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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총독 ·
자치령 총독 · 총리 관련 직위: 인도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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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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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2월 29일 | ||
인도 제국 봄베이 주 바델리 | |||
사망 | 1995년 4월 10일 (향년 99세) | ||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봄베이 | |||
재임기간 | 제4대 총리 | ||
1977년 3월 24일 ~ 1979년 7월 2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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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학력 | 뭄바이 대학교 | |
종교 | 힌두교 | ||
신체 | 182cm[1] | ||
소속 정당 |
자나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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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봄베이 주 총리 (1952 ~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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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부총리 (1967 ~ 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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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부 장관 (1978 ~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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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연방하원의원 (1957 ~ 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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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제4대 총리.인도 총리 중 최장신이고 인도 총리중 가장 장수했으며, 취임 당시 나이가 무려 81세로 역대 인도 총리 중 최고령이었다. 또 인도 공화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인도국민회의 소속이 아닌 야당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
2. 생애
1896년 인도 제국 봄베이 주 의 바델리(現 구자라트 주의 발사드)에서 학교 교사인 란초드지 나가르지 데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지역의 공무원으로써 활동했으나 당시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킨 힌두교도들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공무원직에서 물러나서 인도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이후 인도국민회의에 입당해 1934년 열린 지방선거 당시 세무장관에 선출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7년 내무장관을, 1952년에는 봄베이 주 총리를, 이후 델리로 올라가 자와할랄 네루 내각과 인디라 간디 내각에서도 재무부 장관으로 기용되며 승승장구했다. 다만 사회주의자였던 네루와 달리 모라르지는 친기업적인 성향의 정치인이어서 네루, 간디와 불화를 겪었고 장관 생활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인디라 간디가 재무부 장관인 모라르지 데사이와 상의도 없이 경제 정책을 내놓는 등, 점점 인도국민회의 지도부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69년 인도국민회의가 분열되자 모라르지 데사이는 인디라 간디와 반대파에 서게 되었다. 이때 인도국민회의가 인도국민회의(R)과 인도국민회의(O)로 갈라지게 되었고, 인디라 간디는 인도국민회의(R), 모라르지 데사이는 인도국민회의(O) 소속이 되었다. 이후 인도국민회의(R)는 현재의 인도국민회의가 계승하고 있고, 인도국민회의(O)는 1977년 다른 야당들과 합쳐져 자나타 당이 되면서 사라진다.
이렇게 데사이는 인디라 간디와 결별하면서 정적이 되었고 이후 나브 니르만[2]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반 인디라 간디 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인도의 여러 야당이 힘을 합쳐 결성한 '자나타 당'이 1977년 인도 총선에서 인도국민회의를 꺾고 압승하면서 모라르지 데사이는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후 내각에서 내무부,해운부,보건가족복지부 장관을 겸임하였다. 그리고 총리 재임 중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핵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국제 사회에 약속했고, 또 경제적으로는 제6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경제발전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했고 자나타 당은 인디라 간디에 반대한다는 것 하나를 빼면 아무 공통분모가 없었기에 총선 이후에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데사이도 결국 당내 반대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79년에 사임하면서 2년간의 짧은 총리 생활은 막을 내렸다. 1979년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2%였다.
이후 1980년 총선에 불출마하며 데사이는 정계를 은퇴했고, 뭄바이에서 살다 1995년 99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