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17:36:53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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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Michał Korybut Wiśniowiecki
파일:5-Portret_Michała_Korybuta_Wiśniowieckiego.jpg
이름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Michał Korybut Wiśniowiecki)
출생 1640년 5월 31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비아위 카미엔[1]
사망 1673년 11월 10일 (33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르부프
재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
1669년 6월 19일~ 1673년 11월 10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라[2] (1670년 결혼)
아버지 예레미 비시니오비에츠키
어머니 그리젤다 자모이스카
서명
파일: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서명.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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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 루테니아계 비시니오비에츠키 가문(Wiśniowiecki)[3] 출신으로 부친 예레미 비시니오비에츠키(Jeremi Wiśniowiecki)의 공적에 힘입어 선출되었으나 4년 만에 사망했다.

2. 생애

1640년 5월 31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비아위 카미엔에서 루테니아 주지사 예레미 비시니오비에츠키와 크라쿠프의 성주(Starosta) 토마시 자모이스키(Tomasz Zamoyski)의 딸인 그리젤다 자모이스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한 지 몇주 만에 자모시치로 보내져 1642년까지 외할머니 카타지나 자모이스카의 집에서 자랐고, 나중에는 우브니에[4]와 프시우카[5]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러다 1648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동방으로 보내져 볼히니아의 자모시치 요새에서 기거했다.

아버지 예레미 비시니오비에츠키는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치세 때 스몰렌스크를 사이에 두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동방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대규모 영지를 경영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 카자크를 선동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특히 1651년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코사크- 크림 칸국 연합군을 상대로 맞붙었을 때 좌익의 기병대를 이끌고 대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해 8월 20일 파보워치[6]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던 중 갑작스런 질환으로 인해 사망했다.

당시엔 비시니오비에츠키 가문의 재산이 대부분 러시아 및 코사크의 수중에 넘어가거나 파괴되었기에, 그는 별다른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브로츠와프 주교 및 프워츠크 공작 카롤 페르디난트 바사(Karol Ferdynand Vasa)의 보호를 받았고, 예수회로부터 교육받았다. 1655년 5월 9일 카롤 페르디난트 바사가 사망한 뒤에는 산도미에시(Sandomierz)의 주지사인 얀 소비에판 자모이스키(Jan Sobiepan Zamoyski)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궁정에 들어가 관원으로 일하면서, 아버지의 공적을 잊지 않았던 국왕의 호의를 샀다. 대홍수 시기에 얀 2세와 함께 오폴레-라치부시 공국(Księstwo opolsko-raciborskie)의 그워그벡 성(Zamek w Głogówku)으로 피신했다.

1655년 11월 18일 국왕의 지시에 따라 오스트리아령 나이세(Neisse)[7]로 가서 예수회가 설립한 카롤리눔 대학에서 1656년 3월까지 머물며 학업에 전념했으며, 1656년 얀 2세의 왕비 마리 루이즈 곤차가의 지원에 힘입어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에 유학했다. 이후 드레스덴과 빈 궁정에 잇따라 들렀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왕비인 엘레오노라 곤차가의 호의를 산 덕분에 제국군 대령에 선임되었고, 나중에는 헝가리 왕실 관리에 선임되었다. 이렇듯 해외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다양한 언어를 익혔다. 기록에 따르면, 라틴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타타르어, 튀르크어, 루테니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언어들 중 완벽하게 익힌 건 없었다고 한다.

1663년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얀 2세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 참여했고, 1665~1666년 예지 루보미르스키(Jerzy Sebastian Lubomirski)의 반란 때 얀 2세의 편에 섰다. 그러나 얀 2세는 루보미르스키에게 패배해 실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경원시되는 상황에 깊은 환멸을 느낀 끝에 1668년 9월 16일에 퇴위를 선언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후 헤움노(Chełmno) 주교이자 국왕 부총리 안제이 올쇼프스키(Andrzej Olszowski)는 가난하고 국정 경험이 부족한 미하우가 귀족들의 특권에 별다른 위협을 주지 않을 거라 여기고 차기 국왕으로 내세웠다.

