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5:04

미로슬라프 클로제/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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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축구선수였던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클럽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다.

2. 유소년 시절

축구선수였던 독일계 아버지와 핸드볼 선수였던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현 실롱스크(독일명 슐레지엔) 지역 오폴레(독일명 오펠른)에서 태어났다.[1][2] 하지만 폴란드에서 태어나기만 했지, 아래에 나와 있듯이 태어나자마자 그의 가족은 곧바로 프랑스 부르고뉴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은 슐레지엔 땅을 강제로 독일에서 폴란드로 넘겼다. 슐레지엔에 거주하던 독일인들 다수는 연합국의 독일인 강제 이주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 독일 본토로 이주했고, 클로제의 집안과 일가 친척들 역시 대부분 고향을 떠나 서독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클로제의 할아버지는 생업 등의 이유 때문에 다른 일가족들과 떨어져 슐레지엔/실롱스크에 남았다. 하지만 대신 기존 독일 국적은 박탈되었고 폴란드 국적으로 변경해야 했다. 물론 독일에서는 슐레지엔을 비롯하여 이렇게 빼앗긴 재외 영토 국민들에게 'German Citizenship Through Descent'의 형식으로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계속 독일 국적을 부여했다.[3] 클로제 역시 독일의 이 법령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폴란드 시민권과 독일 시민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18세 때 클로제는 폴란드 시민권을 포기했다.

클로제의 부친인 요제프 클로제(Josef Klose)[4]는 축구선수였는데, 커리어 초반에서는 폴란드의 고향팀인 Odra Opole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12년간 여기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1977년 오드라 오폴레는 폴란드 리그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77-78 EUFA컵에 출전했다. 여기서의 활약을 계기로 1978년 프랑스 리그 AJ 옥세르로 이적하여 1985년 선수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 리그에서 뛰었다. 클로제의 어머니는 폴란드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 출신이었다.

클로제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프랑스로 이적하면서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자랐다. 정확히 클로제는 1978년 6월 9일에 출생했는데, 1978년 여름 아버지가 프랑스로 이적하여 9월부터 프랑스에서 뛰었다. 클로제는 프랑스에서 7살 때까지 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요제프가 1985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후 그의 가족은 공산국가 폴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에 서독으로 먼저 이주한 친척들이 있던 독일 쿠젤에 영구 정착했다. 어릴 때 독일어가 서툴러 고생했던 클로제는 고등학교 진학 이후에야 축구를 시작했고 그나마도 목공일을 병행하며 독일 7부리그인 블라우바흐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탓에 축구 선수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5][6] 그러나 클로제는 축구 선수로서의 재능이 상당히 탁월한 축에 들었던 덕분에 여기서 두각을 나타게 되고 클로제는 19세인 1998년 FC 08 홈부르크(5부 리그)로 이적했고 한시즌 만인 1999년 카이저슬라우테른 II(3부 리그)로 이적했다가 그해 바로 카이저슬라우테른 1군에 콜업되어 분데스리가 무대에 데뷔했다.

3. 클럽 경력

클로제의 커리어가 과소평가받고 있는 이유는, 당시 클로제의 20대 시절의 분데스리가의 상황을 봐야한다. 분데스리가는 유럽 클럽대항전에서의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었으며, 심지어 UEFA 리그 랭킹 5위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이를 보던 2000년대 해축팬들에게 분데스리가는 그야말로 동네북 취급을 당했으며, 2010년대 이후 유럽 축구 끝판왕으로 군림하는 바이에른조차 그 때는 안방 호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저 시기에 뤼트 판니스텔로이, 티에리 앙리, 안드리 셰브첸코라는 또 다른 괴물 스트라이커들이 득실거렸던 이유도 있었다. 또한 국내 축구팬들이 유럽축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시기가 바로 유로2004 대회로 볼 수 있는데 이 당시 독일 국대 주전 스트라이커는 케빈 쿠라니와, 마이크 항케, 프레디 보비치가 주를 이루었기에 2002년 월드컵을 본 팬들은 "클로제가 없네? 걍 반짝스타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가졌고 아시다시피 이 시기는 분데스리가의 암흑기이기 때문에 SV 베르더 브레멘에서 본격적인 괴물 포스를 뿜는 클로제에 아무도 관심을 주질 않았다. 저 당시 SV 베르더 브레멘의 포스는 지금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같은, 혹은 그 이상의 강력한 전력을 갖춘 분데스리가의 강력한 우승후보였고 클로제는 그 팀의 확실한 중추로 활약하고 있었다. 즉 레반도프스키, 오바메양급의 포스를 보였다 봐도 무방하며, 지금의 분데스리가의 평가라면 뤼트 판니스텔로이, 티에리 앙리, 안드리 셰브첸코와 충분히 동급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냉정히 말해서 당시 기준으로 분데스리가는 리그 랭킹이 5위인 리그이다. 현재기준으로 랭킹이 3위인 리그가 분데스고, 5위인 리그가 리그 1이다. 분데스리가의 명성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분데스 이상의 평가는 하기 힘들다. 지금의 분데스리가 기준으로 잡으면 레반도프스키만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 할 수 있을텐데 클로제는 결코 그 지점까지 이르진 못했다. 그것을 고려하면, 클로제의 클럽 경력은 아쉬운게 명백한 사실이다. 누가 봐도 분데스리가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오바메양과 레반도프스키와의 클럽 경력 비교는 어불성설이다.[7] 단적으로 클로제의 전성기 시절에 미하엘 발락이 챔스 우승을 위해 바이에른에서 첼시로 이적한 것은 당시 분데스리가의 수준이 유럽 정상급에 미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일화다.

