 약간 헐떡이고 있었다. “럭스!” 룰루가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룰루에게 달려갔다. 어찌나 힘껏 달렸는지 땅이 흔들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멈춰섰지만, 땅은 계속 흔들렸다. 안개 아래에서 초록색을 띤 검은 기운이 은근한 빛을 내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땅에서부터 시커먼 핏줄이 불끈불끈 일어나는 것 같았다. 땅은 이제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맥박이 뛰듯 요동쳤다. “룰루.” 발 아래 바위들이 흔들리며 깊고 깊은 우르릉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내 귀에도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린 혼자가 아니야. 새 별들이 오고 있어, 럭스.” 룰루의 눈에는 평소의 순진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룰루가 내 손을 잡았다. “꿈에서 봤어.” 바로 내 옆에 서 있는데도, 룰루의 목소리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룰루가 아직도 자기 꿈속에 있기라도 한 듯. 징크스, 뽀삐, 잔나가 목초지 가장자리를 둘러쌌다. 내 발밑의 땅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물러나!”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경고는 너무 늦었다. 땅이 쩍쩍 갈라지며 깊은 틈이 드러났다. 안개가 흩어지고, 거의 개만큼이나 큰 시커먼 곤충이 떼를 지어 기어 나왔다. 몸에서 으스스한 초록색 빛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괴물들이었다. 나는 지팡이를 꽉 쥐고 제일 가까운 괴물에 별빛을 쏘았다. 빛은 괴물의 날개 아래쪽에 명중했다. 놈의 몸뚱이가 터지면서 역겹고 끈적끈적한 형광 초록색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세상에. 날개가 달렸어.”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날개 달린 괴물이야! 이것들이 야영지까지 가지 못하게 여기서 막아야 해!” 나는 단원들에게 소리쳤다. “유후우!” 징크스가 지르는 함성이 내 귀에 꽂혔다. “시로랑, 쿠로랑, 준비 완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사일 발사가 시작되었다. “꼬맹이, 뭐해! 벌레는 때려잡으라고 있는 거야!” “두 번 말할 필요 없어, 이 로켓광!” 뽀삐도 고함으로 대꾸했다. 돌아보니 잔나의 몸이 땅에서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꼭 잡아, 룰루.” 잔나의 손이 내 손을 꽉 쥐었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평안을 위해!” 거센 돌풍이 불어와 목초지에서 안개를 쓸어가 버렸다. 벌레 여러 마리가 회오리에 휩쓸리더니 나무줄기에 부딪혀 산산조각났다. 안개가 걷히는 바람에 이 끔찍한 것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다. “저기 봐! 새로운 별들이야!” 룰루가 외쳤다. 다섯 개의 별이 하늘에 다섯 줄기의 빛을 수놓으며 이쪽으로 곧장 날아오고 있었다. 직선을 그리던 다섯 빛줄기는 이윽고 휘어지며 간격을 벌렸고, 다섯 별은 곧장 목초지에 착륙했다. 다섯 개의 섬광이 빛나자 그 서슬에 주변의 벌레들은 몸이 터져 버렸다. 잠시 후 벌레 껍질 조각과 끈적한 액체가 땅에 다 내려앉았고,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다섯 개의 별은 아리와 그 일행이었다. 미스 포츈, 신드라, 이즈리얼, 그리고 박하색 머리카락의 말 없는 여자애까지. “너희가 별 수호자라고?” 나는 고함을 쳤다. “전부 별 수호자였단 말야?” 하지만 이 난리통에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아리의 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빛을 발할 시간이야, 숙녀분들.” 아리가 말했다. 그녀의 미소 하나만으로도 목초지 전체가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즈리얼, 너도.” 그들은 마치 한 몸처럼 합을 맞추어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먼저 미스 포츈이 반짝이는 백색 권총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총알은 벌레 한 마리를 박살 내고 곧장 그 뒤의 놈까지 처치했다. 미스 포츈이 웃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 당장 그녀의 관심이 내게 있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와 이즈리얼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희미한 빛덩어리로만 보였다. 괴물들은 둘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아가지도 못했다. 아리가 킥킥 웃으면서 유난히 몸집이 큰 괴물 한 마리에게 손 키스를 날렸다. 그러자 놈은 정신없이 홀린 듯한 기색으로—애초에 벌레에게 정신이 있을 리 없겠지만— 아리와, 아리가 공중에 띄운 구슬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갑자기 아리는 웃음을 멈추고 구슬을 놈에게 날렸다. 벌레는 순식간에 폭발해 버리고 시커먼 즙만 남았다. 신드라는 잠깐 망설이듯 물러나 있었으나, 곧 공중에 구체를 세 개 띄우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 광기 어린 분위기는 시로와 쿠로마저도 한 수 접어줘야 할 기세였다. 박하색 머리칼의 소녀는 한가운데에 선 채 기다란 지팡이를 들어 올려 하늘에서 별빛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는 동안 쿵쿵 뛰던 심장 박동이 차분해지고 호흡도 안정되었다. 