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0:14:16

로베르 드 보몽

성명 로베르 드 보몽
Robert de Beaumont
생몰년도 1104년 ~ 1168년 4월 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묄룬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브랙클리 성
아버지 로베르 드 보몽
어머니 이자벨 드 베르망두아
형제 엠마, 갈레랑, 위그, 아들렌, 오브리, 마틸다, 이자벨
배우자 아미시아 드 몽포르
자녀 하비사, 로버트, 이사벨라, 마거릿
직위 제2대 레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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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무정부시대 스티븐 왕의 편에 서서 마틸다에 대적했지만, 막판에 마틸다 편으로 돌아섰다.

2. 생애

1104년경 묄룬 백작 및 초대 레스터 백작을 역임한 로베르 드 보몽과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의 딸 이자벨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엠마[1], 갈레랑 4세, 위그[2], 아들렌[3], 오브리[4], 마틸다[5], 이자벨[6]이 있었다. 이중 갈레랑 4세는 그의 쌍둥이였다.

111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와 쌍둥이 형 갈레랑 4세는 성년이 될 때까지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갈레랑 4세와 함께 가장 교육받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현존하는 천문학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법률 문제에 가장 숙련된 행동과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인 레스터 백작 로베르"에 대한 헌사가 포함되었다. 1120년 성년이 된 뒤 상속을 받았다.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 일대에 걸친 가문의 영지(보몽르로제, 포르토오데마르, 브리온, 와트빌, 루무아, 묄룬 백작령)를 물려받고 묄룬 백작이 되었으며, 로베르는 잉글랜드에 남은 재산을 물려받고 레스터 백작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91개 이상의 장원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여기에 1121년, 헨리 1세는 2년 전 브르타뉴 공국으로부터 탈취한 브레퇴유, 파시쉬르헤르를 중심으로 한 상부 노르망디의 광대한 영지를 그에게 넘겼다.

로베르는 브레퇴유 귀족들이 자기에게 반복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걸 진압하느라 힘을 기울였고, 종종 헨리 1세의 궁정을 방문해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잉글랜드 각지에 흩어진 영지를 연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레스터셔에 있는 링컨 주교와 체스터 백작의 땅 일부를 강제로 점령했고, 러프버러에서 멜턴 모브레이와 마켓 하보로에 이르는 작은 영지 블록을 통합했다. 그는 자기 영역에서 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여러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중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수도원은 레스터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과 가렌돈의 시토회 수도원이었다.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로베르는 형 갈레랑 4세와 함께 스티븐 왕의 잉글랜드 왕위 등극을 지지하고 1136년 부활절 의회에서 충성을 서약했다. 이후 로베르는 노르망디로 돌아와서 2년간 다른 노르만 봉건 영주들의 공격으로부터 영지를 방어하고 노르망디 공국에 거점을 확보하려는 마틸다 추종자들의 시도를 격퇴했다. 이때 끄는 퐁생피에르 성을 점령해 자기 영토에 합병했다. 1137년 말 잉글랜드로 돌아와 스티븐 왕의 궁정에 가세했다. 그는 쌍둥이 형제 갈레랑 4세와 함께 스티븐 왕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다.

한편, 로베르와 갈레랑 4세 형제는 솔즈베리 주교이자 잉글랜드 왕국 대법원장인 로저와 그의 가족의 영향력과 부가 막강한 것에 강한 질투심을 품었다. 무정부시대가 본격화되던 1139년, 두 사람은 로저의 조카인 엘리 주교 나이젤과 링컨 주교 알렉산더가 마틸다에게 귀순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여기에 옥스퍼드 거리에서 솔즈베리 주교의 부하들이 연루된 무력 충돌이 벌어지자, 스티븐 왕은 두 사람에게 로저를 체포하고 로저와 그의 가족이 통제하는 성을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공세를 개시해 디비시스 성을 공략하고 로저가 보유하던 막대한 부를 탈취했다. 로저는 스티븐 왕이 자기 형제인 윈체스터 주교 앙리의 설득을 받아들이면서 석방되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 일은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분노를 초대했고, 상당수가 마틸다 편에 섰다.

