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9:38:00

로베르트 엔케

로베르트 엔케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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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96 주장
알틴 랄라
(2004~2007)
로베르트 엔케
(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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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엔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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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前 축구 선수
파일:enke.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로베르트 엔케
Robert Enke
출생 1977년 8월 24일
동독 튀링겐 예나
사망 2009년 11월 10일 (향년 32세)
독일 니더작센 하노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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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6cmㅣ 체중 84kg
직업 축구 선수 ( 골키퍼 / 은퇴)
소속 선수 BSG 예나파름 (1985 / 유스)
FC 카를 차이스 예나 (1986~1995 / 유스)
FC 카를 차이스 예나 (1995~1996)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96~1999)
SL 벤피카 (1999~2002)
FC 바르셀로나 (2002~2004)
페네르바흐체 SK (2003 / 임대)
CD 테네리페 (2004 / 임대)
하노버 96 (2004~2009)
국가대표 8경기 ( 독일 / 2007~2009)

1. 개요2. 선수 경력3. 사망4. 사후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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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초기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나 뒤늦게 그 진가를 인정받은 대기만성형 선수. 뛰어난 골키퍼가 유난히 많이 배출된 독일 내에서도 올리버 칸, 옌스 레만의 뒤를 잇는 차기 독일 국가대표 골키퍼 유망주로 불리고 있었으며 인품도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딸을 2살의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뒤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 비극적인 사연으로도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2.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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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예나에서 태어나 FC 카를 차이스 예나에서 프로데뷔했고, 얼마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해 분데스리가를 경험하게 된다. 1998-99 시즌 기존 주전 골키퍼였던 우베 캄프스[1]의 부상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주전골키퍼로 나서며 활약했으나 글라트바흐는 꼴찌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래도 엔케는 독일 내에서 유망주로 각광받았으며 이후 21세 때 포르투갈 SL 벤피카로 이적, 본격적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2.2. 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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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FC 바르셀로나 이적 후 활약했으나, 이후 바르사의 레전드 골키퍼 중 하나인 발데스와의 주전경쟁을 해야했다.[2] 그러나 이 당시 약체팀들과의 경기에서 3실점을 기록,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기에 이르렀고 그는 결국 주전경쟁에서 밀려 벤치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2.3. 페네르바흐체 SK

결국 이를 감당하지 못한 엔케는 다음해 페네르바흐체 SK로 옮겨갔지만 이적 후 첫경기에서 또다시 3실점을 기록. 사실상 이름만 남은 선수로 전락했고, 2부 리그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심한 좌절감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결국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2.4. 하노버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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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엔케는 2004년 하노버 96으로 이적 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다시 살아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무렵 희소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난 그의 라라가 끝내 생후 2년 만에 사망하였고 딸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우울증은 더욱더 심해졌다. 축구팬들은 충격을 받은 엔케를 걱정했지만, 엔케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팬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2.5.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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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 시즌 동안 보여준 활약덕에 199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나선 독일 대표팀에 전격 발탁되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페네르바체에서 보여준 하락세로 인해 국가대표팀과 멀어졌으나 2007년, 하노버 이적 후 평소 엔케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요아힘 뢰프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마크를 다시 달게 되었다. 올리버 칸의 국가대표 은퇴 이후 줄곧 넘버 2였던 티모 힐데브란트가 발렌시아 이적 뒤 폼이 떨어지면서 UEFA 유로 2008에 넘버 2 골키퍼로 낙점받아 엔트리에 승선하였다.

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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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미하엘 발락, 엔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그는 저와 함께한 첫 번째 골키퍼였습니다. 저는 그의 침착함과 동정심과 배우려는 자세와 프로다운 자세,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헌신과 기여 행위를 기억합니다. 저는 엔케가 리스본 길바닥에 버려진 강아지들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 기른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경력에 있어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저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디 평화로이 잠들기를 바랍니다.
주제 무리뉴, 엔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우리의 행진에는 항상 엔케가 함께 한다.
요아힘 뢰프, 월드컵 호주전 이후

2009년 11월 10일, 엔케는 하노버 인근의 철로 건널목에서 달려오는 열차 몸을 던지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엔케는 투신 자살 당일에도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3]

그동안 언론에는 엔케가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그는 지속적인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또한 친딸을 잃은 뒤 Leila란 여자아이를 입양을 했는데, 이 딸아이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4] 때문에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다고 한다.