미하우는 1669년 6월 19일 선거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국적의 후보자가 4명이나 있었지만, 대홍수 이후 외국인들에게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던 귀족들은 그를 피아스트의 후손으로 간주하고 대거 투표했다. 그는 7월 6일에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겠다고 선서한 뒤 9월 29일 크라쿠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니에즈노 주교이자 폴란드 추기경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Mikołaj Jan Prażmowski)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소비에스키를 포함한 친 프랑스파 대귀족들은 그를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여기고 음모를 꾸몄다. 1670년 2월 27일, 미하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야스나 구라(Jasna Góra)에서 열렸지만, 폴란드 추기경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가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교황 특사 갈레아초 마레스코티(Galeazzo Marescotti)가 주례를 대신 맡았다.

미하우의 등극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은 롱그빌 공작 샤를 파리 도를레앙(Charles-Paris d'Orléans-Longueville)을 적합한 국왕으로 내세웠고, 왕실 서기인 얀 비엘로폴스키(Jan Wielopolski)는 저속한 반 왕실 풍자문을 집필해 전국에 유포시켰다. 미하우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대 세력의 대표자인 얀 소비에스키를 세임 재판에 회부하려 하자, 소비에스키와 추종자들은 트렘보블라[8] 인근에서 연맹을 결성하고 사병을 동원했다. 이로 인해 내란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얀 소비에스키에 대한 세임 재판을 포기했다. 이후에도 상호간의 갈등은 이어졌다. 1671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세임은 얀 소비에스키에 대한 국방비 지원을 거부했고, 미하우는 얀 소비에스키의 명령을 무시하고 볼히니아를 제멋대로 떠나버린 스타니스와프 비지츠키(Stanisław Wyżycki)의 연대에 겨울 숙영지를 제공하고 체불된 임금을 일부 지불하는 등 얀 소비에스키를 견제했다.

1672년,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또다른 내전이 일어났다. 미하우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서부 고웜프[9]에 집결한 뒤 연맹(Konfederacja)을 결성하고, 미하우를 적대하던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의 모든 직위를 박탈했으며, 얀 소비에스키와 그의 친척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여기에 일부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코브린[10]에서 연맹을 결성해 고웜프 연맹을 지원했다. 얀 소비에스키는 이에 맞서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소집한 뒤 미코와이 프라즈모프스키 등과 함께 슈체브제신(Szczebrzeszyn) 연맹을 설립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양자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려 하자, 교황 특사 프란체스코 본비시(Francesco Buonvisi)와 크라쿠프 주교 안제이 트셰비츠키(Andrzej Trzebicki)가 중재에 나섰지만, 양자가 자기들의 입장을 고집하던 터라 화해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1672년 6월,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4세가 지휘하는 10만 대군이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 요새를 포위했다. 수비대는 2달간 끈질기게 버텼지만 원군이 좀처럼 오지 않자 결국 그 해 8월 26일에 항복했다. 뒤이어 르부프도 포위된 지 10일만에 함락되었고, 타타르 출신 별동대는 흐루비에슈프(Hrubieszów), 야스워(Jasło) 일대를 약탈했다. 급기야 타타르군이 미하우가 머물고 있고 민병대가 집결하고 있던 고웜프로 접근하자, 상원 의원들은 크게 놀라 얀 소비에스키에게 이들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1672년 10월, 얀 소비에스키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출진해 니에미루프[11]에서 타타르군을 격파했고, 뒤이어 코마르노 전투와 페트란카 전투에서 2개의 타타르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병력 모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폴란드 국내로 곧 들이닥칠 오스만 제국의 12만 대군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결국 1672년 10월 16일 또는 18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메흐메트 4세와 부차치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포돌리아주(Województwo podolskie), 브라츠와프주(Województwo bracławskie) 및 우안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 넘기고, 매년 22,000 탈러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 협약 소식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는 것에 깊은 굴욕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서로 간의 갈등을 접어두고 오스만 제국에 힘을 합쳐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1673년 3월, 고웜프 연맹과 슈체브제신 연맹 인사들이 바르샤바에서 화해와 평온을 위한 세임을 연 뒤 서로 화해하고 부차치 조약 비준을 거부하며, 군대를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전쟁을 치르기 위한 특별세를 거두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교황청이 보낸 자금을 포병 육성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외교관들이 코사크 원수국을 찾아가 오스만 제국의 봉신인 크림 칸국을 공격해주면 크게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페트로 도로셴코가 이끄는 코사크가 크림 반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고, 크림 칸국의 칸 셀림 1세 기라이는 피해 복구에 힘을 써야 했던 터라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지 못했다.

