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6:24:51

라캉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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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acan-symptom10.jpg

1. 개요2. 라캉은 누구인가?3. 라캉철학의 근본 개념
3.1.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3.2. 거울단계
3.2.1. 거울단계에 대한 논란
3.3. "성관계는 없다"3.4. 주이상스3.5. 증세
4. 한계5. 국내 상황6. 국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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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 4. 13~1981. 9. 9)의 철학. 라캉주의(Lacanianism)라고도 한다.

2. 라캉은 누구인가?

프로이트주의를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한 정신분석학자, 철학자이다. 라캉은 정신과 의사에서 시작하여 철학 및 정신분석학계에 손을 뻗친 사람으로, 그 스승격인 프로이트를 방법론적으로 채용, 보충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며[1], 다시 해석함으로서 프로이트를 계승하고 있다. 그의 강좌를 받아 적은 세미나[2] 시리즈에선 프로이트로의 귀환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지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3. 라캉철학의 근본 개념

라캉철학은 그 논란성을 제쳐두고서라도 굉장히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이는 본격적인 철학적 저술 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의 라캉주의는 라캉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 없이 2차, 3차 문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근본 개념들을 서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라캉이 까다로운 것은 그 사람이 몰고 다녔던 스캔들을 감안하면서 그 저작들을 판단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자기가 앞장 서서 연구소를 만들었다가 해체를 시켜버리지 않나 당대의 유명 인사와 식사를 하면서 그들을 당황시킬만한 언동을 보이질 않나 기존까지 지켜왔던 룰을 자의적으로 바꾸질 않나, 그 기행들로 인해 그의 사상에 접근하는 것은 그런 것들도 함께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상의 시발점이 되는 개인 중에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관계가 없는 사상을 펼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를 신경쓰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라캉의 경우에는 그게 다른 비교적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사상가들의 그것보다는 확실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주요 용어>
  • 팔루스(phallus) : 프로이트는 아이의 정신발달에 남근(penis)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Penis는 라틴어 기원의 단어이고, phallus는 그리스어 기원의 단어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의미는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이다. 프로이트는 남근기(phallic phase)를 설명할 때 penis의 동의어로서 phallus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나, 라캉은 페니스(penis)라는 단어 보다는 팔루스(phallus)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특히 팔루스를 또 3가지로 다음과 같이 나눠 설명했다. 1)생물학적 기관으로서의 실재 팔루스, 2)상징적 기능으로서의 팔루스, 3)상상적 기능으로서의 팔루스.
  • 타자(Other/other,Autre/autre) : 불어로 autre는 영어의 other와 같다. 한국어로는 타자(他者)라고 번역한다. 이를 또, 대문자 A로 시작하는 Autre(大타자,the Other), 소문자 a로 시작하는 autre(小타자,the little other)로 나눈다.
  • Three Orders : 1)상상계(The Imaginary), 2)상징계(The Symbolic), 3)실재계(The Real)
  • 거울단계(Mirror stage)
  • 증세(Sinthome)
이렇게 해서 우리의 발기 기관은 <향유>의 자리를 상징하게 됩니다. 그 자체로서도 아니고, 이미지의 형태로서도 아니고, 바라는 이미지에 결여된 부분으로서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발기 기관은 위에서 형성된 의미 작용의 (-1)^(1/2)에 해당하는 것이고 기표 (-1)의 결여가 가지는 기능에 대한 진술의 계수만큼 발기 기관이 복원시키는 <향유>의 (-1)^(1/2)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말이 어려워보이지만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발기라 함은 여기서 상식적인 단어인 음경을 말하지는 않는다. 정신분석적 용어로 팔루스,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 보면 된다. 즉 첫 문장은,
*이렇게 해서 우리의 욕망의 대상은, 향유, 즉 주이상스를 상징해서 우리의 정신에 놓이게 됩니다.

다음 문장은,
*팔루스, 즉 발기는 그 자체로서[3]도 아니고, 이미지의 형태[4]도 아니고, 바라는 이미지의 결여된 부분 [5]으로서 말입니다.