4. 사후

엔케의 자살 소식이 알려지자 독일 전역은 큰 충격에 휘말렸다. 그가 생전에 뛰었던 하노버의 홈 구장인 AWD 아레나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팀 동료들뿐 아니라 수많은 축구팬들이 몰려와 그를 애도했다. 장례식 영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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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의 무덤에 남긴 마지막 글.

훗날, 엔케가 자살하기 바로 전날에 'Lara, papa kommt(라라야, 아빠가 갈게)'라는 글을 딸의 무덤에 남긴 것도 함께 알려지면서 많은 축구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엔케는 그토록 사랑하던 딸 라라와 함께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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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경기 중 독일 대표팀의 벤치에 선수번호 1번이 쓰여진 엔케의 유니폼이 놓여 있는 모습이 알려지면서[6][7] 이 유니폼에 얽힌 사연도 함께 드러나게 되어 다시금 큰 관심을 모았다.

하노버 96의 홈구장인 HDI 아레나 바로 앞에는 엔케의 이름을 붙인 길이 있다.

엔케의 아내인 테레사 엔케는 남편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독일축구협회, 분데스리가, 하노버 96, 니더작센 주 등의 지원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는 선수들을 위한 재단인 "로베르트 엔케 재단"을 설립했다.

2017년 9월 24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2010년 KBS2의 스펀지 2.0에서도 이 사연을 다루기도 했다.

로베르트 엔케가 자살한지 10년이 되는 해인 2019년 11월엔 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인 Robert Enke - Auch Helden Haben Depression (로베르트 엔케 - 영웅도 우울함을 갖고 있다)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2019년 11월 10일 엔케의 10주기에 치러진 분데스리가 11라운드 모든 경기에서 경기 시작전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5. 같이 보기

1 레만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프리츠 · 5 베스터만 · 6 롤페스 · 7 슈바인슈타이거 · 8 프링스 · 9 고메스
10 뇌빌 · 11 클로제 · 12 엔케 · 13 발락 ⓒ · 14 트로호프스키 · 15 히츨슈페르거 · 16 · 17 메르테사커
18 보로포스키 · 19 오동코어 · 20 포돌스키 · 21 메첼더 · 22 쿠라니 · 23 아들러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1982년부터 2004년까지 글라트바흐의 유니폼만 입고 활약한 원클럽맨이다. [2] 당시 바르셀로나의 경우 한 선수가 지속적으로 골키퍼를 맡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돌아가면서 골키퍼를 보는 특이한 로테이션이 있었다. [3] 몸을 그냥 날로 던진건 아니고 차에 탄 상태로 건널목으로 가서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4] 독일의 입양제한법 규정상 우울증 환자에게는 입양이 허용되지 않는다. 독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입양을 할 때 양부모의 인적 사항에 있어서 꼼꼼히 따지도록 하며 우울증을 비롯하여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다면 입양이 허가되기 어렵다. 이는 대한민국도 별 차이 없다. [5] 영상 속에 나오는 음악은 미국의 가수 리앤 라임스가 부른 The Rose(원곡은 벳 미들러)이다. [6]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09년 11월 10일에 열린 독일과 코트디부아르의 평가전 때도 20년지기 친구인 발락이 직접 엔케의 마지막 경기 유니폼을 가져와 벤치에 두었다. [7] 다만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는 1번이 쓰여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이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이나 공번 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월드컵에서 뛴 독일의 주전 골키퍼는 1번이 쓰여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그 선수는 원래 엔케 다음으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던 레네 아들러가 될 뻔 했으나, 개막 직전에 입은 부상으로 낙마하는 바람에 후보였던 20대 중반의 살케 소속 선수가 대신 본선에서 뛸 주전 골키퍼로 발탁을 받았으니, 그가 바로 마누엘 노이어였다. 노이어는 해당 대회에서 보여준 굉장한 활약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지 1년 만에 메가 클럽인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고, 몇 년 뒤에는 뮌헨의 트레블과 독일의 차기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