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08:19:38

백정각시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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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련 언급
2.1. 박경리 토지에서2.2. 이규태 역사 에세이2.3. SBS 스브스뉴스에서
3. 정말로 "전통"이었는가? 4. 유사 사례?5. 결론6. 기타7.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백정의 여성 가족에게 공개적으로 성폭력을 가하는 전통으로 잘못 알려진 낭설.

제대로 된 기록이 거의 없어 허구이거나 몇몇 사건에 과장되게 살이 붙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성적인 부분이 강조된 것 때문인지 인터넷에서 이상한 살이 계속 붙었고 이것이 SBS에서 2000년 2월 6일에 방영된 특집 드라마 '백정의 딸'에서 본격적으로 묘사되면서 교과서에까지 실림에 따라 상당한 이슈거리가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려장, 씨받이와도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당연하지만 백정각시놀이가 실존하였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전혀 없으며 실존하지 않는 전통이므로 관련 연구도 없다.

2. 관련 언급

2.1. 박경리 토지에서

"참말로 백정놈들 숨구멍 트인 세상이제. 언감생심, 이런 술집에 들어올 생각이라도 한께. 한시절 전만 해도, 아 그러씨 백정 각시 놀이를 생각하믄 다 알쪼 아니요?"

좌중에 웃음이 터진다.

"백정 각시 놀이라, 나도 소싯적에 한분 봤지마는."

쥐 상의 사내가 말했다.

"거 쉽잖은 구겡 했네."

허상안의 사돈 노서방이 말했다.

"아암 쉽잖고말고. 백정 각시 놀이가 무서바서 백정이 계집들이 좀체 안나오니께 우짜다가 나와도 숨어서 구겡을 한께로 집어내기도 어렵고."

"내 소싯적에 한 분 본 것은, 그러니께 그기 무슨 놀이든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단오 놀이든지, 아무튼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한사 결단 달아날라는 거를, 아 그러씨 장정 몇이 덤비는 데야, 치마가 찢기 달아나고 속곳이 벗겨지고,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고놈의 가시나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이삐게 잘 생깄더마."

"볼 만했겄네."

"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 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 기라요. 뿐이겄소? 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 그 에미가 소개기를 가져와서 겨우 풀리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

"안되기는 머가 안됐단 말이오? 백정은 사람이 아닌께, 그 놈들을 오냐오냐 하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칼 들고 소만 잡겄소? 사람도 잡을라 들 긴데 옴짜달싹 못하게 콱 기를 지이놔야지."

사람들은 백정의 얘기로 흥을 돋우며 술을 마신다. 더러는 주점을 나가고 새 손님이 들어오기도 한다.
- 토지 9권(3부 1권) p.208 중(1977년)

소고기를 가져와서 풀려났다는 서술은 후술하는 예천의 형평사 이야기와 일치한다. 다만 토지의 서술만 보면 전통이나 풍습이라기보다는 종종 일어나는 깡패들의 백정 여인에 대한 행패를 지칭하는 단어로 풀이된다. 작중에서도 '쉽지 않은 구경'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드물게 일어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토지 9권의 배경은 1919년 무렵인데 소싯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상당히 이전 일인 것을 고려해보면 구한말~ 일제강점기 극초기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즉, 어딜 어떻게 봐도 보편적으로 오래된 전통이라고 말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따른다. 참고로 박경리는 1926년 12월 2일 출생이다. 즉, 토지 9권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박경리가 실제로 살지 않았던 시대다. 무엇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엄연한 창작 소설이지 역사 사료가 아니다.

2.2. 이규태 역사 에세이

사는 곳도 제한 받아 동구 밖이나 강 건너에서 천민끼리 어울려 살며 여느 마을에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는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달고 다니게도 했다. 중세 유럽에서 유태인 식별을 위해 노란 천을 달고 다니게 했듯이--.

한 동안 학교 운동회에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가 있었다. 학부모 놀이인데 스타트를 하면 관중 속에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고 그 위에 타고서 달려 장대를 빨리 도는 경주다. 학교 운동회철이 되면 어느 고을에선가 말 없이 목매어 죽는 백정각시가 생겨나게 마련이었다던데 그 이유가 알 만해진다.(하략)

출처: [이규태 역사에세이] "백정여인 희롱하기" 시합도(1999년)

잘 보면 이름도 다르고 시기나 위치[1]에 대한 언급도 두루뭉술한 데다 일단 '학교'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빨라도 일제강점기임을 짐작할 수 있어서 토지에서 말하는 백정각시놀이와는 명백히 다른 행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몇몇 보이는데 먼저 이 시기에는 이미 제도적인 백정에 대한 차별은 없어진 상태[2]였으므로 의복 차별이 존재할 수 없는데 백정에게 검은 천을 달았다고 적어놓고 있다.