이윽고 아리의 구슬이 마지막 남은 벌레를 간단히 처치했다. 놈은 산산조각난 껍질과 형광색 끈적한 즙으로 산화해 버렸다. 새로운 별의 수호자들은 등장할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임무를 끝냈다. 아리는 손가락을 딱 하고 울려 구슬을 모아들였다. 벌레들의 잔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신드라는 짙은 보라색 구체로 저글링을 했다. 얼굴에는 평소보다 더 심한 거만함이 넘쳐흘렀다. “하룻밤 몸풀기로는 딱인데. 그렇지, 소라카?” 이즈리얼이 박하색 머리칼의 조용한 소녀에게 윙크했다. “회복 고마웠어.” 소라카는 고요한 미소를 띤 채 이즈에게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는 들뜬 표정으로 내 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즈가 날린 날개 달린 마스코트는 그의 건틀릿으로 돌아가 안착했다. 미스 포츈은 쌍권총에서 나오는 연기를 입으로 불어 날리며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도 잠시, 발밑의 땅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땅이 갈라지며 나는 뒤로 밀려났고, 통나무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쳤다.. “아으…” 머릿속에서 금속성의 윙윙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일어서려던 나는 목초지 전체가 불안정하게 뒤틀리는 모습에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간과 공간의 기본 구조가 눈앞에서 왜곡되고 있었다. 초록색 섬뜩한 기운이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더욱 강력해져서. “룰루! 징크스!” 나는 단원들을 찾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이라고는 가장 크게 갈라진 땅속에서 이번에는 코끼리 두 마리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우주 벌레 같은 괴물이 거대한 갑각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었다. 땅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갑자기 빛 한 줄기가 내 앞에 내려섰다. 발밑의 땅이 무너져 내리는 찰나, 빛 속에서 하얀 건틀릿이 쑥 나와 내 손을 잡았다. 이즈였다. “내가 나중에 보자고 했지?” 이즈의 목소리는 혼돈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저런 차원을 넘나드는 괴물은 그냥 놔둘 수 없지.” 이 세상이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날 지경이었지만, 이즈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준비됐어, 별빛?”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히 준비 됐어. 이즈는 나를 들어올려 괴물 위쪽의 하늘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제야 모두를 볼 수 있었다. 잔나와 소라카는 작은 틈에서 연신 기어올라오는 작은 곤충 괴물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아리, 미스 포츈, 신드라는 작은 곤충들을 물리치는 한편 거대 괴물을 상대하기에 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나는 룰루 옆에 내려섰다. 룰루는 괴물의 무수한 다리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동안 룰루의 요정 픽스는 조그만 괴물들을 연달아 해치우고 있었다. 징크스와 뽀삐는 목초지 가장자리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나보고 뭘 하라고?” 징크스가 고함쳤다. “로켓! 나한테 로켓을 쏘라고!” 뽀삐가 마주 고함쳤다. “뭐어?!” 징크스는 충격을 받아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그 표정은 서서히 미소로 바뀌었다. 징크스는 허리를 숙이고 맹렬한 기세로 뽀삐를 껴안았다. “그런 건 진작 부탁했어야지!” 다음 순간 로켓이 발사되어 괴물의 목구멍 속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망치를 틀어쥔 뽀삐가 올라타 있었다. 망치가 괴물의 몸뚱이에 커다란 금을 냈다. 괴물이 휘청거렸다. 네놈도 이제 끝이야. 나는 지팡이를 들어 별빛을 한껏 끌어모았다. 괴물의 날카로운 앞니가 허공에서 딱딱 맞부딪혔다. 놈은 발치에 서 있는 룰루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내 지팡이에서 나온 빛이 정확히 괴물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유독한 액체가 터져 나와 목초지를 온통 적셨다. 괴물은 귀를 찢을 듯한 비명 소리를 내더니 느릿느릿 쓰러졌다. 단말마의 고통에 버르적거리던 묵직한 다리들이 무너져 내렸다. 룰루 바로 위로.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제일 가까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뛰어들어 룰루를 밀어냈다. 시커먼 괴물의 파편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사방이 캄캄해졌다. |
10. 끝맺는 이야기: 빛은 일어선다