정리하자면 국대 기록에 반해 클럽 경력이 아쉬운 편이고, 애국자라기엔 클럽에서도 뛰어나긴 했지만 분명히 국대 활약에 비하면 부족했다. 여러가지 면에서 당시 분데스리가를 감안하면 월드클래스나 당시 이름을 떨친 공격수들에 비해선 한끗발 모자랐던 편.

3.1.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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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제가 본래부터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본래 뛰던 리그는 7부 리그로, 분데스리가 데뷔를 한건 만 20세이다. 재밌는 사실은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입단 전까지 목수직을 축구와 병행했다고 알려져있다. 트레이드마크인 공중제비 세리머니 때문인지 국내에는 그가 체조선수 출신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2000-01 시즌 분데스리가 29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2001-02 시즌 31경기 16골을 기록하면서 2골 차이로 아쉽게 득점왕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한다. 이 시기 루디 푈러 감독의 눈에 띄면서 2002 FIFA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발탁되었고, 5골을 넣어 실버슈를 차지하며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클로제의 주가도 크게 올랐는데 FC 바이에른 뮌헨, AS로마의 러브콜을 받았었다. 하지만 클로제는 팀에 끝까지 남으면서 강등권의 팀을 잔류시켰다. 다만 이 시기 케빈 쿠라니, 게랄드 아사모아, 프레디 보비치, 마이크 항케 등 분데스리가의 다른 스트라이커들이 실적이 더 좋으면서 반짝스타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시기 클로제가 못한건 아니었다. 오히려 열약한 스쿼드를 갖춘 팀에서 시즌당 30경기 이상 출전하여 매년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등 충분한 활약을 펼쳐주었다.

3.2. SV 베르더 브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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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당시 분데스리가 우승에 DFB-포칼까지 확득하면서 더블을 달성한 당시 분데스리가 최강팀인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하면서 본격적으로 클로제의 클럽 커리어의 최고조 하이를 찍게 된다.

특히 커리어 하이는 05/06 시즌인데 부상을 달면서도 26경기 25득점 13도움 키커 평점 2.38[8]이라는 토나오는 스탯을 찍었다. 그 해에 분데스리가 득점왕은 물론 선수들이 뽑은 최고의 선수 1위를 차지했다.(2위가 반 더 바르트 3위가 베르바토프이다) 유럽 4대 리그에서 한 시즌당 15-15(15골 15도움)를 넘게 기록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해에 클로제가 리그에서 개인 기록 7관왕을 차지했다.
26경기 25득점 - 2위는 34경기 21득점의 베르바토프
26경기 13도움 - 2위는 30경기 13도움의 미쿠(사실 공동 1위인데 출장경기 때문에 보통 클로제를 앞에 둔다.)
26경기 38공격포인트 - 2위는 34경기 31개의 베르바토프
평점 2.38 - 공격수 2위는 3.25의 클라스니치
평점 2.38 - 전체 2위는 2.65의 바이덴펠러(독일 평점은 골키퍼에게 매우 후하기 때문에 보통 0.5에서 0.7은 빼주는게 합리적이다.)
엘프 데스 타게스 11회 - 2위는 8회의 루시우
만 데스 타게스 3회
보면 평점에서 2위 클리스니치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참고로 클로제의 저 2.38은 키커지에서 15년동안 평가한 기록 중에 역대 최고다.[9] 클로제는 당시 리그에서 다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고 리그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던 시절이며, 이 시즌 리그에서의 활약과 월드컵 활약까지 더하여 클로제는 이 시즌 발롱도르 7위를 찍었다.[10]

