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맹두(朴孟斗) |
일본식 성명 | 新井孟斗 |
본관 | 밀양 박씨 |
생몰 | 1926년 7월 19일 ~ 1943년 1월 23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통영군 동부면 다포리 (현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 |
사망지 | 인천소년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맹두는 1926년 7월 19일 경상남도 통영군 동부면(현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에서 부친 박삼준(朴三俊)과 모친 윤소선(尹小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 이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정량리(현 통영시 정량동)으로 이주했으며, 1929년 1월 4일 이 곳에 본적을 두었다. 1966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박매동의 동생인 박봉규의 증언에 따르면, 박맹두는 부친으로부터 일본인들의 만행과 독립운동,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들으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고 한다.그는 1941년 통영제일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말 경남 통영군 통영면 온망조합에 취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온망조합 창고 벽에 큰 먹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였다가 잠복 순찰 중이던 한국인 고등계 한사 변모와 박모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이전에도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벽보를 만들어 밤을 이용해 거리에 손수 써 붙이는 한편,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본받자는 등의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이후 1942년 3월 20일 마산지검 충무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부산지방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 이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1월 23일 오전 4시경 옥사했다. 그의 유골은 화장된 뒤 정량리 뒷산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박맹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