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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장기 휴전 (1389-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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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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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년

1. 평화 협상 (1389~1396)
1.1. 뢰랭강 조약 (1389)1.2. 뢰랭강 협상 (1390)1.3. 알렉산드리아 전투 (1391)1.4. 샤를 6세의 정신 질환 (1392)1.5. 뢰랭강 회담 (1393)1.6. 십자군 계획 (1394)1.7. 아비뇽 회담 (1395)1.8. 파리 조약 (1396)
2. 잉글랜드의 내전 (1397~1403)
2.1. 브레스트 할양 (1397)2.2. 볼링브로크 추방 (1398)2.3. 볼링브로크의 역습 (1399)2.4. 웨일즈 반란 (1400)2.5. 오를레앙의 역습 (1401)2.6. 브린글라스 전투 (1402)2.7. 슈루즈베리 전투 (1403)
3. 돌아온 해적 시대 (1403~1407)
3.1. 플리머스 습격 (1403)3.2. 블랙풀 샌즈 전투 (1404)3.3. 슬로이스 습격 (1405)3.4. 부르고뉴의 역습 (1405)3.5. 부르 포위전 (1406)
4. 프랑스의 내전 (1407~1415)
4.1. 오를레앙 암살 (1407)4.2. 오텔 생폴 회의 (1408)4.3. 오테여 전투 (1408)4.4. 부르고뉴의 승리 (1409)4.5. 비세트르 조약 (1410)4.6. 생클루 전투 (1411)4.7. 부르주 포위전 (1412)4.8. 뷔장세 조약 (1412)4.9. 박피단의 난 (1413)4.10. 파리 포위전 (1414)4.11. 아라스 포위전 (1414)4.12. 왕세자의 역습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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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 협상 (1389~1396)

"이 왕의 옥좌, 이 홀을 쥔 섬, 이 장엄한 땅,
이 군신의 자리, 이 두 번째 에덴, 이 절반의 낙원,
이 자연이 오염과 전쟁을 막기 위해 스스로 만든 요새,
이 행복한 사람들의 무리, 이 작은 세상,
이 덜 행복한 땅의 질투를 막는 해자 역할을 하는 은빛 바다에 놓인 보석,
이 축복받은 장소, 이 땅, 이 왕국, 잉글랜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1.1. 뢰랭강 조약 (1389)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bert_II_of_Scotland.png

1389년 6월, 약 반 년 간의 협상 끝에 종전 협상을 전제로 3년 기한의 휴전이 체결됐다.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2세는 처음에는 휴전에 동참하길 거부했지만 8월이 되자 프랑스의 지원 없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휴전에 동의한다.

1.2. 뢰랭강 협상 (1390)

파일:Valentina_Visconti,_Duchess_of_Orleans.jpg

그러나 종전 협상은 주권 문제 때문에 시작부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잉글랜드측은 가스코뉴를 잉글랜드 왕의 영토로 두는 대신 곤트의 존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프랑스측은 거부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프랑스 왕에 대한 신서 자체를 거부하는 여론이 강했다. 리처드 2세 자신이나 곤트의 존은 잉글랜드 왕국의 주권과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조건이 잘 합의되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의회의 남작들과 평민 대표들 모두 그런 어중간한 타협이 실제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한편 샤를 6세는 영토 확장과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루이 당주를 나폴리 왕으로 지지하며 재정적 지원을 하는 동시에,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협력해 이탈리아로의 대규모 군사 원정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잔 갈레아초의 딸 발렌티나와 결혼한다. 잉글랜드와 전쟁을 계속하면서 이탈리아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샤를 6세는 종전 협상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1.3. 알렉산드리아 전투 (1391)

파일:GiovAmbrogiodePredisattribGianGaleazzoVisconti (1).jpg

협상의 빠른 진행을 위해 양국의 외교 사절단이 런던과 파리를 바쁘게 오가며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 간의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유럽의 세력 균형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리처드 2세와 고문들은 이탈리아 원정의 중단을 요구하며 정상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 게다가 프랑스 내부에서도 잔 갈레아초의 정적인 부르고뉴 공작과 아르마냑 백작이 원정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내에서도 뛰어난 정치가인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활약하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밀라노에 대항하는 연합이 등장하는 등 악조건이 겹치면서 샤를 6세의 이탈리아 원정 계획은 사실상 취소된다.

그러나 7월 25일, 프랑스군의 지원 없이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가 피에몬테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피렌체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아르마냑 백작은 이 전투에 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4. 샤를 6세의 정신 질환 (1392)

파일:Madness_of_Charles_VI.jpg

1392년 6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올리비에 드 클리송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샤를 6세가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하면서 휴전이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샤를 6세가 발작으로 미쳐버렸다. 왕이 부재한 사이 정부를 장악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전쟁 준비를 중단하고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숙청하는 대가로 브르타뉴가 잉글랜드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브르타뉴 공작과 합의한다.

1.5. 뢰랭강 회담 (1393)

파일:Johnofgaunt.jpg

1393년 4월, 양국의 고위급 대표들이 회담을 시작했지만 주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휴전만 4년 연장된다.

1.6. 십자군 계획 (1394)

파일:Nicopol_battle_1398.jpg

1394년 4월, 가스코뉴에서는 곤트의 존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당했다. 한편 리처드 2세는 지지부진한 협상에서 관심을 돌리고 아일랜드 원정을 계획한다.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이 투르크족에 맞서 헝가리를 구원할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다. 곤트의 존 역시 이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십자군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화해를 이끌어낼 계기로 떠오른다.

