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E6060><colcolor=#ffffff>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Louis François Armand, Duc de Richelie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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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 (Louis François Armand de Vignerot du Plessis) |
출생 |
1696년
3월 13일 프랑스 왕국 파리 |
사망 |
1788년
8월 8일 (향년 92세) 프랑스 왕국 파리 |
배우자 | 안 카트린 노아유 (1711년 결혼 / 1716년 사망) |
엘리자베트 드 로렌 (1734년 결혼 / 1740년 사망) | |
잔 드 라보 (1780년 결혼) | |
자녀 | 앙투안, 잔 조피 |
아버지 | 리슐리외 공작 아르망 장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 |
어머니 | 안 마르그리트 다시네 |
형제 | 마리 카트린 아르망, 엘리자베트 마르그리트 아르망, 마리 가브리엘 엘리자베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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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 정치인. 리슐리외 공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엔 나름대로 제 역할을 했지만 7년 전쟁 시기엔 똥별이었다.2. 일생
2.1. 초기 경력
리슐리외 공작은 1696년 3월 1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손자, 아르망 장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의 아들이자 루이 14세의 대자였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1711년 2월 12일, 리슐리외 공작은 14세의 나이로 안 카트린 드 노아유와 결혼했지만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안 카트린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지내다가 1716년 11월 7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715년 아버지가 죽으면서 리슐리외 공작에 정식으로 봉해졌으나, 1716년 법적으로 금지된 결투를 벌였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몇달간 수감되었다. 그리고 1719년 루이 15세의 섭정을 맡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축출하려는 '첼라마레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당하는 바람에 또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이후 리슐리외 공작은 1725년부터 1729년까지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궁정 프랑스 대사로 근무했고 빈에서 평화 협약을 논의해 1727년에 체결시켰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리슐리외 공작은 라인 강 전선에서 1733년부터 1734년까지 복무했다. 1734년 소장에 임명된 리슐리외 공작은 같은 해 4월 7일 엘리자베트 소피 드 로렌과 결혼했다. 그 후 1738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했고, 1743년에는 루이 15세의 침실을 처음 방문할 수 있는 신사의 자격을 획득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 시기, 리슐리외 공작은 1743년 6월 27일에 발발한 데팅겐 전투와 1745년 5월 11일 퐁트누아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퐁트누아 전투에서는 프랑스 포병대를 지휘해 영국 군단을 향해 포격을 가해 적을 패퇴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1748년에는 제노아 방어를 맡아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훌륭하게 방어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748년, 그는 프랑스 원수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755년에는 기옌과 가스코뉴 주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2.3. 7년 전쟁
1756년 4월, 리슐리외 공작은 메노르카 섬을 공격하는 함대에 탑승했다. 그의 군대는 4월 18일 시우타델라에 상륙해 메노르카 섬의 대부분을 빠르게 점령했고 4월 23일에 세인트 요새를 포위했다. 영국 수비대는 두 달 넘게 저항했으나 자신들을 구하러 오던 영국 함대가 메노르카 해전에서 패퇴하자 결국 6월 28일 항복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리슐리외 공작을 환대한 퐁파두르 부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당신의 별은 떠오르고 있어요. 그리고 그 별은 절대 흐려지지 않을 거예요.
1757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보헤미아를 갑작스럽게 침공해 프라하를 포위하자, 오스트리아는 급히 프랑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이에 루이 15세는 당시 툴롱 주변 해안가를 경호하는 프랑스군을 지휘하고 있던 리슐리외 공작에게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 임무는 오스트리아군이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물리쳐 프라하 포위를 풀게 만들었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한편, 데스트레 백작 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에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하노버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프랑스 각료들은 데스트레 백작의 체계적이고 느린 진군에 크게 불만을 품었고 퐁파두르 부인 역시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데스트레 백작이 승승장구하는 걸 싫어했다. 결국 데스트레 백작은 7월 26일 하스텐벡 전투에서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을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에 경질되었고, 리슐리외 공작이 그 대신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리슐리외 공작은 하노버 공세를 이어가 8월 11일 수도를 함락시키고 하노버의 영토 대부분을 점거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제 그가 브레멘에 몰린 연합군을 섬멸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리슐리외 공작은 연합군과 싸우는 대신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해 하노버가 전쟁에서 이탈하고 연합군이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후 리슐리외 공작은 하노버에서 심각한 약탈을 일삼았고, 하노버 국민들은 프랑스군에게 적의를 품었다. 게다가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에게 대패한 후, 영국은 클로스터르제벤 협약 폐기를 선언하고 연합군을 재결성해 하노버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다.
1757년 11월 24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연합군을 지휘해 하노버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전염병에 시달리느라 많은 병사들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나마 건강한 병사들도 하노버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느라 분산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리슐리외 공작은 적의 거센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알레르로 퇴각했다. 그러던 1758년 2월, 리슐리외 공작은 자신이 경질되었으며 클레르몽 백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가 새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부아가 치밀어오른 그는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일주일 만에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클레르몽 백작은 부임 후 리슐리외 공작이 이끌던 군대의 상태를 보고는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폐하의 군대는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한 부대는 약탈자와 살인자로 구성되어 있고, 2번째 부대는 땅에 묻혀져 있으며, 세번째 부대는 병원에 있습니다. 첫번째 부대와 함께 후퇴할까요, 아니면 다른 부대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후 리슐리외 공작은 하노버에서 6개월간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심각한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고소되었다. 그와 그의 장교들은 점령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의 4분의 3을 횡령했으며 병사들의 급료까지 중도에서 가로챘다. 이러한 그의 하노버에서의 약탈과 부패는 그에게 "약탈자들의 작은 아버지"라는 별명을 안겨줬다. 그러나 처벌받아 마땅한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그는 퐁파두르 부인에게 신임받는 명문 귀족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다만 이후로는 군직에 더이상 있지 못하고 은거해야 했다.
2.4. 이후의 경력
1764년 지위가 회복된 리슐리외 공작은 퐁파두르 부인이 사망한 후 루이 15세의 정부로 부상한 뒤바리 부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를 계승한 후에는 뒤바리 부인을 매우 싫어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질시받았고 이후로는 궁정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780년 2월 13일, 리슐리외 공작은 84세의 나이로 잔 드 라보과 세번째로 결혼해 여전한 정력을 과시했다. 그러다가 1788년 8월 8일에 사망하니 향년 92세였다.
3. 프랑스의 대표적인 호색한
리슐리외 공작은 오늘 날까지도 프랑스에서 호색한의 아이콘이다. 차례대로 안 카트린 노아유, 엘리자베트 드 로렌, 잔 드 라보와 세번 결혼했으나 문란한 여자관계로 당대 프랑스 궁정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그 외에도 베리 공작부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1], 대표적인 근세 여성 물리학자 겸 수학자인 샤뜰레 후작부인, 클로딘 드 땅생 남작부인, 모데나 공작부인 카를로타 아글라이아, 뒤바리 부인의 연인이기도 했다.
[1]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차녀이자
루이 14세의 손자며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