3.3. FC 바이에른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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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지 못하며 분노의 영입을 시전한 해, 클로제는 루카 토니와 함께 토나오제 투톱을 결성하며 분데스리가를 정복하고 바이에른에 마이스터 샬레를 가져다 준다. 이 시기 바이에른의 위용은 대단했던 게 리베리 필립 람과 더불어 왼쪽 라인을 초토화 시키고 크로스를 올리면 기다리는 건 클로제와 토니. 이타적인 성향의 클로제와 세리에 A에서 무려 31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던 루카 토니의 조합은 그 위용이 유럽 어디에 놔둬도 꿀리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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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놓으려고 하니, 다음 시즌이 되기 무섭게 루카 토니의 노쇠화가 시작되고 클로제 본인도 작년처럼 루카 토니가 받아먹어 주지 못하자 꼬이기 시작한다. 부상도 찾아오고. 그래도 제법 괜찮은 활약이긴 했다. 리그를 정복하는 정도가 아니었을 뿐, 팀 내 최다 득점자였고 특히 챔피언스리그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쳤으나 중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부상을 당하였고 팀도 결국 무관에 그쳤다. 그래도 활약상 자체는 훌륭했기에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지만 09/10 시즌에는 폼 저하와 부상이 동시에 찾아오면서 팀은 더블과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주로 벤치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다.

결국 10/11 시즌 초반에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상도 있었으니 시즌 초반에는 주전으로 제법 기용되었지만 활약이 좋지 않아 토마스 뮐러 마리오 고메스에게 주전이 돌아가며 이후 경기에는 체력안배용 교체 아니면 정말 모 아니면 도 식의 경기에 한 번씩 나오고 있다. 나올 때마다 활약도 별로라 사람들에게 아 로제언니 정말 폼 떨어졌구나하는 탄식을 내뱉게 하고 있다.

그래도 전기가 찾아오긴 하는데,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을 관중 취급하던 반 할 감독이 물러간 이후 교체로나마 꾸준히 기용되며 여러 모로 좋은 듯 나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직 살아는 있는 것 같은데 터지지는 않는. 플레이 자체는 괜찮았지만 감이 많이 죽어서 골이 거의 터지지 않아 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바이에른과의 결별이 거의 확정되어 가는 분위기이다.[11] 결국 바이에른이 제시한 1년 계약과 본인이 원하는 2년 계약과의 견해차를 끝내 좁히지 못했다.

3.4. SS 라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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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상품이 되고 나서 토트넘, 발렌시아, 세비야, 도르트문트 등등 클로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구단은 많았지만 사실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은 피지컬, 알 수 없는 폼, 생애 첫 해외진출, 나이, 고연봉, 최소 2년 계약은 제시 등등 어느 정도 도박성이 있어서 결단이 쉽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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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탈리아 세리에 A SS 라치오로 이적하였다. 이적설 초기 및 이적확정 시기 연봉이 좀 강했기 때문에 라치오 팬들은 으악 그딴 늙다리! 고연봉! 아나 애국자! 어린 애들 놔두고! 등등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영입된 시세와 투톱을 결성한 클로제는 프리시즌 경기 중 골과 어시의 폭풍을 몰아치면서 팬들의 기대감을 상승시켰다. 결국 시즌 첫 경기 유로파 플레이오프에서 폭풍 1골 3어시였다. 그리고 정규 리그에서도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집어넣었다.

시즌 초반 AS 로마와의 더비 경기에서 경기 종료직전 결승골을 뽑아냈다. 바로 전 라운드였던 레체와의 경기에선 혼전 상황에서 흘러온 공을 방향만 바꾸는 골,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순간적인 키핑 후 킬패스로 어시, 골대 구석으로 방향 바꿔 꽂아버리는 헤더를 성공시키며 팀이 경기력에서 처발렸음에도 불구하고 2골 1어시를 작렬, 개인능력으로 3:2 역전을 이끌었다. 현재 pk를 제외할 경우 세리에 득점 선두, 라치오 팬들은 과연 클래스가 다르네요 클로제님 영입할 때 헛돈이라고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하고 사죄했다. 이 경기력을 계속 유지한다면 클로제의 첫 해외진출은 성공으로 평가받을듯 하다. 아틀란타전에서 골을 성공시키고 공중제비까지 돌아주시는 등 고군분투하였으나 그 후 같이 투톱으로 활약하라고 영입한 시세의 세리에 적응 실패, 베테랑 로키의 부상과 더불어 코파 이탈리아, 유로파리그, 리그를 돌아가며 뛰는 강행군을 지속하다 끝내 시즌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라치오는 공격진이 골을 넣지 못하는 끝없는 부진 속에 챔스 존을 끝내 수성하지 못했다.