1.7. 아비뇽 회담 (1395)

파일:Antipope_Benedict_XIII.jpg

1395년 5월, 리처드 2세는 샤를 6세의 어린 딸 이자벨과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종전 대신 장기 휴전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프랑스 정부는 교회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 두 교황이 모두 퇴위하도록 설득한 뒤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새 교황을 선출한다는 타협적인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는 이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프랑스측은 베리 공작, 부르고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한 프랑스의 대귀족들을 아비뇽에 사절로 보냈지만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한편 로마 교황과 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정책이 이렇듯 무력에 의한 정복에서 타협으로 바뀌면서 밀라노 공작의 사위인 오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중앙 정계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1.8. 파리 조약 (1396)

파일:Richard and Isabella on their wedding day in 1396.jpg

1396년 3월, 파리에서 리처드 2세와 이자벨의 약혼과 28년의 장기 휴전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10월, 칼레 시 인근의 국경지대에서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이자벨 공주가 약혼자의 손에 인도되었다.

그러나 주권 문제를 비롯해 그동안의 회담에서 논의되어 온 중대한 문제들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심지어 잉글랜드측에서는 조약 자체가 의회나 추밀원과도 상의하지 않고 국왕 혼자 비공식적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을 비롯한 반프랑스파는 당분간 침묵을 지켰다.

2. 잉글랜드의 내전 (1397~1403)

"부탁이니, 바닥에 앉아서
왕들의 죽음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자.
어떤 왕은 폐위되고 어떤 왕은 전장에서 죽었지,
어떤 왕은 자신이 짓밟은 이들의 유령에 홀렸고
어떤 왕은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어떤 왕은 자다가 질식했지
모두 살해당했다. 인간인 바에야 죽을 수밖에 없는 왕.
그 왕의 이마를 두르고 있는 이 텅 빈 왕관 속에는
죽음의 신이 거느리는 궁정이 있기 때문이야.
거기 광대 하나가 죽음의 왕좌에 앉아, 막간극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왕으로 군림하며 나라를 주무르고 온갖
영화를 누리지. 눈빛 하나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고, 세상이
경외하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생명을 지탱하는 자기
육신이 놋쇠나 구리라도 되는 듯한 착각과 끝없는 자만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 그러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죽음의 신이 그
철옹성의 벽을 작은 바늘 하나로 살짝 찌르는 거야. 그러면,
왕이여 안녕! 모자를 벗지 마시오. 그런 허례 허식으로
살과 피를 조롱하지 마시오. 존경과 예의, 전통과 격식 따위는
내던져버리시오. 당신들은 그동안 나를 착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당신들처럼 빵을 먹고 살고, 결핍을 느끼고,
슬픔을 맛보고, 친구가 필요하오."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2.1. 브레스트 할양 (1397)

파일:Thomas_of_Woodstock.jpg

1396년 12월 니코폴리스 전투의 결과가 북부 프랑스와 잉글랜드까지 전해졌다. 동방에서 오스만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면서 종전을 주장하는 여론의 주된 명분 중 하나였던 '십자군 원정을 위해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화해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가 사라졌다.

1397년 1월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하원 의원들은 리처드 왕이 장인인 프랑스 왕의 이탈리아 원정에 군대를 지원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듣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의원들의 반응을 전해 들은 리처드 2세도 격노하며 그들 앞에 직접 나서서 이탈리아 원정 참전이 잉글랜드 왕국에 이득이 되는 이유들을 구구절절히 설명했다.

3월, 리처드 2세는 2만 파운드를 배상금으로 받고 브레스트 시를 브르타뉴 공작에게 양도했다. 그러자 다음에는 칼레를 양도할 계획이라는 뜬소문이 돌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브레스트 주둔군이 런던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글로스터 공작 등 반프랑스파 귀족들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국왕을 모욕하는 발언을 조심성 없이 쏟아냈다.

신하들의 반란을 편집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던 리처드 2세는 이 사건의 배후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지래짐작이라도 했는지 반프랑스파이자 전 청원파인 글로스터 공작, 아룬델 백작, 워릭 백작을 역모 혐의로 즉시 체포했다. 문제는 그런 무리수를 두고도 역모의 증거를 결국 찾지 못했다. 이대로 사과하고 풀어주는 것은 최악의 수였고 남은 방법은 이미 타협하고 지나간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뿐이었다.

우선 글로스터 공작은 달변가이며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왕실 집사장으로서 의회 재판을 주재하는 곤트의 존이 자신의 동생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계획에 동의하리라는 확신도 없었으므로 노퍽 백작을 시켜서 살해했다. 그런 다음 9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1388년 청원파 귀족들에게 내린 사면을 취소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아룬델 백작은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고 워릭 백작은 맨 섬으로 유배되었다.