조선시대에 '백정 여인의 치마에는 검은 헝겊을 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건 치마지 저고리 깃이 아니다. 이것이 마을 차원의 규칙일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사냥감이 될 것이 뻔한데 굳이 검은 천을 달고 관중석에 있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설사 이규태의 기록이 거진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치마를 벗기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없는 반면 바치 연례 행사인 듯이 언급하고 있는 것도 토지와 다른 점이다.

참고로 토지 저술 시 이규태 에세이를 참고했다는 이야기는 헛소리다. 토지 3부는 1977년 작품이고 이규태 역사 에세이는 1999년에 실린 것이다.

2.3. SBS 스브스뉴스에서

1910년대에 딸의 소학교(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러갔던 어머니가 딸 앞에서 백정각시놀음을 당한다. 딸이 보는 앞에서 옷이 벗겨지고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남자들이 올라타 온갖 모욕을 주었다. 결국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자살을 하고 만다.

출처: 치마를 벗기고 올라타는 놀이…'백정 각시 놀음'

1910년대에 당시 조선인이 다닐 수 있었던 학교는 보통학교이며 그나마도 1918년에야 생겨나기 시작했고 1938년에야 비로소 '소학교'로 명칭이 바뀐다. 당시 조선인들은 무학이 대부분이었고 소학교 혹은 보통학교 졸업이나 고등보통학교 진학만 되어도 엄청난 고학력이었으며 대학생은 거의 초인급의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3] 백정의 딸이 학교라는 곳에 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당시는 평민들도 학교에 가지 못 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좀 과하게 표현했을 때 천민은 학교라는 곳 근처에도 못 갈 신분이었다. '입에 재갈'이라는 서술과 '검은 저고리 깃'이라는 언급이 동시에 나온다는 점에서 특정 출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규태와 토지의 내용을 뒤섞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정이 말갈족의 후예라는 주장을 담았는데 이는 검증되지 않은 소수설에 불과하다. 혈통이 유목민이건 아니건 떠돌이 생활을 하면 생활양식은 비슷하게 수렴진화하기 마련인데 21세기 한국 매체에선 기이할 정도로 유목민족 후예설에 집착하는 편이다.

3. 정말로 "전통"이었는가?

백정각시놀음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한 포스트 1. 백정각시놀음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한 포스트 2

실제로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백정을 인간 이하로 대우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중 1명인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3.1 운동 직후 자기 마을에서 백정이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어 일본인 경찰에게 신고하였으나 3.1 운동 후 일본 경찰에 대한 분위기도 안 좋은데 괜히 조선의 전통에 관여하였다가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한 일본 경찰들이 사건 수사하기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4]

문제는 백정각시놀이라는 행위 자체가 조선시대부터 조직적으로 행해진 "전통"이었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학술적 1, 2차 사료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실록 같은 조선시대 사료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음을 암시할 만한 언급은 전혀 없고 일제강점기의 신문이나 공문서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학술적인 연구나 논문도 전혀 없다. 확인되는 건 그나마 있다는 기록도 전부 내용이 엇갈리는 다른 이야기라는 점과 건국 후 100년 넘게 백정이 저지른 강력 범죄에 고통받은 조선 양민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싫어해서 마을 행사에 백정들이 참여할 일이 없었다는 것 뿐이다. 과거 사료를 부정하는 이들은 일부러 기록을 안남겼다고 하지만 당장 조선왕조실록만 봐도(곡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 누구가 번개맞아 죽었고 눈 4개 달린 고양이가 태어났다는 등 시시콜콜한 일까지 기록돼있다.

위에서 증거라고 내놓은 이규태와 박경리의 증언이란 것도 문제가 있는데 먼저 이규태는 해당 항목에도 나오듯이 씨받이 같은 풍습을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런 근거 없이 주장한 적이 있는 데다 제일 먼저 투고한 글에서조차 고증을 엉망으로 해 놓은 전적이 있다. 거기다 만일 위의 에세이가 진실이라고 한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일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 백정 여인이 갑오개혁 무렵에 철폐된 차별적 백정 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 백정과 양민 사이의 관계가 극히 나쁜 마당에 백정 여성 여럿[5]이 양민들이 다니는 학교 운동회에 관중[6]으로 온다.
  • 일제의 헌병 내지 순사가 순찰을 돌고 일본인 선생이 가르치는[7]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벌어지는 운동회에서 학부모에 의한 공개적 성추행/성폭행을 전제로 하는 행사가 공식적[8]으로 일정 기간 동안 치러졌다.
  • 조선의 미개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임에도 일제가 악폐습으로 기록하지 않고 묻었다.[9]

박경리의 경우, 문학적으로는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공식적인 사료나 논문에 비해 학술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역사 전공자들이 로마인 이야기 불쏘시개 취급하는 것과 같은 맥락. 그나마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적인 인물, 사건을 바탕으로 주관, 추측, 카더라를 잔뜩 버무려 놓은 "역사서의 탈을 쓴 소설"이지만, 토지는 등장인물과 사건부터가 전부 다 허구와 창작인 "그냥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이규태 에세이와 토지에 붙은 살인 '1910년대'/'일제강점기 신문기사'/'마을 한 바퀴 돌기' 등의 서술은 그 구체적인 언급과는 달리 그 원 출처를 아예 알 수가 없다.

