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공부자의(公府諮議) | ||
본명 | 류사배(劉師培) | |
정체 | 劉師培 | |
간체 | 刘师培 | |
한국식 독음 | 류사배 | |
영문 | Liu Shipei | |
자 | 신숙(申叔) | |
출생 | 1884년 6월 24일 청나라 강소성 의진현 | |
사망 | 1919년 11월 30일 중화민국 베이징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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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없음 | |
직업 | 국학자, 정치가 |
1. 개요
중국의 정치인,국학자. 초기에는 혁명활동에 개진하였으나 이후 전향하여 청조 관료의 막료로 근무하였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주로 학술활동에 몰두하였다. 중국 최초의 아나키스트로도 알려졌다.2. 생애
전통적으로 학문으로 유명한 가문에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은 전한 시대의 유학자 신배(申培)를 본받으라는 의미로 지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 슬하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17세에 수재, 18세에 거인이 될 정도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3년 베이징에서 회시에 낙방한 직후 애국학사(愛國學社)의 인원들과 교류하면서 혁명사상에 몰입하였다. 이때 그는 배만사상의 일환으로 황제 탄생년도[1]를 고증하여 기년으로 삼는 황제기원을 주장하기 하였다.이후 허반(何班)[2]과 결혼한 뒤 한족광복(漢族光復)의 뜻을 담아 광한(光漢)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쑨원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등 활동하였다. 1905년 편집자로서 활동하던 경종일보가 청조의 대독외교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문은 정간되자, 류츠페이는 지방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이름을 바꾸고 안휘공학의 교사진으로 참가하였는데 이때 천두슈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후 1907년 애국학사 시절부터 서로 교류하던 장빙린의 초빙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여기서 기타 잇키. 고토쿠 슈스이와 교류했는데, 특히 슈스이에게 영향받아 1907년 7월부터 아나키즘 사상에 빠져들었다.[3]
그러나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점차 침체되고 장빙린과 관계가 악화되는 와중, 중국에 남아있던 아내 허전이 당시 양강총독으로 재직하던 단방(端方)과 접촉하며 귀국을 권유하자 결국 귀국해 단방의 막료가 되었다. 이후 1909년 상하이에 있던 혁명조직을 밀고하는 등 혁명파와 완전히 결별하였고[4]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진 뒤 단방이 살해당하자 창두에 있던 류츠페이는 사천국학원에 피신했다. 그러다 혁명파가 귀국하여 수소문한 덕에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옌시산의 고문으로 지내다가 위안스카이 치하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1915년 8월 홍헌제제를 옹호하는 주안회의 일원이 되었으나 위안스카이 사후 체포령이 떨어질까 두려워 톈진으로 피난갔다. 그러다가 체포령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리위안훙에게 감사인사를 표하려 갔으나 축객령을 당하는 등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재능이 있으면 행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차이위안페이가 초빙하여 중국고대문학을 강의하게 되었으나 이미 건강을 많이 해친 뒤였다. 말년에는 외부인과 만자기를 극히 꺼린 채 틀어박혔다가 1919년 "나는 학문에만 종사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그의 아내 허전은 이후 승려가 되었으나 미쳐 죽었다는 풍문만 떠돌 뿐 이후의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