2.2. 볼링브로크 추방 (1398)

파일:Richard II stops the duel.jpg

합의된 거래를 명분도 없이 뒤집고 까다로운 정적은 그냥 암살해버리는 무자비함으로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의 유력자들 사이에서 신용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강압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곤트의 존과 그의 아들인 헨리 볼링브로크를 체포해서 똑같이 사형에 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이미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던 노퍽 공작은 왕의 음모를 랭커스터 부자에게 폭로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곤트의 존은 역모에 동참하는 대신 왕에게 직접 해명을 요구했다.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결과 1398년 9월 16일 노퍽 공작과 헨리 볼링브로크는 결투 재판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결투가 시작되기 직전 리처드 2세는 왕명으로 결투 재판을 취소하고 두 사람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이 재판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노퍽 공작이 승리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 글로스터 공작 살해 문제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헨리 볼링브로크가 승리하면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정적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주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2.3. 볼링브로크의 역습 (1399)

파일:Deposition of King Richard II.jpg

1399년 2월 곤트의 존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헨리 볼링브로크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형을 무기한으로 연장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6월,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사이 볼링브로크는 맨앳암즈 200명만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노섬벌랜드의 변경 영주인 퍼시 가문은 리처드 2세의 화평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었으며 공포 정치를 위한 귀족 사냥의 다음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반란에 동참하라는 볼링브로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란군은 하루아침에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리처드 2세는 반란 소식을 듣고도 8월 초에나 겨우 웨일즈에 도착했다. 아일랜드에서 모든 군대를 대동한 채 돌아가는 것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소집령에 따라 집결 장소에 모인 국왕군은 모두 흩어졌고 리처드 왕이 이미 죽었거나 국외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왕이 직접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으기에는 이미 늦었다. 리처드 2세는 항복하고 9월 29일 퇴위 문서에 도장을 찍었으며 볼링브로크가 10월 1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리 4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왕은 이듬해 1월 초 폰트프랙트 성으로 끌려갔고, 도착한 지 며칠도 안 돼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에 의해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정신병에 걸린 형 샤를 6세를 정성스럽게 간호하는 등 권력을 얻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고, 1399년 2월 흑사병이 파리 시를 휩쓸었을 때 다른 왕족들처럼 교외로 피난을 가지 않고 도시에 남은 일을 계기로 드디어 삼촌에 대한 반격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정적인 부르고뉴 공작이 대체로 잉글랜드와의 평화 노선을 추구했으므로 오를레앙 공작은 자연스럽게 철저한 반잉글랜드파가 되었다.

2.4. 웨일즈 반란 (1400)

파일:Glendower_by_A.C.Michael.jpg

한편 반란의 전후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프랑스인들은 리처드 2세가 그저 프랑스와의 화평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호전적인 신하들에게 폐위되었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염려와 달리 헨리 4세는 프랑스의 외교 사절단을 공손히 환영했다. 그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1400년 8월 스코틀랜드의 침공이 시작됐고 9월에는 웨일즈에서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즈의 군주로 즉위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 2세의 폭정에 대한 대중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이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지 못하면 파멸은 확정이었다.

2.5. 오를레앙의 역습 (1401)

파일:Louis-Orleans.jpg

1401년 7월, 헨리 4세는 오랜 지연 끝에 리처드 2세의 미망인 이자벨을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지참금 80만 프랑을 돌려주지 않아서 외교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를 기회로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고 과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침공 위험을 과장하면서 프랑스 내의 반잉글랜드 정서를 부추겼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로스시 공작이 몰락하고 올버니 공작과 더글러스 백작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잉글랜드에 대해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2.6. 브린글라스 전투 (1402)

파일:Glyndwr Rising.jpg

1402년 6월 22일, 브린글라스 전투에서 오와인 글린두르의 웨일스 반란군이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반란군의 사기가 오르고 잉글랜드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9월 14일, 험블턴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더글러스 백작을 포함한 유력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원하려는 오를레앙 공작의 계획이 부르고뉴 공작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2.7. 슈루즈베리 전투 (1403)

파일:Battle of Shrewsbury 1403.jpg

잉글랜드 북부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퍼시 가문은 1399년 헨리 볼링브로크의 반란을 지지했지만 곧 그의 통치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불만은 헨리 4세가 퍼시 가문의 라이벌인 네빌 가문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은 왕의 처남으로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1402년 스코틀랜드 국경의 주요 왕실 성채인 록스버러의 수비대장직에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아들 헨리 핫스퍼를 해임하고 랠프 네빌을 임명한 것은 퍼시 가문 입장에서는 매우 부당하게 느낄 만한 처우였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침공 방어와 웨일스 반란 진압이라는 중책을 도맡았지만, 잉글랜드 정부의 재정 위기로 지원금마저 끊기면서 퍼시 가문은 고작 3년 사이 2만 파운드나 되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심지어 험블턴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주력군을 전멸시키고 유력 귀족들을 포로로 잡은 뒤에도 칭찬과 명예만 돌아왔을 뿐 지원은 없었다.

결국 1403년 4월, 헨리 퍼시는 의심을 받지 않고 반란군을 집결시키기 위한 위장 전략으로 더글러스 백작의 영지인 테비엇데일을 침공한다. 그곳에서 포로로 잡아두고 있었던 더글러스 백작을 몰래 풀어줘 군사를 소집하게 한 뒤 웨일스의 오와인 글린두르와도 동맹을 맺었다.

7월 초, 오와인 글린두르가 반란군 8천을 이끌고 공세를 시작해 남부 웨일스의 행정 중심지인 카마던을 점령했다. 글린두르는 얼마 못 가서 잉글랜드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했지만 공포에 질린 지방관들은 다급히 왕실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퍼시 가문의 동향을 의심하고 있었던 헨리 4세는 웨일스 반란군을 무시하고 북부로 향했다.

