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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방철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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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e55> 출생 | 1936년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정치인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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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2. 생애
1968년, 중앙위원회 대남사업부 과장을 지냈다. 1970년, 소장 계급장을 달고 해군 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73년 5월, 해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74년 10월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군사대표단장으로 알제리 혁명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1975년 2월, 군사대표단장으로 유고슬라비아에 다녀왔다. 1977년 3월, 지병학 장의위원, 1979년 12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정무원 륙해운부장에 임명되었으나 1년도 안되어 해임되고 오성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모종의 혐의로 견장만 뜯긴 채 요덕수용소에 가족 전체가 구속 수감되었고 1989년 석방되어 요덕군 도시경영사업소 창고장을 지내다가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복권되었다. 태영호의 아내 오혜선은 평양외국어학원 재학 시절 친구였던 방철갑의 딸 방희순이 온 가족들과 함께 실종된 것을 기억한다고 회고록에 썼다.
요덕수용소 수감 당시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일가도 수감되어 있었는데, 키가 작고 일을 잘 못할 거 같다는 작업반장의 판단으로 한달 간 옥수수밭 경비하는 일에 배치되어 경비일을 하게 되었고 방철갑은 수감 기간 동안 온갖 폭행과 따돌림, 강제노동 등으로 영양실조 위기가 닥치자 옛 지위도 있고 처지를 딱하게 여긴 작업반장과 보위원의 판단으로 같은 옥수수밭 경비에 배치됐는데 방철갑은 강 기자와 같은 경비일을 하고 지내며 군복무 시절 이야기와 잠수함부대의 남조선 침투 이야기 등 온갖 무용담을 이야기해주며 지냈고 강 기자에게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강철환 기자의 이야기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고위군관으로 재직하던 친동생인 방철호로 인해 수용소 경비병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했고 수감 초기에 폭행, 따돌림, 강제노동이 있었지만 후반에는 작업반장과 보위원들도 그의 후환이 두려워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1989년 석방 후 탈북 의사를 밝혀 국가정보원에서 정보원을 보내 그의 탈북작전을 시행하려고 하여 정보원이 포섭한 정보원을 보내 찾아가 탈북을 제의했지만 제의를 거절했고 오히려 정보원을 보위부에 신고하여 탈북 작전은 실패했던 일이 있다. 출처
그러한 탈북 관련 사건이 있고 나서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다시 승진하였고,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복권되어 2006년 6월 25일 6.25 기념행사 등 여러 행사에서 주석단 연설멤버로 등장하였다. 이 사람의 인생은 정말로 곡절많은 인생이다.
하지만 2007년 이후로 다시 동정이 끊긴 것을 봐서는 운이 좋아야 은퇴고 재수없으면 김정일에게 재숙청당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