결국 현대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백정각시놀이가 조선의 전통적인 풍습(?)이었다는 소리는 이규태 혼자만의 주장에서 시작된 것일 뿐, 그 외엔 구체적인 "백정각시놀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일제강점기 때 국지적으로 있었던 구타, 폭행 사건이 이규태에 의해 "오래된 전통"인 것 마냥 왜곡 포장된 후, 인터넷에서 대대적으로 부풀려진 소위 고려장이나 씨받이와 비슷한 사례일 확률이 매우 높다. 쉽게 말해 21세기인 지금도 미투 운동에서 드러나듯 여성을 차별하거나 아랫 사람에게 갑질하는 일은 선진국, 후진국 다 가리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꽤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이걸 그 나라의 오래된 전통 운운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4. 유사 사례?

백정각시놀이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례는 1920년대 경상북도 예천에서 일어난 조선 형평사의 활동을 담은 아래 기록이다.
경상북도 예천[10]의 형평분사는 1923년 8월에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진주본사의 장지필과 경북지사장 김경삼의 방문에 즈음하여 열린 1923년 10월 말의 임시회의에서 사원은 신분을 상징하던 머리를 집단적으로 자르기로 결의하였으며, 활동기금으로 1천 원을 적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굴욕스러운 사회관습을 철폐하려고 노력하였다. 매년 7월 백중에는 농부들이 놀이를 열곤 했다. 이때 농악놀이를 하며 춤추던 농부들은 백정 부녀자 한 사람을 볼모로 잡아다 놓고 그를 풀어주는 대가로 고기나 소머리를 요구하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백정가족이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모를 집단으로 폭행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악습철폐를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강구되고 있었다.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2권 ' 형평운동'

백정 부녀자에 대한 집단 폭행 행위가 존재하긴 했는데 보다시피 일제강점기, 형평운동으로 백정과 지역여론간의 충돌에서 폭행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록 그 어디에도 백정각시놀이의 핵심인 강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례가 겨우 이거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통으로서의 백정각시놀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최악의 경우에도 웬만하면 구타로 끝나지, 최소한 피해자를 욕보여서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가 억압을 했을지언정 기본적인 치안유지 조차 포기한 적은 없다. 전국에서 백정 거주자가 두번째로 많은 지역에서 강간상해까지 벌어졌다면 저 정도 충돌로 끝나기 어렵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조선 양민들은 고기 살때 말고는 어떤식으로든 백정하고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당연히 조선시대 마을 행사에 백정이 참여할 수 없었고 백정과 살을 섞는 거 자체를 싫어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형법에서는 대상이 백정이라고 강간죄를 봐주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일반 형사법인 <대명률>에 따르면 구타(鬪毆)에 대한 처벌은 기본적으로 태형 20대부터 시작해서 상해에 따라 최고 장형 100대까지 가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혹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자에 대해 저지르는 폭력이라면 보다 가볍게 처벌하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간은 여섯가지 중범죄[11] 중 하나로서 닥치고 교형이고 강간 미수는 장형 100대인데다 유부녀라면 형이 더해지도록 되어있었으며, ' 위핍인치사(威逼人致死)'라는 개념이 있어서 위세에 의한 핍박으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면 장형 100대, 강간 등으로 인한 핍박으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만들면 참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었고, 감형에 관한 규정도 없어서 신분이나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조치도 없었다.

당대 법률 상 교형이든 참형이든 사형이 확정되려면 반드시 국왕이 최종 결재를 내려줘야 했으므로 강간죄가 정식으로 공론화된 이상 실록에 기재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실록을 찾아보면 강간 = 교형, 강간 미수 = 장형 + 유배형 공식이 거의 예외없이 적용되었고, 그나마 임해군은 왕자라서 국왕이 직접 감싸준 덕분에 강간범 주제에 얼굴에 낙인을 찍힌 채 유배형을 받고 목숨을 건지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백정은 취급은 천민이었어도 법적으로는 양인이었으므로, 백정을 대상으로 조선 최악의 6대 범죄 중 하나인 강간을 저질렀다면 극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한 말 신분제 철폐로 백정과 양민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양자간 갈등이 심화되어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물리적, 사회적 충돌이 생겨나 형평사 결성시까지 유지되었다고 봐야한다. 다른 지역에선 비슷한 기록이 일절 존재하지 않으며 전국에서 백정의 세가 가장 강한 지역 중 한 곳인 예천에서만 저런 기록이 발견된다는 것도 구한 말에 들어 깊어진 양민과 백정 사이의 갈등이 역으로 조선시대에 없던 저런 행패를 탄생시킨 것이다.