한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노섬벌랜드와 요크셔와 스코틀랜드에서 군사를 소집하는 동안 그의 아들 핫스퍼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웨일스 반란군과 합류하기 위해 슈루즈베리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 토머스 퍼시가 1000여 명의 궁수와 소수의 맨앳암즈를 이끌고 합류했다.

7월 10일, 체스터에 도착한 핫스퍼는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개혁가라고 소개하며 헨리 4세와 그의 관료들이 세금을 낭비하고 공익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리처드 2세의 지지 세력에도 따로 서신을 보내 리처드 2세가 사실 살아있으며 북부에 아버지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있다고 주장했다. 웨일즈 반란군에게는 에드워드 3세의 모계 후손이면서 삼촌이 글린두르의 사위이기도 한 에드먼드 모티머 백작을 국왕으로 지지했다. 그렇게 랭커스터 왕가의 반대 세력들을 영리하게 결집한 결과 핫스퍼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속도로 일주일 만에 14000여명의 군사를 소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기대 이상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핫스퍼는 아버지가 북부에서 주력군을 소집하고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웨일스 총독으로서 슈루즈베리에 주둔한 웨일스 공 헨리의 군대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헨리 4세는 북부로 향하던 도중 퍼시 가문의 반란 소식을 듣고 미들랜드에서 국왕군을 소집하고 있었는데, 군대가 더 모이기를 기다리지 말고 바로 왕세자와 합류하라는 스코틀랜드 출신 망명 귀족 조지 던바의 조언을 듣고 곧장 슈루즈베리로 향했다. 핫스퍼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인 7월 20일 헨리 4세는 왕세자의 군대와 합류했고, 다음 날 인근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핫스퍼의 반란군을 기습했다. 핫스퍼는 진형을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요청했지만 헨리 4세는 회담을 짧게 끊고 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왕세자 헨리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6인치나 관통되는 중상을 입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 끝에 국왕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핫스퍼는 더글러스 백작과 친위대와 함께 헨리 4세의 깃발을 향해 돌격했지만 국왕 호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왕실 기사 36명이 전사하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핫스퍼는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전사했고, 더글러스 백작은 험블턴 힐 전투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포로로 잡혔다. 핫스퍼가 죽었다는 외침이 퍼지면서 반란군은 무너져내렸다.

슈루즈베리에서 반란군이 대패하고 핫스퍼가 죽었으며 더글러스 백작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퍼지자 북부에서 집결 중이었던 반란군도 내분에 빠졌다. 8월 초,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결국 폰트프랙트 성에서 국왕에게 항복한다. 헨리 4세는 그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의회에 처분을 맡겼다. 하원은 노섬벌랜드 백작이 비록 반역을 저질렀지만 그동안 국경을 지킨 공로를 인정해서 사면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핫스퍼와 토머스 퍼시의 토지는 몰수되었고 그중 일부는 반란 진압의 일등 공신인 조지 던바에게 하사되었다.

3. 돌아온 해적 시대 (1403~1407)

우리 방패병들과 쇠뇌수들이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잉글랜드의 중장병들이 진군해왔다. 이 중장병들은 전열 가운데로 들어와서 페로 니뇨의 부대 앞에 이르렀다. 페로 니뇨는 이에 맞서 중장병들을 진군시켰다.
많은 강한 창 찌르기가 가해졌고 그 결과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부는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창을 버리면서 중장병들은 도끼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혼전이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면갑이 떨어져 나가거나 팔 갑옷과 다리 갑옷이 벗겨져 나갔고, 다른 이들은 도끼와 검을 손에서 놓쳤다. 어떤 이들은 서로 맞붙어 드잡이질했고, 다른 이들은 단검을 손에 쥐었다. 어떤 이들은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많은 곳에서 피가 넘치게 흘렀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의 연대기

3.1. 플리머스 습격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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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의 찬탈과 오를레앙 파벌의 부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1402년부터 영국해협에서 사략선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 중에서 가장 부유한 플랑드르와 부르고뉴파의 정치적 동맹인 브르타뉴 둘 다 해상 무역이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결국 신하들과 동맹의 요구에 굴복한 부르고뉴 공작은 1402년 10월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어린 브르타뉴 공작의 섭정직에서 해임했고 이듬해인 1403년 5월에는 잉글랜드와의 휴전 협정을 재확인하고 플랑드르 백령의 중립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오를레앙 공작이 심신미약 상태인 샤를 6세를 설득해 정부를 장악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협상 이전보다도 험악해졌다. 7월부터 프랑스의 대규모 사략 함대가 잉글랜드의 상선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8월에는 플리머스 시를 습격해서 불태웠다.

3.2. 블랙풀 샌즈 전투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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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 4월 15일에는 맨앳암즈 2000명과 다수의 쇠뇌수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이 다트머스 인근의 블랙풀 샌즈에 상륙했지만 습격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수비대의 반격에 참패하고 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상선 약탈과 해안 습격은 끊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병사하면서 오를레앙 공작이 유일한 권신이 되었고 프랑스 정부의 세대교체가 완료되었다.

6월, 오와인 글린두르의 외교 사절단이 파리에 도착해 협상을 시작했고 7월에 웨일즈와 프랑스의 동맹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사략선들의 위협 때문에 함대 모집에 차질이 생기고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 역시 늦어지면서 원정이 지연되었다.

