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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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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성주군
사망 1964년 12월 8일
직업 독립운동가, 언론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4. 평론/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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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언론인. 2006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아버지 운홍과 어머니 유윤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2년 성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조선총독보 토지조사국 기수로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1914년 토지조사국 기수직을 사임한 후 1915년 성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채용되어 4년간 교사로서 근무하게 된다.[출처]

1919년 3.1 운동 이후 교사직을 사임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니혼대학에 입학하여 1923년에 졸업하였다. 1923년 귀국한 후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고 조선일보에 '사회변혁과 사상적 고찰'을 발표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를 퇴사한 후 화요회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가입 후 그는 공산주의와 관련한 여러 편의 책과 논평을 내었으며 대표적 이론가로서 활동으 하게 되었다. 1925년에는 동아일보 경제논문 현상모집에 공모해 당선되었고 공산주의 서적들을 번역-출간하였다.[출처]

1926년 박일병의 권유를 받은 그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셩부 제1야체이카에 소속된 뒤 정우회 프랙션으로 활동한다. 이 무렵 그는 강연과 집필활동을 통해 반제연합전선전술을 소개하고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을 설파하였다. 같은 해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출처]

1928년 9월 출옥한 그는 조선일보의 경제부장이 되었고 1931년에는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중앙일보로 이직하여 경제부장과 정치부장이 되었다. 이 시절 그는 사장이었던 노정일의 친일행위를 비판하고 반대운동을 벌였다. 1932년부터 그는 정치부장에 이어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배성룡은 경제 평론가로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의열단의 국내 연락책으로도 활동하였다. 이후 1936년에 절필하고 성북동 자택에서 은둔하였다.[출처]

광복 후 1945년 9월에 그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각당통일기성회 등의 조직에 참여해 정당통일운동을 벌였다. 1946년에는 신탁통치로 갈등이 심해지자 이를 중재하기 위한 통일정권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촉성회를 조직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47년 2월 민주주의독립전선 조직에 구화요계 인사들과 참여하였다.[출처]

이 시절 그는 광복 이후 '신형민주주의'라는 신국가 건설이념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사회주의의 평등성을 조화하는 성격을 지닌 체제였다.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한 사실상의 사회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는 이념이다.[출처]

그 해 10월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고 정강정책기 초위원·전형위원·중앙집행위원·중앙상무집행위원·선전부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4월에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선언에 참여하고, 곧이어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출처] 하지만 북한과 김일성 세력 역시 통일에 결한다고 언급하며 북한 정권이 통일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파악하고 대한민국에 남았다.

남북협상이 끝난 후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6·25전쟁 발발 시 서울에 남아있다가 북한의 모시기 작전[8]을 사전에 알고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 머물면서 서울대, 단국대, 이화여대의 대학 강사,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내면서 사상계 등에 경제 평론을 기고하는 등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다 1957년 침을 맞은 곳이 잘못되어 반신불수가 된 후 1964년 12월 8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였다.[출처]

3. 여담

  • 경제 평론가 및 경제 학자로 활동했지만 출판사 경영 외엔 이재활동에 관심이 없어 아내가 산파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한다.
  • 평소 자립경제 밎 사민주의를 주장하였고, 외세의 개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60년대 초반 경제개발 초기 한국경제는 여건이 부족해 내자유치를 통한 경제개발이 어려웠고 일본에 대일청구권을 요구하고 서독 등지에서 차관도입, 광부 및 간호사 파견, 베트남 전쟁 참전 등 외화유치 및 수출주도형 경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3저호황 및 올림픽 유치를 이룬 80년대 들어서야 자립경제를 실현할 여건을 마련하였다.
  • 생전 많은 책을 읽었고, 책읽는 시간을 더 내고자 샤워, 목욕 대신 냉수마찰을 하였다한다. 평생 쓰고 모은 두 트럭 분의 책과 미발표 원고는 단국대학교에 2백만원에 팔렸으나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

4. 평론/저술

  • 조선경제론 (문화사 1926)
  • 귀농운동의 의의 (1931)
  • 식민지문제의 기본지식 (공생사서점 1931)
  • 조선경제의 현재와 장래 (한성도서주식회사 1933)
  • 자주조선의 지향 (광문사 1949)
[출처]


[출처] 배성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출처] [출처] [출처] [출처] [출처] [8] 북한 점령하 서울에 남아있던 인사들을 대한민국의 서울 탈환 직전 납북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출처]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