1673년 10월 8일, 미하우는 스크바자바[12] 인근 숙영지에서 40,000명의 군대와 대포 50문을 시찰했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얀 소비에스키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후세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 35,000명과 대포 120문이 이에 맞서기 위해 드네스트르강변에 세워진 호침 요새에 집결하자[13], 얀 소비에스키는 오스만군이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점을 이용해 일부러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던 11월 초 호침 요새를 급습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11월 11일 새벽,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요새를 향해 대포를 일제히 사격해 성벽을 부쉈다.

이후 얀 소비에스키가 친히 보병과 용기병을 이끌고 허물어진 성벽으로 돌진했다. 오스만군은 시파히를 파견해 역공을 가하려 했지만, 그들이 윙드 후사르에게 궤멸되면서 무위에 그쳤다. 이윽고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요새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자, 오스만군은 극심한 공황에 빠져 드네스트르강 건너편 강둑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다리가 허물어졌다. 35,000명의 병사들 중 불과 수천 명만이 간신히 탈출해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에 도착했고, 나머지 장병들은 죽거나 생포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미했을 것이다.

얀 소비에스키는 호침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뒤 여세를 이어가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군해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장악에 성공했다. 여기에 왈라키아인들도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폴란드-리투아니아 편에 섰다. 그러나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미하우가 1673년 11월 10일에 르부프의 궁전에서 위장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1674년 5월 19일, 호침 전투의 영웅 얀 소비에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로서 선출되었다. 미하우의 유해는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바르샤바의 카말돌리회 수도원에 인정되었으며, 내장은 르부프의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 가정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우크라이나 서부 빌리 카민(Білий Камінь) [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차녀로 미하우의 사후 로렌 공작 샤를 5세와 재혼했다. 프란츠 1세의 할머니. [3] 우크라이나어로는 비시네베츠키(Вишневе́цькі).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으로 진출하여 정착지를 건설하고 식민화한 대영주 가문이었다. [4] Łubnie. 현 우크라이나 북동부 루브니(Лубни). [5] Przyłuka. 현 우크라이나 중서부 스타라 프릴루카(Стара Прилука). [6] Pawołocz. 현 우크라이나 중부 파볼로치(Паволоч). [7] 현 폴란드 남서부 오폴레주 니사군 니사(Nysa). [8] Trembowla. 현 우크라이나 서부 테레보울랴(Теребовля). [9] Gołąb. 고웜프라는 지명이 여러 곳이 있는데, 이 고웜프는 현 폴란드 루블린주 서부 푸와비군의 고웜프이다. [10] Kobryń. 현 벨라루스 남서부 코브린(Кобрин). [11] Niemirów. 현 우크라이나 서부 네미리우(Немирів). [12] Skwarzawa. 현 우크라이나 서부 스크바랴바(Скварява). [13] 이곳은 반세기전 1621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국운을 걸고 오스만 대군을 막아선 곳이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병중에 군무를 맡다가 병사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강화 후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