8월, 악천후까지 겹치면서 웨일즈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계획은 결국 취소되었다. 소집된 함대는 그 대신 라마르슈 백작의 제안에 따라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약탈하기로 했다. 하지만 습격대는 팰머스에 상륙하자마자 수비대의 반격에 패주했고, 프랑스로 귀환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큰 손실을 입었다.

계속되는 해상 작전의 실패로 라마르슈 백작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의 고문들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 이어 남부 해안과 가스코뉴까지 추가된 4면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잉글랜드 정부 역시 파산 직전에 몰려 있었다.

한편 아버지 용담공 필리프가 죽은 이후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행정 개혁과 감세를 주장하며 파리 시민들과 도시 세력의 지지를 구하는 동시에 오를레앙 파벌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3.3. 슬로이스 습격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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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4월,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기세를 올리던 웨일즈 반란군이 몬머스셔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가스코뉴 방면에서는 프랑스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해 많은 요새들을 점령했다.

6월, 클래런스 공작 토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플랑드르와 북부 프랑스 해안을 휩쓸며 도시와 마을들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주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해안 습격을 막기 위해 칼레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를레앙파는 이를 무시하고 보르도 공략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잉글랜드 함대는 해안 습격을 중단하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고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롭을 포함한 지도부가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헨리 퍼시는 스코틀랜드로 망명했지만 다시 웨일즈로 도망쳐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류한다.

3.4. 부르고뉴의 역습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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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7월, 오를레앙 공작은 또다시 심신미약 상태인 형 샤를 6세를 설득해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전통적으로 왕세자에게 수여되는 지위였기 때문에 아무리 권신이라고 해도 선을 넘은 행위였다.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에 결국 오를레앙 공작은 노르망디 공작위를 포기한다.

8월 15일, 부르고뉴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한 뒤 60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로 향한다. 이 대담한 행위에 놀란 오를레앙 공작은 왕세자 이자보 왕비를 데리고 파리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8월 19일 쥐비시 인근에서 왕세자를 가로챘고,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과 그의 당파가 샤를 6세를 무시하고 착취했다고 주장하면서 행정, 사법, 재정 분야의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했다.

오를레앙 공작은 사치와 부패, 과도한 세금과 연이은 군사작전의 실패로 대중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부르고뉴 공작의 개혁을 지지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 역시 주요 정부 기관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나 동맹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파리고등법원은 부르고뉴 공작의 개혁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는 처음에는 팸플릿을 발행하면서 평화적인 선전전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없었고 결국 양측 모두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파리 시를 두고 대치한다. 하지만 아직은 양측 모두 내전을 시작할 배짱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10월 16일 두 공작은 평화 조약을 맺고 영원한 형제가 될 것을 맹세한 뒤 왕비와 부르봉 공작의 중재하에 협상을 시작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 보르도로의 해상을 통한 식량 공급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오를레앙 파벌의 보르도 공략 작전은 난항에 빠졌다. 거기에 파리 시에서 내분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은 보르도 포위를 포기하고 가스코뉴에서 회군한다.

웨일즈에도 맨앳암즈 800명, 쇠뇌수 600명, 보병 1200명과 포병대로 구성된 프랑스의 지원군이 상륙했다.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대포를 잃었지만 결국 연합군은 오랜 재정난으로 약화된 잉글랜드 주둔군을 물리치고 카마던을 점령했다. 하지만 퍼시 가문의 반란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압되고 프랑스 본국에서 내분이 벌어지는 등 악조건이 겹치면서 그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귀환한다.

3.5. 부르 포위전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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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년 5월,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선의 주요 요새 중 하나인 브랑돔을 점령했다. 파산 직전인 잉글랜드 정부는 결국 지원군을 보내지 못했다. 이에 가스코뉴인들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많은 요새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공작이 정부의 과도한 세금과 실패한 군사작전을 비난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는 지금 다시 대규모 원정을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오를레앙 파벌에 큰 부담이 되었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결국 프랑스 남서부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외면하지 못했다. 9월 18일 오를레앙 공작은 성 드니의 붉은 전투깃발 오리플람을 앞세우며 직접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스코뉴로 진군해 블레를 점령하고 부르를 포위한다.

동시에 부르고뉴 공작도 1만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생오메르에 주둔하면서 칼레 공략을 준비했다. 하지만 부르 포위전에서 예상 밖의 강한 저항에 직면한 오를레앙 공작이 북부 전선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면서 칼레 포위전은 1406년 11월 12일 갑자기 취소되었다. 이로써 부르고뉴 공작은 재정적 피해를 입은 데다가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

12월, 프랑스 함대가 생쥘리앵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에게 참패했다. 그 결과 부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해상을 통한 보급이 끊긴 채 겨울을 보내야 했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1월 포위를 풀고 철수한다. 그렇게 오를레앙 공작의 군사작전은 또다시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에게 수여되는 연금과 지원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파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은 그동안의 모든 좌절과 굴욕을 되새기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4. 프랑스의 내전 (1407~1415)

"평화 조약. 다시 평화 조약.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1409년 파리 고등법원 서기의 낙서