내 귀에 처음 들린 소리는 천막의 캔버스 천이 부드럽게 펄럭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손가락에 얇은 담요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벌어지지 않으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눈을 떴다. 천막 천장에 뚫린 구멍 네 개에서 햇빛이 들어와 곧장 내 눈을 찔렀다. 나는 내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어… 나…” 입안이 바짝 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천장이 빙빙 돌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대로 누워 있기로 했다. “…어떻게 된 거?” “죽진 않았어.” 너무나 ‘쿨’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 침낭 끝쪽의 천이 잡아당겨졌다. 누가 침낭 매무새를 바로잡는 듯했다. 나는 어지러운 가운데에도 눈을 찡그려 그쪽을 보았다. 아리가 완벽하게 손질한 복숭앗빛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있었다. “너 어젯밤에 아주 세게 넘어졌어.” 아리가 말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편집을 엉망으로 한 영화처럼 뒤죽박죽 마구잡이로 머리에 떠올랐다. 숲속을 달려가던 일. 평야. 괴물들. 룰루. 그러고 모든 게 무너져 내렸지. 그 꿈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어.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지만, 다음 순간 바로 후회했다. 뇌가 갑작스런 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두개골 한쪽에 호되게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룰루는? 어떻게 됐어?” 나는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마를 열심히 문질러 두통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다들 무사해. 아침 먹으러 가라고 했어.” 아리가 대답했다. “그 키 작고 파란 애가, 네가 언제 깨어날 건지 말 안해주면 망치로 나를 내려칠 거라고 하더라.” 아리는 자기 옆에 놓아둔 물통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찬물을 한 모금 마시며 아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아리와 나는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보다 경험도 더 많았고, 자신감도 더 높았다. 우주가 우리에게 준 것을 아리는 더 많이 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리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수호단장이다. “참,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넌 옳은 선택을 했어.” 아리가 말했다. “네 목숨을 걸고 그렇게 뛰어든 거 말이야.” “별거 아니었어.” 나는 그런 찬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했을 거야. 별 수호자라면 해야 하는 일이니까. 우린 자매잖아.” 아리는 잠깐 소리내어 웃었으나 다음 순간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완벽한 가면이 다시 그 얼굴을 덮었다. “우린 자매가 아니야.” 아리는 차분하게 말했다. 애석하다는 기색이 엿보이는 목소리였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남일 뿐이지.” 아리는 일어섰다. “어제 그곳은 우리가 봉인했어. 우리 수호단은 오늘 아침에 도시로 돌아갈 거야. 이제부턴 우리가 별 수호 임무를 수행할게. 너희는 네가 회복될 때까지 여기 있어도 돼. 여름 햇살을 마음껏 즐겨. 그 후에는 우리 일에 간섭 안 하면 되고.” “잠깐, 이제 네가 우릴 이끄는 거 아냐?”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머리가 쿵쿵 두들기듯 아파왔다. “그러니까, 우리 수호단까지 말이야. 단원이 두 배가 되면 힘도 두 배가 될 거잖아. 어젯밤에도 함께 하니까 결과가 좋았고.” “넌 어제 거의 죽을 뻔했어.” 아리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다 함께라면 우린 대적 못 할 상대가 없을 거야.” “아냐, 럭스.” 아리는 다 끝났다는 투로 말했다. “다 함께라면 잃을 게 더 많아질 거야.” 그때와 마찬가지다. 또 한 번 묵살당한 거다. 아리는 천막에서 나가려 몸을 돌렸다. “별 수호자는 한 팀이잖아.” 나는 자꾸만 야속해지려는 마음을 꾹 눌렀다. 애원할 것까지는 없어. 그저 합리적인 길을 일깨워주기만 하면 돼. “그건 우리의 운명이야.” 아리는 우뚝 멈춰서더니, 깊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천막 덮개는 이미 열려 있었고, 밝은 햇살이 들어와 아리의 얼굴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웠다. “운명?” 아리의 목소리에 신랄한 기색이 아주 약간 묻어났다. “그것참 추악한 단어네.” 아리는 그대로 나갔고, 그 등 뒤로 천막 덮개가 내려와 버렸다. 좌절감이 치밀어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리가 별 수호자 단장이잖아. 왜 우리를 이끌어주지 않는 거지? 왜 나를 혼자 두고 가 버리는 거야? 나는 천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머리 위에서 구멍 네 개가 빛의 점이 되어 춤추고 있었다. 아냐. 난 혼자가 아니야. 징크스랑 뽀삐랑 룰루랑 잔나가 저 밖에 있어. 저들에겐 누군가가 필요해. 저들에게 나밖에 없다면, 내가 이대로 멀거니 누워 있으면 안 돼. 나는 일어나서 바깥에 보이는 빛을 향해 걸어갔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몸은 비틀거리고, 온 세상이 빙빙 돌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징크스 말이 맞으니까. 여름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을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