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저 비고드 Roger Bi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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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209년 ~ 1270년 7월 3일 또는 7월 4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 백작령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또는 노퍽 백작령 | |
아버지 | 휴 비고드 | |
어머니 | 모드 마셜 | |
형제 | 휴, 이사벨라, 랄프 | |
배우자 | 스코틀랜드의 이사벨라 | |
직위 | 제4대 노퍽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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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시몽 드 몽포르와 함께 옥스퍼드 조례를 반포해 헨리 3세의 왕권을 제약했지만, 제2차 남작 전쟁에서는 헨리 3세의 편에 섰다.2. 생애
1209년경 제3대 노퍽 백작 휴 비고드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인 모드 마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22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아직 어렸기에 솔즈버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의 후견을 받았다. 그 해 5월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의 딸이자 알락산더르 2세의 누이인 이사벨라과 결혼했고, 1233년 성인이 된 뒤 헨리 3세로부터 노퍽 백작으로 인정받고 기사 작위도 받았다. 1233년 7월 말 제3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의 반란에 가담했지만, 9월 8일 잉글랜드 왕실에 귀순한 뒤 사면을 받았다. 1234년 2월, 비고드 가문의 주요 거주지인 서퍽의 프램링엄 성을 헨리 3세로부터 돌려받았다.로저는 젊은 시절 유명한 마상창시합 전문 기사였다. 그는 1237년 2월 노팅엄셔의 블리스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서 활약한 것을 시작으로,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여러 마상창 시합에 활약했다.. 당대 연대기들에 따르면, 그는 1257년에 중병에 걸린 건 마상창시합 때 입은 부상이 도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234년에 에식스와 허트퍼드셔를 여행한 사법 위원회를 이끌었고, 프랑스와의 휴전 협상에서 군주를 대표했으며, 1242년 헨리 3세의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했고, 생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하면서 패주하는 아군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헀다. 1245년과 1249년에 로마 교황에게 교회 세금 인상에 항의하는 서한을 여러 귀족과 함께 발송했다.
1246년, 어머니 모드의 마지막 남자 형제인 제6대 펨브로크 백작 안셀 마셜이 사망했다. 그 후 로저는 마셜 가문이 대대로 누리던 잉글랜드 왕실 마셜 직위를 받았다. 이후 마셜은 노퍽 백작 및 노퍽 공작이 대대로 누리는 작위가 되었다. 2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있던 마셜 가문의 광대한 영토 상당 부분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로서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대귀족 중 한 명이 되었다.
로저는 1250년대에 헨리 3세와 불화를 벌였다. 헨리 3세가 자기 여동생이자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2세 마셜의 미망인이며 시몽 드 몽포르의 아내가 된 엘리노어에게 지참금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로저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254년, 로저는 가스코뉴로 출전한 왕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255년에 열린 의회에서, 헨리 3세는 마셜 가문이 지녔던 빚을 제대로 갚지 않고 마셜 상속과 관련해 왕실에 바쳐야 할 돈을 내지 않은 점을 문제삼으며, 당장 상환하라고 요구했다. 로저는 왕과 갈등을 벌이다가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 등의 중재에 따라 왕과 화해했지만, 나중에 헨리 3세의 이복형제인 초대 웩스포드 남작 윌리엄 드 발랑스와 불화를 벌였다.
1258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3세의 관리들이 자금을 강압적으로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지에 손을 함부로 대고, 뤼지낭 가문 등 푸아투 출신 귀족들이 궁정에서 설치며, 시칠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문제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재정 압박을 가해 그들이 빚 독촉을 심하게 하게 한 것에 반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 고위 성직자들도 왕이 자기네 교구 자금을 무제한으로 각출하는 현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그해 4월, 로저는 시몽 드 몽포르, 존 피츠조프리, 피에르 드 몽포르, 피에르 드 사보이,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6명과 함께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뤼지냥 가문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1258년 4월 30일, 로저는 공모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가 열리던 웨스트민스터로 진군했다. 이러다가 체포될 걸 두려워 한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그 대신 국왕이 절반을, 귀족들이 절반을 선출한, 귀족과 성직자 2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통치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왕의 선택을 받고 의회에 자리를 계속 잡자, 공모자들은 더 많은 조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해 6월, 새 의회가 소집되어 <옥스퍼드 조례>로 알려진 일련의 조치를 통과했으며, 헨리 3세는 압력에 직면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귀족에서만 선출되는 15명의 소규모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사법관, 수상, 재무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3년마다 열리는 의회를 통해 감시되었다. 옥스퍼드에 있는 하급 귀족과 신사들의 압력은 헨리 3세의 관리들과 대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출된 위원회에는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푸아투 출신 인사는 없었다. 그 후 위원회는 주요 뤼지냥파 인사들을 궁정에서 추방하고 전국의 주요 요새를 확보했다.
그러나 공모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영주와 왕실의 권위와 권력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선호했고, 로저 비고드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으며, 리처드 드 클레어 등은 왕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 등 강경파 귀족들과 헨리 3세의 갈등이 고조된 끝에 1263년부터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자, 로저는 헨리 3세의 편에 섰다. 하지만 동앵글리아 관리에 힘을 기울일 뿐, 전투엔 관려하지 않았고, 루이스 전투와 이브샴 전투 사이에 시몽 드 몽포르가 정국을 주도할 때는 의회에 출석해 시몽의 정책에 순응했다.
이후 수년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270년 7월 3일 또는 4일에 런던 또는 노퍽주에서 사망했고, 사후 런던의 블랙피어스 교회 또는 노퍽주의 테트퍼드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아내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 휴의 아들이자 자기 조카인 로저 비고드가 비고드 가문의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