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21:41:54

미하일 아탈리아티스

이름 미하일 아탈리아티스
(영어: Michael Attaleiates, 그리스어: Μιχαήλ Άτταλειάτις)
출생 1020년대 초
사망 1080년경
직위 법관

1. 개요2. 행적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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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법관, 역사가. 1034년부터 1079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룬 <역사>를 집필했다.

2. 행적

1020년대 초 팜필리아의 아탈리아(오늘날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출생해 1030년에서 1040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법관으로 임용된 뒤 여러 재판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선보여 명성을 쌓았고, 나중에 원로원 의원으로 발탁되었고 미하일 7세 로마노스 4세로부터 파트리키오스 및 안티파토스(Anthypatos)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066년 미하일 프셀로스 의장이 관장하는 원로원 재판에 법관으로 참석해 반란을 도모한 혐의로 체포된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하지만 1067년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쳐들어와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유능한 지휘관으로 여겨지던 로마노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고, 어린 황제 미하일 7세 섭정을 맡고 있던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가 흔들리는 입지를 강화하고자 로마노스를 사면시킨 뒤 12월에 로마노스와 결혼하고 공동 황제 로마노스 4세로 등극시켰다.

1069년, 로마노스 4세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와 카파도키아와 케사리아 인근을 침략한 튀르크인들을 격퇴한 뒤 유프라테스 강변에 이르러 작전 회의를 열었다. 대다수의 군인과 관료들은 강을 도하해 폐허가 된 옛 영토를 수복하고 재건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아탈리아티스는 이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한 지역을 포기하고 유프라테스 강의 방비를 굳힐 것을 주장했다. 로마노스 4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아탈리아티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여론에 떠밀려 결정을 번복하고 강을 건넜다. 그러면서도 전투는 가급적 피하려 했고, 그 사이에 튀르크인들이 본대를 회피해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격해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가 이끄는 후위대를 격파하고 이코니온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1072년에서 1074년 사이에 미하일 7세의 요청에 따라 레온 6세가 공포한 법령인 <바실리카>를 기반으로 한 <포네마 노미콘(Ponema Nomikon)>이라는 이름의 법전을 발간했다. 이후 공직 활동을 하면서 벌어들인 재산의 상당 부분을 마르마라 해 북부 해안의 라이데스토스(오늘날 튀르키에 테키르다그)에 수도원을 세우는 데 바쳤다. 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파노익티르몬 성당에 인접한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1070년대 중반에 <가난한 집과 수도원을 위한 조례>를 집필했다. 디아탁시스(Diataxis)로 알려진 이 작품은 11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회, 경제, 문화, 종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를 제공한다. 또한 이 사료를 통해, 후대 학자들은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라이데스토스, 셀림브리아(오늘날 튀르키예 실리브리)에 상당한 토지와 저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정치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고 저서 <역사>를 집필했는데, <역사> 말미에 1078년에 즉위한 황제 니키포로스 3세에게 찬사를 보내며 자신의 저서를 바친다고 밝혔다. 1081년 정변을 일으켜 니키포로스 3세를 몰아낸 알렉시오스 1세에게 헌정한다는 내용이 새로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볼 때, 콤니노스 왕조가 시작되기 직전인 1080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유해는 아들 테오도로스, 아내 이리니, 며느리 소피아의 유해와 함께 키프로스 섬의 성 요르요스 성당 부지에 안장되었다.

3. <역사>

아탈리아티스의 <역사>는 1034년부터 1079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정치, 군사 방면의 변혁을 다뤘다. 그는 첫번째 문단에서 독자들에게 전쟁과 전투, 승리와 패배, 군사적 성취와 실패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각 사건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제공하며 매번 인간의 행동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가 정점을 찍었던 제국의 영광이 갈수록 퇴색되어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로마 공화국의 영광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당시의 군사적, 역사적 사실과 그때의 일을 비교하며 동시대 인사들의 무능을 규탄했다. 그러면서도 로마 공화국 시대의 영웅들의 도덕성과 애국심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국난에 처한 제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을 배양하길 희망했다. 한편, 그는 당대의 어려운 상황을 성찰하고 과거의 역사와 비교해 불확실한 미래를 계획하는 방식을 모색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테오도라 여제가 제국을 잘 이끌었다고 칭찬했고, 자신을 비교적 중용했던 로마노스 4세에 대해 국난에 빠진 제국을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바쳐 헌신했지만 수많은 배신으로 인해 몰락해버린 비운의 군주로 호평했다. 반면 미하일 7세는 우유부단하고 능력이 없어서 제국을 쇠락으로 몰고 갔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가 가장 찬양한 이는 미하일 7세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른 니키포로스 3세였으며, 니키포로스 3세 치세 때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활약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 대해서도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