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47:47

막티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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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띠엔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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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초대 2대 - 복위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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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7대 8대
윤성후 막꽁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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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하띠엔 후국 2대 후작
琮德侯 | 종덕후
출생 1700년
캄보디아 왕국 융기(隆奇)
(現 캄보디아 백마성)
즉위 1736년
대월 광남국 하띠엔
(現 베트남 하띠엔)
사망 1780년 11월 1일 (향년 80세)
시암 톤부리
(現 태국 방콕 톤부리현)
능묘 막티엔투묘(鄚天賜墓)
재위기간 하띠엔 군주
1736년 ~ 17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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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막(鄚)
티엔 투 (Thiên Tứ / 天賜 / 천사)
부모 부친 막구
모후 배씨름(裴氏廪)
배우자 효숙부인(孝肅夫人) 응우옌씨(阮氏)
자녀 6남 3녀
사린(士麟)
시호 하선진흠차도독종덕후(河僊鎮欽差都督琮德侯)
특진국노하선진도독종덕공(特進國老河僊鎮都督琮郡公)
봉호 색다친왕(索多親王)[1]
신호
(神號)
다의지신(達義之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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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작품4. 관련 논문5.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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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鄚天賜

대월 후 레 왕조 시기 응우옌씨 정권의 제후국 하띠엔 후국의 제2대 군주로 부친이 중국인, 모후가 월남인인 혼혈이다.

2. 생애

1736년 아버지 막구(鄚玖)가 죽자 하띠엔 통치자로 즉위하였다.

재위 대부분 중화를 추구했으며 문묘를 짓고 선진적인 중원 학자를 초빙, 중국의 문화를 보급함과 동시에 시장을 활성화하여 하띠엔 근방의 여러 마을이 자연스럽게 탄생하였다. 그 결과 광남국을 캄보디아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참파인 등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로 만들어 번성시켰다. 또한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고 재위 후반 천주교가 하띠엔에 유입되었으나 그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부친 대부터 이어진 캄보디아와의 군신 관계를 청산했고 1747년 캄보디아 왕 우타이 2세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삭장, 다영 및 7개 성을 획득해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완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 광남의 군주, 즉 막티엔투의 주군은 응우옌푹코앗과 황제 현종(顯宗)이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7성을 편입한 이 시기를 하띠엔 후국(侯國) 및 광남국의 전성기로 구분한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 버마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자 막티엔투는 아유타야 왕국의 후예 소최(昭最)를 받아들였다. 곧 딱신이 혼란스러운 태국을 정리하고 톤부리조를 개창하여 왕으로 즉위했는데 전조(前朝)의 왕족이 살아 있다는게 밝혀지면 자신의 정통성에 위협이 되기에 그를 받아들인 막티엔투에게 소최를 내놓으라고 했다. 이리하여 두 세력은 긴장 관계가 되었고 하띠엔의 선박이 침몰된 사건을 계기로 두 세력은 전시상황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오랫 동안 전쟁이 진행되자 하띠엔에서도 난이 두 번이나 일어나는 등 쇠퇴기에 빠졌고 곧 하띠엔의 수도가 점령당하자 막티엔투는 주군인 광남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광남국도 떠이선 농민 운동이 발생하는 등 지원해 줄 상황이 안되었기에 하띠엔 후국과 톤부리 왕조 간 교섭을 주도하여 휴전을 맺게 하였다.

하지만 주군국인 광남의 떠이선 운동은 계속되었고 결국 광남국은 수도 순화(順化)를 떠이선 당에게 빼앗기는 등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막티엔투는 당시 광남왕 응우옌푹투언과 합류하여 그에게 체면을 가리지 말고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어떻게든 사직을 보존할 것을 건의했으나 안타깝게도 응우옌푹투언은 무능했으며 서산조의 지도자 응우옌반후에의 집요한 추격으로 응우옌푹투언은 생포당했고 막티엔투는 어쩔 수 없이 시암으로 도주하였다. 도주하기 전 응우옌반후에는 그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막티엔투는 거부하였다.
「我臣事南天已二世矣,心如鐵石,雖死不改,其志安肯與汝賊輩作逆天之事乎?」
나의 대에 이르러 2대 동안 신하를 칭했기에 충절을 지킨다는 마음은 쇠, 돌과 같다. 죽여도 비틀 수 없을 것임을 맹세한다. 그러니 어떻게 너(汝) 같은 역적 놈과 하늘을 거스르는 일을 하겠느냐?
《河仙鎮葉鎮鄚氏家譜》 - 응우옌반후에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며.

막티엔투는 후일을 도모하여 한때 적이였던 딱신에게 의탁했으나 1780년 시암의 상선 한 척이 구 광남을 지지하는 장수 두청인(杜淸仁)에게 약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딱신은 사람을 보내 두청인을 심문하게 했으나 별 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다만 서산조가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밀서를 조작하여 시암에 사신을 파견해 '두청인과 막티엔투가 긴밀하게 협력하여 시암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 이라는 등 무고를 하였다. 마침 두청인이 빼앗은 전함으로 서산과 싸우는 등 군사를 일으킨다는 모습으로 보일 소지가 다분하였기에 딱신은 그 무고를 믿어 구 광남국의 유신 등 여러 사람들을 처형하였고, 막티엔투 본인에게 처형의 날이 다가오자 1780년 11월 1일 향년 81세로 자결하였다.

이후 자롱 황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막티엔투의 자손을 비롯한 막씨 일족은 하띠엔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1822년 그의 충절을 높게 산 민망 황제에 의해 막티엔투는 다의지신(達義之神)으로 추존되는 등 황제가 친히 신격화를 하였으며 하띠엔의 미덕사(美德社)를 통해 그를 기리게 하였다.

3. 작품

  • 하띠엔 십영(河仙十詠)
  • 명발유어(明渤遺漁)

4. 관련 논문

5. 참고 항목



[1] 시암이 봉한 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