4.1. 오를레앙 암살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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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11월 23일 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파리 시의 거리에서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심복들과 파리의 프레보는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파리 프레보가 추밀원 회의에서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의 자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르고뉴 공작은 겁에 질린 채 베리 공작과 앙주 공작을 따로 불러내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하고는 영지인 플랑드르로 달아났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4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왕세자 헨리의 권한이 강화되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반면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끊임없이 계속된 국내외의 위기를 극복한 왕실과 정부의 노력이 칭찬을 받는 등 통합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4.2. 오텔 생폴 회의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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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12월 13일, 오를레앙 공작의 미망인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검은 말이 끄는 검은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탄 채 상복을 입은 대규모 수행단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 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모두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제 오를레앙 파벌에는 그들을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다. 베리 공작은 노쇠했고 앙주 공작은 지나치게 무능했으며 새로운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13살 어린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막대한 전비만 낭비한 채 실패로 끝난 가스코뉴 원정 이후로 오를레앙 공작에게 경멸 말고는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과 파리 시민들은 오히려 친족살해자인 부르고뉴 공작을 동정하고 있었다.

결국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부르고뉴 공작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하지만 정적들의 미온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은 부르고뉴 공작은 수많은 귀족들과 무장한 호위대를 대동한 채 당당하게 아미앵에 입성했다. 그리고 지난번 파리에서 겁에 질린 채 자백하며 도망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의 태도에 당황한 왕족들 앞에서 오를레앙 공작 살해는 정당하고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장 쁘띠를 비롯한 파리 대학의 저명한 신학 교수들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폭군이었으며 폭군 살해는 정당하다는 논리로 그를 변호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마자 부르고뉴 공작은 군사를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다. 파리 시가 부르고뉴 공작의 추종자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한때 부르고뉴 파벌의 주요 동맹이었으나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과의 불화로 얼마 전부터 오를레앙 파벌로 전향해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이자보 왕비의 요청으로 기병 1500기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다.

2월 28일, 결국 부르고뉴 공작이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국왕과 왕비가 불참하고 왕세자가 회의를 주재하는 가운데,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그리고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로 가득한 오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장 쁘띠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폭군이었으며 폭군 살해는 정당하다는 주장을 다시 반복한 뒤 구약과 신약, 로마법과 교부들의 저술,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보카치오에 이르는 고대와 현대의 수많은 작가들을 인용하며 4시간이 넘는 긴 연설을 했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았건 간에 청중들 중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고, 부르고뉴 공작은 심신미약인 샤를 6세를 찾아가 사면을 받는다.

3월 11일, 이자보 왕비와 왕세자는 브르타뉴 공작과 그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를 탈출했다. 그렇게 방해꾼을 모두 죽이거나 쫓아낸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 암살 사건을 지나치게 잘 수사한 파리 프레보를 해임하고 자신의 심복을 임명하는 등 느린 속도로나마 정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4.3. 오테여 전투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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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년 6월,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리에주 주교는 부르고뉴 공작의 주요 동맹인 에노 백작 기욤의 동생이었으므로 공작은 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려 오를레앙파는 샤를 6세를 파리에서 구출해 믈룅 성으로 데려왔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내려졌던 국왕의 사면을 취소하는 동시에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9월 23일, 부르고뉴 공작과 에노 백작은 오테여 전투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용맹공이라는 별명과 함께 군사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소모된 전비의 3배인 12만 리브르를 배상금으로 받았으며 저지대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오테여 전투의 소문은 파리 시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고,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를레앙파는 부르고뉴 공작이 곧 파리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저항의지를 상실하고 11월 16일 투르 성으로 후퇴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은 11월 28일 파리 시에 다시 입성했고,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복수의 희망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2월 4일 사망한다.

4.4. 부르고뉴의 승리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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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샤를 6세의 상서인 장 드 몬테규는 오를레앙 파벌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서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개인적인 증오를 받고 있었다. 아마도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부르고뉴 공작을 이길 가망이 없으며 지금 오를레앙파의 지도부는 전쟁을 벌일 배짱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몬테규는 필사적으로 두 파벌의 화해를 주선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1409년 3월부터 부르고뉴 공작은 국왕의 사면을 받고 정부의 주요 관직들을 배정받는 대가로 전대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하고 파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하지만 추밀원과 재무부를 비롯해 정부 요직은 여전히 오를레앙 파벌에 장악돼 있었다. 이들의 방해 때문에 이후로도 막대한 빚을 지며 재정난에 시달리던 부르고뉴 공작은 결국 정부를 공포로 장악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파리 프레보를 시켜 장 드 몬테규를 체포한 뒤, 전대 오를레앙 공작과 함께 샤를 6세의 병을 흑마법으로 악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하게 했다. 몬테규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형식적인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월 17일, 세금을 낭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고문 때문에 한 거짓 자백이라는 솔직한 연설을 한 뒤 참수형을 당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여세를 몰아서 재무부의 고위 관료들을 전부 숙청했다. 그런 다음 프랑스 전역에 조사관을 파견해 바이이부터 프레보까지 모든 지방관들의 회계 장부를 검사하고 부정을 발견해서 해임한 뒤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했다. 마침내 부르고뉴 공작은 전대 오를레앙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 수입을 독점할 수 있었다.

11월, 부르고뉴 공작은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의 권한을 왕세자 루이에게 양도한 뒤 자신의 손에 넘기게 했다. 그렇게 해서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 파벌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고 정부를 장악했다.