여기서 라캉은 비어있는 부분을 지적함으로써 팔루스, 즉 욕망을 탄생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결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 번째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 욕망하고자 하는 대상은 위의 형성된 의미를 무효화하면서 미끄러지는[6]에 해당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기표가 가지는 기능[7]에 대한 진술의 정도만큼 욕망의 대상이 상징하고 유인하는 향유,(원초적 즐거움, 죽음 충동과 밀접한 욕망의 원인)에 해당합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말이 굉장히 어렵고 난해해보이지만, 이는 기표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를 좋아하는 라캉식 서술 때문에 그렇다. 간략히 정리하면 우리의 욕망은 상상계라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탈피해 불완전하고 결여로 가득한 상징계로 내쫓기다시피 한다. 그러나 상징계로 우리를 유인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팔루스, 즉 욕망의 대상 때문이다.

욕망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차일 수도, 명예일 수도, 직업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대상은 사람으로써 하여금 그것을 소유한다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즉 팔루스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님에 우리는 온갖 환상을 그려 넣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 환상이 충족되는 꿈, 몽상, 소망, 염원에서 우리는 향유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 향유는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완벽한 충족도 아닌, 즉 어중간한, 결여도 아니며 그렇다고 완벽도 아닌 이 어중간한 것이 바로 상징계이며, 정신분석의 목표는 바로 이 어중간함을 견디고 나아가는, 신경증 너머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8][9]

라캉의 사상은 세미나에 따라 나뉘는데 [10] 초기 세미나인 1에서 10에서는 주로 신경증자들이 상징계에 적응하고자 하는데 있어 어떻게 정신분석이 치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들이다. 후기 세미나인 11에서 20은 라캉의 중점이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이동하며, 단순히 상징계에 안착시키는 것만이 정신분석의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와해하고 무마시키는 실재계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이후 21에서 23 세미나에서는 기존의 상징계로의 회귀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넘어 자신만의 상징계를 창조하는(조이스의 생톰) 기제에 대한 일련의 연구 결과들이다.

또한 위의 서술에서 어렵지 않다, 고 하였지만 바로 그 어려움이 바로 라캉이 경계했던 '기표와 기의가 영원히 일치해 더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즉 0, 죽음 자체'이다. 라캉의 사유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진동하며, 심지어는 과거의 확정적이라고 여겼던 의미들도 파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정된 의미와 죽은 의미 하나로 물처럼 흐르는 사유를 재단하고 굳게 해 안정성을 느끼는 경향이 많다. 라캉에 대한 주된 비판들이 모든 세미나들이 동일한 흐름에서 지속된다는 착각 아래 거울 단계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것.

3.1.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세 가지 계를 설정한다.

먼저 상상계는 사회와 구별되는 개인의 주체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인식이 없으면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상상계의 인식을 통해 개인에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계는 인간 개인에게 가장 근본적인 영역이다.

다음으로, 상상계의 반대에 상징계가 서있다. 상징계는 말 그대로 현실의 영역이다. 라캉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사회의 의미화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라캉은 상상계가 상징계에 처음 포섭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우위로 이루어지며, 이후에도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앞서 상상계의 의미를 규정지으며 절대적인 위치에 남아있는 듯 보인다. 다른 한편, 라캉에 있어 '욕망'이라는 개념도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상징계가 상상계를 포섭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상계가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위치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상상계는 '결여'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상상계는 자신과 세계의 안정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점을 꿈꾸게 되고, 이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라캉에 있어 '욕구'와 '욕망'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욕구는 말하자면 상징화에 앞선 지점에 있고, 욕망은 상징화 이후에 등장한다. 간단히 말해 "밥을 먹고 싶다"처럼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욕구라 할 수 있고, "누구누구와 같이 즐겁게 밥을 먹고 싶다. 그러면 정말 행복할텐데.."는 것은 욕망이라는 것. 욕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실재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로 돌아가는 지점을 가리킨다. 상징계가 말할 수 없는 영역을 통해 상상계는 거꾸로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라고 말하는 상징계를 '의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 개념의 정확한 위치인데, 이 개념이 상상계(개인)과 상징계(사회)를 모두 넘어선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슬라보예 지젝 등은 이 개념이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즉,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하지만 상상계가 인식할 수 있는 장소에 실재계가 서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앞서 욕망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바 있는데, 욕망이 향하지만 상징계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지점, 바로 그곳에 실재계가 위치한다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헤겔주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세한 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대부분의 저작을 참고.