5. 결론

정리하자면, '원전으로 추정되는 백정 부녀자 대상 단체 폭행 행위는 한때 있었어도 '전통'으로서의 백정각시놀이는 없었다'. 조선시대 어느 기록을 뒤져봐도 비슷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규태의 서술을 부정하는 기록(아예 서로 엮이려고 하지 않음)은 한가득이다.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실체는 신분제가 사라지고 사회가 전환기를 맞이한 일제 강점기에 필연적으로 그전까지 완전히 구분되어 살던 백정과 양인의 충돌이 불거졌고 그때 백정 부녀자들에게 폭행이 가해졌다. 그마저도 20년도 남짓한 기간 동안 있다 사라진 악습이다. 이걸 전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당연히 전통으로서의 그런 행위가 없었으니 '백정각시놀이'라는 용어도 박경리의 창작이거나 몇다리 건너 전해듣는 과정에서 가공된 용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설사 존재했다 해도 연례 행사나 전통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불한당들이 백정 여인을 상대로 부리는 행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게 옳을 것이다.

6. 기타

교과서에서 백정각시놀이를 소개하는 문단을 인용한 서적인 <조선팔천>이라는 책은 이름만 봐서는 얼핏봐서는 고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2011년 출판된 책으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 에세이에 가까운 서적이며, 작가도 역사학자가 아니라 시인이다. 또한 해당 문단에서 서술하는 '노동위안회'란 조선시대의 행사가 아니라 1920년 중반기에 노동조합에서 벌인 행사의 하나로 이름도 노동위안회 같은게 있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노동자를 위안하는 행사로 조합원 위안회, 춘기/추기 위안회 등 이런 저런 종류의 위안회가 있었다.

가장 개그인 것은 조선-대한제국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노동위안회가 해마다 7월 13일에 열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잠깐 위의 형평사 활동을 보고 오자. 백중이 바로 음력 7월 15일이다.

7. 관련 문서



[1] 예천이라고 서술되었다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이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에서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 예천 지방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확대해석한 것이다. [2] 백정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됨에 따라 사라졌으며 일제강점기에도 백정 호적에는 붉은 점 등의 표기를 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적 상의 이야기다. 의복 차별은 없었다. 다만 사회적 차별은 엄연히 있었다. [3] 당시에는 고등학생은 물론이고 대학생들도 검은 교복을 입었는데 절대다수의 평민들은 쳐다보지도 못 할 사람들이었으며 무학이 가장 많고 문맹도 적지 않았던 시대였다. [4] 백정해방운동을 이끈 양반, 강상호를 기억하며. # [5] 정말 운동회 행사라면 경주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백정 여성 1명으로는 성립될 수 있을리가 없다. [6] 백정은 신식 학교 교육에서도 차별을 받아서 자주 분규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7] 1920년 이후에야 조선인 교원이 배출되기 시작하기에 일제시기 초기 보통학교의 교원은 일본인 뿐이었고 이후로도 일본인 교원의 숫자는 상당했다. 따라서 일본인도 참석하고 있을 학교 행사라면, 아무리 일제의 경찰이었다고는 해도 저런 폭력적인 행사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일제가 조선을 강압적으로 지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안 유지 활동을 아예 내다버린 것은 아니다. [8] 이규태는 분명히 '학부모 행사'라고 언급하고 있다. [9] 기본적으로 일제시기의 보통학교 보급은 '3면1교주의'라고 해서 면 3개당 학교 1개를 설치하는 계획이었고 이는 1922년에 완료되었으며, 1940년 무렵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지역사회의 행사로 자리잡아 활발하게 개최되었다. 따라서 만일 백정각시놀이 사건이 운동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면 운동회 관련 기록에 반드시 남았을 것인데 일제시기 운동회 관련 기록에서 이에 대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0] 경상북도는 1934년 기준으로 가장 백정이 많은(6121명) 지역이었고, 예천은 그 중에서도 2번째로 백정이 많은 지역이었다. [11] '육범'이라 하여 대사면령의 예외에 드는 범죄이다. 모반(謀反), 살인, 절도, 강도, 강간, 재물 약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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