4.5. 비세트르 조약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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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년 4월,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아르마냑 백작의 딸과 결혼해 반 부르고뉴 동맹을 결성했다. 얼마 뒤 이들은 아르마냑파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아르마냑파는 곧바로 군대를 소집해 파리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푸아티에 전투 이후 벌어졌던 내전의 비참한 결과를 기억하는 노인 세대의 반대, 브르타뉴 공작의 이탈, 그리고 정부를 장악한 부르고뉴 공작에 의해 연금과 지원금이 끊기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9월 중순, 아르마냑파는 어떻게든 1만이 넘는 대군을 소집해 파리 시 인근까지 진격하지만 부르고뉴군의 센 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편 부르고뉴 공작 역시 행정 개혁과 감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권력을 장악했으므로 집권 초기부터 오랜 시간과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는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결국 11월 2일 비세트르에서 또다시 이름뿐인 화해와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4.6. 생클루 전투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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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년 1월,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이자 전대 오를레앙 공작 암살의 공범인 장 드 크루아를 납치해 고문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이에 격노하며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의 굴욕에서 교훈은 얻은 아르마냑파는 먼저 소수의 병력을 센 강 북쪽으로 보내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동시에 플랑드르에 있는 부르고뉴 공작과 파리 시의 부르고뉴파 사이의 연락을 차단했다. 아르마냑파의 후속 병력이 도착해서 파리 시 인근의 주요 도로들을 점령했고, 결국 8월 초, 1만 이상의 기병으로 구성된 아르마냑파의 주력군이 센 강을 건넜다.

한편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 모두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서 동맹을 요청하고 있었다. 헨리 4세는 부르고뉴 공작이 친족살해자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왕세자 헨리는 아버지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룬델 백작이 이끄는 2000명 이상의 지원군을 부르고뉴측에 파견한다.

9월 초, 두에에 2만 이상의 부르고뉴군이 집결했다. 아르마냑파는 그사이 파리 시를 점령하려 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북쪽에서 진군해온 부르고뉴 주력군이 센 강의 요충지인 생클루 다리를 탈환하자 사기가 떨어진 아르마냑파는 저항을 포기하고 다시 센 강 남쪽으로 후퇴한다.

11월 3일, 부르고뉴파의 성직자들이 파리 시에 모여 오를레앙 공작과 아르마냑 파벌은 무법자로서 파문당했다고 선언했다. 생클루 전투에서의 패배와 무질서한 후퇴로 아르마냑파의 기세가 꺾인 사이 부르고뉴군은 에탕프를 비롯해 센 강 남쪽의 주요 도시들과 요새들을 점령한다.

4.7. 부르주 포위전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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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해진 아르마냑파는 가스코뉴와 인근 지역들에서 상당한 영토를 양도하는 대가로 잉글랜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1412년 5월 외교 사절단이 부르고뉴파의 감시를 뚫고 런던에 도착했고 헨리 4세는 즉시 조약을 체결한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공작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소집해 부르주로 진군했다. 하지만 베리 공작은 경험 많은 참모들의 조언하에 도시를 잘 방어했다. 7월이 되자 포위군 진영에 전염병이 퍼져서 많은 인명 손실을 입었고, 잉글랜드의 지원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부르고뉴 공작은 베리 공작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결국 8월 22일, 오를레앙 공작이 잉글랜드와 맺은 조약을 무효화하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부르주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오세르에서 또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4.8. 뷔장세 조약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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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클래런스 공작은 그대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조약에 구속되지 않는 알랑송 백작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브르타뉴군과 합류해 알랑송과 페르슈의 부르고뉴파 요새들을 점령한 뒤, 다시 잉글랜드군만 이끌고 메인과 앙주를 통과하며 약탈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아르 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아르마냑파의 세 공작들에게 조약의 이행을 요구했다. 아르마냑파는 일단 협상을 준비하면서도 협상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군사를 소집했다.

9월 16일, 클래런스 공작과 잉글랜드군이 블루아 시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오를레앙 공작과 베리 공작이 협상을 위해 보낸 전령들 앞에서 그런 고귀한 혈통의 왕족들이 약속을 어긴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훈계하고는 배상금 20만 에퀴를 요구했다. 그리고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푸아투로 행군하며 아르마냑파의 마을과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인들이 거만한 태도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프랑스 영토를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에 현지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소문은 파리 시까지 퍼져나갔다.

11월 14일, 아르마냑파의 공작들은 귀족 7명을 인질로 넘기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클래런스 공작은 추가 배상금 6만 에퀴를 요구하며 약탈을 계속했다. 공작은 기어이 돈을 받아내고서야 만족하고 가스코뉴 방향으로 퇴각해 12월 11일 보르도에 도착했다. 지휘관의 명령이 내려지자 바로 약탈을 그만두고 행군을 시작하는 잉글랜드군의 엄정한 규율에 프랑스인들은 또다시 놀랐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는 아르마냑파와의 조약에서 약속받은 영토를 얻지 못했고, 지불받은 배상금은 원정에 소모된 전비를 보충하기에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 원정을 통해 잉글랜드군은 내전으로 분열된 프랑스 영토를 가로지르며 그들의 취약성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왕세자 루이는 파문된 무법자로서 방치돼 있었던 장 드 몽테규의 시신을 부르고뉴 공작과 상의 없이 매장했다. 이는 왕세자이자 국왕 대리인으로서 아르마냑파를 포용하는 동시에 장인인 부르고뉴 공작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신호였다.