권택영 저서의 라캉과 자연을 정리.
'실재계란 텅 빈 죽음이다. 인간은 텅 빈 해골을 역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도치시켜 미화한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인간은 죽음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삶이란 지나치게 빨리 죽음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도착적인 반복이 이에 해당한다. 삶충동이란, 죽음충동을 늦추고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의지이다.'

비 정신분석 전공자의 철학적 의미로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완전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항상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인데,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는 이성적 사유만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상상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dali5804/220521513257
김서영 교수의 일반인을 위한 정의를 참고하면,
'상상계는 그냥 '척'하는 거예요. "이미지에 살고 이미지에 죽는 것." 강박적인 것, 히스테리적인 것 둘 다 약한 거거든요. 그게 다 상상계적인 전략이에요. 상상계는 약한 거, 상징계는 이 현실 자체를 상징계라고 불러요.'

+ 추가적으로 라캉은 상징계를 약화시키고 헐거워진 상상계와 실재계를 대체하는 개념으로서 '조이스의 생톰' 고리를 세미나 23에서 말한다.

3.2. 거울단계

라캉은 상상계 등의 근본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둑맞은 편지의 비유 등 많은 예시를 덧붙여 놓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논란이 되는 비유가 바로 '거울단계'라는 개념이다. [11]

"거울 속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아이는 아직 신체적으로 미숙하여 자기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는데 거울 속 이미지는 완벽함과 통일된 상으로 다가오고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라는 것을 지각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대면하면서 아이는 외부 공간 속에 가시화되는 자신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커다란 환희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아이는 완벽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형상에 도취되는데 이는 나르시시즘의 최초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환호하지만 아이가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는 실제 몸의 감각과 그것에 대해 투영하는 이미지의 괴리가 은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 아이는 아직 운동신경과 몸의 운동 조절 능력이 미숙하여 실제 몸의 느낌은 통일되지 못함에 반하여 이미지는 완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 (김석, 『에크리』, 2006)

'거울단계'의 가장 근본적인 맥락은 아직 상상계적 작용에만 자신을 맡기는 아이가 처음으로 상징계가 제공해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있다. 그렇지만 상징계의 이미지는 유동적인 것이고, 상상계는 그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은 이후의 라캉의 논의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라캉을 접해보려 한다면'거울단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는 '거울단계'에 돌입하면서 자신에 대한 총체적 이미지를 최초로 구성해낸다. 지금까지 아이가 자신의 신체를 파편화된 조각으로 인식하였다면, '거울단계'에서 아이는 최초로 자신의 신체를 전체로 인식한다. 그러한 과정에서는 총체적 신체에 대한 이미지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어머니이다. 아이가 거울을 통해 인식한 자신의 총체적 신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 불완전한 신체를 완전한 신체로 인식하도록하는, 다시말해 완전성과 불완전성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인 것이다. 이는 일종의 '환상'이다. 즉, 거울단계를 통해 아이가 형성하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이미지는 퇴적되어 '자아'의 원형이 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돌입이다.

거울 단계를 통해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돌입한다. 그리고 상술하였듯이, 그 질서는 '환상'적으로 구성되었다.

3.2.1. 거울단계에 대한 논란

라캉이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과학과 철학 사이"라고 말한 바, 라캉은 언제나 수많은 과학도들과 철학도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어왔었다. '거울단계'라는 개념 역시 논란들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 항목에서는 과학도들과 라캉주의자들이 대립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선들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과학도들은 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자각하고, 또 소외된다는 실증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한편, 라캉주의자들은 '거울개념'을 구성하는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개념이 이미 과학의 방법론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등 이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라캉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 대립하는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대한 논란에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이 등장한 것은 1936년으로, 이 시기까지 거울에 비친 상을 보고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질이라는 게 과학계 일반의 인식이었다. 인간 이외의 동물도 거울상을 보고 자기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1970년 고든 갤럽의 침팬지 실험에서야 확인되었다.[12]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식으로 과학적인 일단락이 있고 나서부터는 거울단계를 비유로써 보는 게 적합하다는 지적이 뒤를 이었다. 주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이유로 과학이 아니라는 것. 나중에는 정신분석학을 수학에 비유해서 썼지만 이조차도 정확하게 그런 개념들을 설명하진 못했다.

