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7 11:53:04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라틴어:Marcus Iulius Gessius Bassianus
전체이름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Marcus Iulius Gessius Bassianus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지위 프라트레스 아르발레 사제
고향 로마 제국 페니키아 아르카 카이사리아
가족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아버지)
율리아 마마이아(어머니)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남자형제)
율리아 마이사(외할머니)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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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로마 다신교 사제, 황족이다. 율리아 마이사의 외손자로, 율리아 마마이아의 아들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형이다. 어머니의 외사촌인 당숙뻘의 카라칼라 황제 아래에서 212년 ~ 217년까지 프라트레스 아르발레 사제를 지냈다.

2. 생애

시리아 혈통의 로마 귀족,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와 그의 후처 율리아 마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자형제로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바시아누스가 있었다. 이름과 경력 모두에게 확인되듯이, 삼형제 중 첫째일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대체로 190년대경 태어났다고 현재 많은 학자들은 확정적으로 추정하며, 부모의 첫 아이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 남자형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달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어릴 때 요절한 남자형제 바시아누스와 달리 일찍이 부모, 아버지가 첫 결혼에서 얻은 이부누이 테오클리아, 친형제 알렉산데르와 함께 로마로 일찍이 건너가, 전형적인 로마-그리스식 교육을 배웠고, 사고 방식 역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이라는 자각이 확고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고대기록을 종합하면,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는 오늘날 레바논 티레 일대에서 신관으로 살았고, 알렉산데르와 함께 로마로 건너가 전형적인 로마 귀족으로 살면서 로마-그리스식의 고전 수업과 교양을 배웠다고 한다.

211년 말 또는 212년 초, 친동생 게타 황제를 살해하고 권력을 독차지한 친척어른 카라칼라 황제가 212년 바시아누스, 알렉산데르 형제의 어머니로 황제의 외사촌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황녀에 준하는 지위를 내릴 때, 고대 로마의 사제회 중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아르발레스 형제단)에 소속되어 로마식 신관 수업을 받았고, 황족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자세한 경력은 남아 있지 않고, 217년까지 아르발레스 형제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비슷한 연배였을 것으로 평가받는 외사촌 엘라가발루스와 달리,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고향 에메사에서 바알을 태양신으로 숭배한 엘라가발 관련 교육을 받지 않았고, 고대 로마 토착 다신교 사제 수업만 배울 정도로 에메사 쪽과는 무관했다. 이는 정신이 멀쩡함에도 미치광이에 가까운 성도착증 환자 엘라가발루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프라도가 주장한 뒤, 다른 학자들도 직간접적으로 연구해 밝힌 것이다. 프라도로 대표된 이들에 따르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친형제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는 카라칼라 시절에 아르발레스 형제단에 가입하면서 로마 귀족 반열이 됐지만, 카라칼라가 암살된 뒤부터는 오늘날 레바논 일대로 건너가서 에메사 왕가와 로마의 세베루스 가문의 가교 역할을 하며 동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디오의 침묵 아래 그동안 의문부호가 붙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형제 중 외할머니 마이사에게 간택된 이유 역시 여러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는 평을 듣는다.

남자형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222년 3월 황제가 되고,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가 아우구스타가 됐음에도, 로마에서 열린 아르발레스 형제단이 참석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가 어머니, 남자형제 알렉산데르와 교류를 했다는 기록이 많지 않고, 티레에서 거주했다고만 언급된다. 따라서 다수의 학자는 그가 티레에서 머물며 에메사 왕가와 세베루스 왕조를 지탱한 일을 맡으며 조용히 살았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나칠 정도로 기록이 없어, 일각에선 아버지가 이복누이 테오클리아와 그 남편와 함께 마크리누스 부하들에게 에메사로 가던 중 처형된 점에서 당시 10대 중반의 바시아누스 역시 처형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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