2012/13 시즌에도 계속해서 골을 뽑아내며 팀의 상위권 수성에 큰 힘이 되었다. 라치오는 덕분에 시즌 초중반 나폴리, 유벤투스와 선두권을 형성하며 챔스권을 넘어 우승까지 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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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2월 클로제가 무릎 인대부상으로 8주동안 빠졌고, 2012/13시즌 라치오는 끝내 10/11,11/12시즌에 이어서 3연속 DTD를 하며 DTD의 상징이 되었다. 10위 밖으로 추락했던 AC 밀란을 보면서 비웃다가 인터 밀란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그나마 코파 이탈리아컵을 가져가며 유로파리그 출전권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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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와의 경기에서 5골을 성공시켰다. 팀은 6-0 대승, 클로제는 해당 라운드 종료 기준으로 득점순위 5위에 랭크되기도 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안토니오 디 나탈레와 노망주 더비중이다. 클로제의 경우에 노망주는 아니지만 넘어가자. 암튼 둘의 나이는 13년 기준 30대 중반이니 잘하는게 신기하다. 안타깝게도 세월을 견디지 못한 디 나탈레가 은퇴선언을 하면서 노망주 더비는 한때에 바이에른 듀오였던 루카 토니와 벌이게 될 줄 았았는데 디 나탈레가 후반기에 급 살아나며 은퇴를 번복하였다. 현재 라치오를 대표하는 공격수라 라이벌인 AS 로마의 상징 프란체스코 토티와 함께 로마더비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한동안은 선발 출장을 못하다 2016년 3월 13일 8시 45분(현지기준)에 진행된 아탈란타와의 경기에서 풀타임 출전, 2골(!)을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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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에는 팔레르모와의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3:0 대승을 이끈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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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클로제는 이번 시즌 피오렌티나와의 최종전을 끝으로 라치오를 떠나기로 했다. 라치오 팬들은 피오렌티나와의 경기 날을 클로제 데이로 정하고 그의 미래를 축복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소속팀과의 정말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그리고 11월 1일, 현역 은퇴 소식이 발표되었다. 은퇴 직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스태프로 합류할 예정이라고 한다.

[1] 독일의 상실영토 오버슐레지엔 주의 주도였던 곳이고, 현재 폴란드에 잔류한 독일인 다수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 독일 국경은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귀결되어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클로제는 독일계 아버지에게 태어났으며 폴란드에서 태어난 직후 프랑스로 이주했다. [2] 참고로 폴란드에서의 현지 이름은 미로스와프 마리안 클로세(Mirosław Marian Klose)였다. [3] 이 법령은 1975년 이전 출생자까지는 아버지가 독일 국적인 재외 출생자에 한정되었으나 1975년 이후 출생자부터는 어머니가 독일 국적자인 재외 출생자로 확대되었다. [4] 폴란드에서 축구선수로 뛸 때는 Józef Klose라는 폴란드화된 철자를 사용했다. 하지만 프랑스로 이적하면서 독일어 철자인 Josef Klose를 등록명으로 사용했다. [5] 이러한 이유에는 어머니의 반대도 있다. 클로제의 어머니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6] 이는 클로제가 더 상처받을까 봐서이다. 예전에 축구선수를 꿈꾸며 아카데미에 지원했던 클로제였지만, 너무 기술이 없다고 일주일만에 퇴짜를 맞았다. 이와 비슷한 일을 또 겪어 클로제가 상처받을 것이 어머니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7] 분데스리가는 12/13 시즌 부터, 14/15 시즌까지 좋은 폼을 보여줬다고 봐야 하는데 이 당시 이 두 명은 바이에른과 BVB의 핵심 스트라이커였다. [8] 독일의 평점은 타 국가와는 달리 낮을수록 좋다. 키커의 평점은 1점이 최고 6점이 최하이다. 이를 일반적인 평점으로 환산해보면 10점 만점에 7.7이다. [9] 이후 2012/13 시즌에 프랑크 리베리가 2.10, 2014/15 시즌에 아르옌 로벤이 2.16을 찍으며 경신한다. [10] 그 때문에 그 시즌과 06년 월드컵 득점왕을 하고난 뒤 FM 2007에서 클로제는 괴물로 나온다. 크로스 올리고 헤더만 하면 전부 골이었다. [11] 클로제의 경우 막바지에 폼이 상당히 좋았음에도 골을 제대로 넣는 것에 실패해 많은 바이에른 뮌헨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이는 클로제의 폼이 잠시 죽었던 이유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클로제의 플레이 스타일이 볼 순환이 바른 팀에 최적화되어있음에 원인이 있다. 물론 분데스리가 마지막 라운드 슈튜트가르트전 처럼 말 그대로 발만 갖다대면 넣을 수 있는 찬스도 날려먹는 등 클로제의 결정력 자체도 심각하게 떨어져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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