4.9. 박피단의 난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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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 1월,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삼부회를 소집해 정부를 개혁하고 잉글랜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촉구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북부 프랑스 도시 대표들로 채워진 삼부회는 부유한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정부의 부패와 귀족들의 재정적 착취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파의 정책과 개혁의 방향성이 명확해지면서 부르고뉴 공작은 상류층 시민들과 대귀족들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3월, 왕세자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은 뒤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인 장 드 베이를 상서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뱅센에서 열릴 예정인 토너먼트를 구실로 샤를 6세를 파리에서 탈출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부르고뉴파 기사들과 정치 조폭들, 그리고 급진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폭도 수천 명이 그레브 광장에 모여 왕세자의 측근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왕세자의 저택에 들이닥쳐 측근 몇 명을 납치했다. 그런 뒤에도 멈추지 않고 반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파리 시의 부유한 시민들과 귀족들 사이에 공포를 뿌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당파의 상징으로 하얀 색 두건을 맞춰 입으며 세력을 과시했고, 부르고뉴파의 주요 지지 세력인 파리 시 도축업자 조합과 그들의 대장인 시몽 카보슈의 이름을 따서 카보쉬앵이라고도 불렸다.

5월, 박피단의 위세는 일명 카보쉬앵 칙령이라 불리는 법령과 함께 정부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통제에서 벗어난 박피단은 왕세자의 파벌과 부유한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고 왕세자의 측근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부르고뉴파는 파리 유력자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상실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전통적인 지지 세력인 파리 대학마저 박피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4세가 사망하고 왕세자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 박피단의 난으로 프랑스 정부가 사실상 마비된 동안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국경에서 공세를 시작해 많은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7월, 부르고뉴파가 내분에 빠졌음을 알게 된 아르마냑파는 군대를 소집해 파리로 진격했다. 상거래가 마비되면서 생업에 지장을 받는 등 박피단의 공포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파리 시민들의 지원으로 왕세자 루이와 아르마냑파는 박피단을 진압하고 파리를 탈환했고, 결국 8월 23일,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를 탈출해 플랑드르로 도망친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아르마냑파로 지나치게 기우는 것을 우려한 왕세자는 곧바로 아르마냑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기회로 왕세자 루이는 아르마냑파 반역자들의 인질로서 이용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지 세력을 결집한다.

4.10. 파리 포위전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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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년 1월, 결국 왕세자 루이가 부르고뉴 공작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아르마냑파는 왕세자의 측근 몇 명을 체포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파를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하지만,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한다. 이 실패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부르고뉴 공작이 명분으로 내건 왕세자의 편지 역시 진위를 의심받기 시작했다.

4월,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피카르디에서 부르고뉴파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부르고뉴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뒤, 일부는 부르고뉴로 행군하고 주력군은 아르투아로 향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동생인 느베르 백작 필리프가 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아르마냑파에 항복하는 등 부르고뉴파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절박해진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많은 영토를 양도하는 대가로 동맹과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마도 부르고뉴파가 아르마냑파의 군대를 물리친 뒤 곧 성인이 되는 왕세자까지 제압하고 다시 정부를 장악할 가능성에 의심을 품었을 헨리 5세는 내전의 진행을 더 지켜보기로 결정한다.

4.11. 아라스 포위전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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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아라스를 포위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왕세자 루이는 아르마냑파를 견제하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9월 4일 잉글랜드와의 동맹 협상을 그만두는 대가로 부르고뉴 공작을 사면하고 침공을 중단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진다.

10월, 아르마냑파는 다시 잉글랜드에 동맹을 제안했다. 아르마냑파의 세 공작들은 브레티니 조약에서 합의된 옛 잉글랜드 영토를 복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헨리 5세와 의회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 영토들의 주권을 양도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결국 외교 협상만으로는 대륙 영토를 되찾을 희망이 없음을 확인한 헨리 5세는 추밀원 회의에서 프랑스를 침공해 영토를 돌려받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한편 파리에서는 샤를 6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왕세자 루이가 이를 명분으로 국왕 대리인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아르마냑파는 왕세자를 납치해 감금하고는 아라스 조약에서 합의된 사면 대상 중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 일부를 제외하는 칙령을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당연히 격노했지만,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했음이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르마냑파와 타협하고 칙령을 인정했다.

4.12. 왕세자의 역습 (1415)

파일:Louis_de_Guyenne,_dauphin_of_France.jpg

1415년 3월 10일, 헨리 5세는 의회에서 프랑스 침공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공격 목표가 가스코뉴인지 북부 프랑스인지는 의원들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다.

4월, 모두의 관심이 잉글랜드에 집중된 사이, 왕세자 루이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파리 시와 주요 정부 직위들을 장악했다. 아르마냑파 지도부가 믈룅 성에서 대책 회의를 하는 동안 왕세자 혼자 몰래 빠져나와 파리로 돌아왔고,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바스티유 요새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브르타뉴 군대를 입성시켜 파리 시의 요충지들을 점령한 것이다.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고 왕세자의 측근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아르마냑파를 숙청한 왕세자는 아내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냉대하고 파리 시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자신이 부르고뉴파의 통제에서도 벗어났음을 알렸다. 모욕을 당한 부르고뉴 공작은 비록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했지만 정치적 양보 없이는 왕세자의 통치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 프랑스의 외교 사절단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헨리 5세는 가스코뉴의 주권을 요구했지만 사절단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고, 결국 헨리는 왕세자 루이의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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