1139년 무정부시대가 본격적으로 벌어졌을 때 스티븐 왕을 지지했다. 도싯에 있는 레스터 백작의 영지와 그에게 속한 워럼 항구는 마틸다를 받든 핵심 인사인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접수되었다. 이와 동시에, 스티븐 왕은 로베르에게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통제하는 헤러퍼드 성과 마을을 부여했다. 1140년, 로베르는 다시 노르망디로 가서 한동안 마틸다와 앙주 백국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 링컨 전투에서 생포된 뒤, 노르망디 공국의 상황은 악화했다. 1142년, 앙주군은 팔레즈를 공략하고 배셍을 공략했다. 1144년 초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함락했다. 로베르는 노르망디에 있던 모든 영지를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에게 몰수당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그는 스티븐 왕과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잉글랜드에 잔존한 자기 영지를 군대의 약탈로부터 보호하는 데 중점을 뒀다. 특히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제농이 중부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레스터셔와 링컨셔를 공략하려 드는 걸 막으려 했다. 두 사람은 1147년까지 서로 승패를 주고받았고, 로베르는 레스터셔 북부와 체셔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운트소렐 성을 확보했다. 이후 라눌프 드 제농과 평화 협약을 맺었는데, 거기엔 15일 이내에 상대방에게 사전 통지 없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의무, 국경 지역에 성 및 요새 건설을 금지하고, 조약 당사자 중 일방을 왕이 공격하는 경우 다른 쪽은 왕을 돕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레스터 주교, 체스터 주교, 그리고 20명 이상의 기사는 조약 조건 준수를 보증하는 역할을 했다. 왕의 허가 없이 맺어진 두 영주의 평화 협약은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왕권이 완전히 쇠퇴했으며, 영주들이 스스로 자기 영역에서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려는 열망이 강했음을 암시한다.

1149년 우스터셔에 있는 형 갈레랑 4세의 영지의 후견인을 맡았고, 1151년 스티븐 왕이 우스터셔를 접수하는 걸 저지했다. 그 후 스티븐 왕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고, 1153년 5월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노르망디에 있던 자기 영지를 돌려받았다. 그 해 6월에는 헨리 왕자를 레스터 성으로 초빙해 영접했다. 이후 헨리 왕자가 스티븐 왕과 대적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1153년 11월 스티븐 왕과 헨리 왕자 사이에 월링포드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노르망디로 가서 반환된 땅과 성을 접수했다. 또한 그는 헨리 왕자로부터 자신과 그의 후손들이 노르망디의 고위 관리인(세네샬)이라는 명예 지위를 세습할 것을 인정받았다.

1154년 스티븐 왕이 사망한 후 헨리 2세가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헨리 2세는 대관식을 치른 뒤 로베르를 잉글랜드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대법원장은 잉글랜드 사법 행정 체계에서 국왕에 이은 2번째 직책으로, 법원과 지방 정부의 법치 준수에 대한 감독 및 통제, 가장 중요한 국정에 대한 사법 행정, 유럽 대륙에 떠난 잉글랜드 국왕의 대리를 맡는 것 등을 수행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이 직책을 맡으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클라렌던 헌법(Clarendon Constitutions)[7] 플랜태저넷 왕조의 광범위한 행정 기구 형성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1168년 4월 5일 노팅엄셔의 블랙클리 성에서 사망했다. 사후 레스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아미시아 드 몽포르(? ~ 1168): 몽포르 영주 라울 2세 드 몽포르의 딸.
    • 하비사 드 보몽(? ~ 1197): 제2대 글로스터 백작 윌리엄 피츠로버트의 부인.
    • 로저 드 보몽(? ~ 1190): 제3대 레스터 백작.
    • 이사벨라 드 보몽(? ~ 1188년 이후): 제2대 노샘프턴과 헌팅던 백작 사이먼 2세 드 상리스와 초혼, 제르베 드 더들리와 재혼.
    • 마거릿 드 보몽(1125 ~ 1185): 라울 4세 드 토스니의 부인.


[1] 1102 ~ ?, 유아기에 미래의 에브뢰 백작인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와 약혼했지만 그전에 요절했다. [2] 1106 ~ ? 베드퍼드 백작 [3] 1107 ~ ?, 몽포르쉬르리슬 영주 위그 4세와 첫번째 결혼, 기사 리샤르 드 그랑빌과 재혼 [4] ? ~ ?, 샤토뇌프앙티메라즈의 영주 위그 2세의 부인 [5] 1114 ~ ?, 이브리 영주 기욤 드 로벨의 부인 [6] 1102 ~ 1172, 초대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혼, 아일랜드 보안관 에르베 드 몽모랑시와 재혼.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 정부. [7] 1164년 헨리 2세가 로베르의 조언에 따라 솔즈베리 근처 클라렌던 궁전에서 통과시킨 법안. 총 1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잉글랜드 성직자의 특권을 제한하고, 교회의 관할권을 축소하며, 교황의 권위를 축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법에 따라 교회에 세금이 부과되었고, 영적 재판은 성직자들만 심판할 수 있었으며, 성직자에 대한 형사 사건은 세속 법원에서 심리되었고, 왕의 동의 없이 로마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이 이 법안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1172년 헨리 2세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위협을 받자 어쩔 수 없이 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