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樂彬북한의 정치인, 의학자.
2. 생애
1928년 1월 10일에 태어났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선출, 최창석의 뒤를 이어 내각 보건상에 임명되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에 김일성의 호출을 받고 보건사업을 정력적으로 진두지휘했다 카더라. 현재 북한의 사회주의 보건제도, 의료제도를 닦은 것이 순전히 이 사람의 공이라고 북한은 선전하고 있다. 리락빈 본인의 수기에 따르면, 의사 양성을 위하여 자강도 의학대학을 시작으로 혜산의학대학, 원산의학대학, 사리원의학대학, 평성의학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이후 각 도대학병원 및 시대학병원들을 설립하였다고 한다.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4월, 김일성이 리락빈에게 김형직이 과거 한의사를 할 적을 얘기하면서 전 인민에게 의학상식을 보급할 수 있는 책을 쓰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리락빈이 <림상의전>을 집필하였다. 현재까지도 북한에서 이 책이 의학의 교과서로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이 림상의전을 보고 정치국 회의에서 아주 잘 썼다고 크게 칭찬했다 카더라.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보건성이 정무원 보건부로 개편되자 보건부장으로 유임되었다. 1974년 6월에 보건부장에서 물러나고 박명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교편을 잡았으나 김정일이 그를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1980년 4월 3일, 최고인민회의 6기 4차 회의에서 인민보건법 채택의 실무를 맡았을 것으로 보이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이후 봉화진료소 소장에 임명되어 김일성의 주치의 역할을 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평양시민들이 봉화진료소를 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김정일이 커버를 쳐줘서 책임추궁당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후 검사위원장 및 부부장으로 재임하던 중인 병을 얻어 투병하였으며 김정일이 리락빈을 무조건 살려내라고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었다고 북한 선전에선 주장하고 있다. 1997년 4월 30일 새벽 5시에 병사, 애국렬사릉에 중앙위원회 부부장 직함으로 안치되었다. 동아일보 게재 사망 기사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당이 맡겨준 중요한 초소에서 당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보장하며 우리 나라 사회주의보건제도의 우월성을 발양시키고 인민들의 건강을 보호증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 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워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에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김일성을 잘 받들어모신 의료 엘리트로 추앙받으면서 그의 생애를 기리는 련속소개편집물도 제작되었다. 당창건 70주년 공연 <위대한 당, 찬란한 조선>에서도 리락빈의 이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