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C8E78><colcolor=#000000> 스웨덴 구스타브 1세의 제1계비 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 Margareta Leijonhufvu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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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 레이욘후부드 Margareta Eriksdotter Leijonhufvud |
출생 | 1516년 1월 1일 |
스웨덴 네르케 에셰베리 성 | |
사망 | 1551년 8월 26일 (향년 35세) |
스웨덴 쇠데르만란드 티넬쇠 성 | |
배우자 | 구스타브 1세 바사 (1536년 결혼) |
자녀 | 요한 3세, 카타리나, 세실리아, 망누스, 안나, 소피아, 엘리사베트, 칼 9세 |
아버지 | 에리크 아브라함손 레이욘후부드 |
어머니 | 에바 에릭스도테르 바사 |
형제 | 아브라함, 안나, 비르지타, 스텐, 마르타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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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구스타브 1세 바사의 두번째 부인이자 요한 3세와 칼 9세의 어머니.스웨덴에서 이상적인 왕비의 이미지로 여겨지는 여성이다.
2. 생애
스웨덴의 귀족 에리크 레이욘후부드의 3녀로 태어났다. 마르가레타가 4살 때 에리크는 스톡홀름 대학살[1]로 목숨을 잃었다. 마르가레타는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535년에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왕비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가 낙상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새로운 왕비 후보로 마르가레타가 거론되었다. 마르가레타의 가문은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고, 어머니 에바 에릭스도테르는 구스타브 1세 바사와 육촌지간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구스타브 1세 바사가 마르가레타에게 청혼하러 갔을 때 마르가레타는 성 다락방에 있는 상자 속에 숨었다고 한다. 당시 마르가레타는 스웨덴의 귀족 스반테 스투레[2]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왕이 그 약혼을 깼다. 1536년 10월, 40세의 구스타브 1세 바사는 20살이 된 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와 웁살라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한번은 마르가레타와 스반테 스투레가 단 둘이 한방에 있는 것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목격했다. 왕이 화를 내며 설명을 요구하자 마르가레타는 스반테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청혼하기 위해 결혼을 허락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진짜인지 임기응변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화가 풀린 구스타브 1세 바사는 결혼을 허락했고, 스반테 스투레는 마르가레타의 막내동생 마르타와 결혼했다.
모든 기록에서 마르가레타는 훌륭한 왕비로 평가되고 있다. 마르가레타는 아름답고 지적이었으며, 남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10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중 8명이 유아기를 넘겼다. 마르가레타가 왕비가 되고 그녀의 가족들은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왕조차도 마르가레타의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연이은 임신으로 몸이 약해진 마르가레타는 배를 타고 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독한 폐렴에 걸렸다. 짧은 투병 끝에 1551년 8월, 자식들에게 다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왕비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나 1년 뒤에 마르가레타의 조카와 재혼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요한 3세 (Johan III) |
1537년 12월 20일 | 1592년 11월 17일 |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슬하 1남 2녀[3] |
구닐라 비엘케 슬하 1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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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녀 |
동프리슬란트 백작부인 카타리나 (Catherine, Countess of East Frisia) |
1539년 6월 6일 | 1610년 12월 21일 |
동프리슬란트 백작 에드차르트 2세 슬하 5남 5녀 |
2녀 |
바덴-로데마헤른 변경백비 체칠리에 (Cecilia, Margravine of Baden-Rodemachern) |
1540년 11월 16일 | 1627년 1월 27일 | 바덴-로데마헤른 변경백 크리스토퍼 2세 |
2남 |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망누스 (Magnus, Duke of Östergötland) |
1542년 7월 25일 | 1595년 6월 26일 | |
3녀 |
펠덴츠 궁정백비 안나 (Anna, Countess Palatine of Veldenz) |
1545년 6월 19일 | 1610년 3월 20일 |
펠덴츠 궁정백 게오르크 요한 1세 슬하 5남 6녀 |
4녀 |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부인 소피아 (Sophia, Duchess of Saxe-Lauenburg) |
1547년 10월 29일 | 1611년 3월 17일 |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마그누스 2세 슬하 1남 |
5녀 |
메클렌부르크가데부슈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Elizabeth, Duchess of Mecklenburg-Gadebusch) |
1549년 4월 5일 | 1597년 11월 20일 |
메클렌부르크가데부슈 공작 크리스토퍼 슬하 1녀 |
3남 |
칼 9세 (Karl IX) |
1550년 10월 4일 | 1611년 10월 30일 |
팔츠지메른의 마리아 슬하 2남 4녀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네 슬하 2남 2녀[4] |
[1]
1520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스톡홀름에서 일으킨 대학살. 이 사건으로 약 100여명에 가까운 스웨덴 귀족들이 학살당했고,
구스타브 바사가 주도하는 스웨덴 독립 운동이 벌어져 스웨덴은
칼마르 연합을 이탈했고 폐위당한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에서
폭군(Kristian Tyrann)이라는 오명을 얻은 채 본국인
덴마크에서도 폐위 당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2]
스웨덴의 섭정을 역임한 소 스벤 스투레의 아들이다.
[3]
지그문트 3세 바사 등
[4]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