3.3. "성관계는 없다"

"성관계는 없다"라는 문장은 라캉 욕망 이론의 핵심을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한다. 리비도 등의 개념을 통해 욕망을 생물학적 방향으로 환원시키려 한 프로이트와 라캉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서기도 하는데, 라캉이 이 문장을 통해 말하려 하는 것은 "남녀는 모두 고자다"(...)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관계를 넘어, "존재와 세계는 절대 안정적인 합일을 이룰 수 없다"는 라캉의 철학적 맥락은 이후의 논의에서도 이어진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이상적인 그 자체로서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회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렇게 벌어진 일과 관계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관계를 하면서 개인들은 가능한 쾌락의 형식에 자기 자신을 집어 넣게 된다.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을 타자에 종속된 주체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에 종속된 개인들은 가능한 쾌락의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존재하려고 하는데, 이를 정신분석학의 성욕에 대한 원리에 맞춰 성관계=존재로 보아, 존재는 개인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라고 본 것.

그래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개인이 원하는 방면으로 인식이 가능한)존재는 없다고 풀어 쓸 수 있다. 사실 이 발상 자체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닌데, 대표적으로 테오도르 아도르노 부정변증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그런 건 없다고 라캉과 비슷한 시기에 이야기한 바 있다.

이 문장에 한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 성관계를 할 때의 상대방은 물리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상정한 객체라는 것이다. 쉬운 예로 성행위를 하며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거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체위나 성적 지향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라캉은 이 예들에서 착안하여 무의식 중에라도 인간은 성행위를 하며 상상적 쾌락을 가미(사실상 상상적 쾌락 위주로)하여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약간 위의 말들이 꼬인 것 같은데, 간략하게 말하면 성관계는 완벽한 충족이자 만족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그것에서 도망친다. 완벽한 만족이란 곧 죽음이며, 욕망의 소멸이자 실재계=무, 0와의 합일이기 때문.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성관계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만족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관계는 상상적이다. 완벽한 무언가를 추구하는데, 실은 이것은 해골(권택영 저서의 라캉의 자연과 인간 참조)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아무 것도 아닌 해골에서 인간의 기표는 시작되며, 그러므로 인간은 해골을 해골 아닌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한다. 완벽은 곧 완벽한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아름다움은 해골로 변질된다. 즉 죽음이다. 완벽한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기를 인간은 원하지도 않고, 만족하는 순간 인간이 그 만족을 택할지도 의문이다. (택한다면 스스로 죽음으로써, 죽음 충동을 완성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3.4. 주이상스

라캉 철학의 핵심은 그래서 이 총체적인 흐름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뭐든 그렇게 총체적인 흐름으로 환원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 주이상스(jouissance)는 프랑스어로 즐긴다는 의미로, 영어의 joy, enjoyment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명사인데 라캉에게 주이상스는 정해져 있는 쾌락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 찾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 바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체화의 욕동이 존재하는데, 이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순간을 통해 찾아오게 된다. 이를 라캉은 환상의 횡단, 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고 불렀는데 이를 통해 정해져 있는 쾌락 원칙을 따르고 있던 개인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게 되고, 이를 통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기를 선택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종속되기를 거부했을 때, 기표에 종속되어 동물과 같은 순수한 쾌락이 불가능해진 인간에게 가능한 일말의 쾌락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은 바로 이 쾌락을 선택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정신 분석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두산백과의 정의를 참고하면, 주이상스는 역설적으로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주이상스가 가리키는 기의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라캉 또한 완전하게 해석됨으로써 기표와 기의가 완전한 결합하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
위의 주이상스에 대한 해석들은 라캉의 세미나들, 특히 세미나 23과는 무관하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좀 더 정확하게는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아닌 실재계에 주목하였으며, 자신의 실재에 도달한 자만이 새로운 자신만의 상징계에 도달함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고 현실을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서영 교수의 세미나 23에 대한 논문 참조 바람.
http://blog.naver.com/gradiva72?Redirect=Log&logNo=220652634648&from=postView

위위의 설명과는 반대로, 우리는 주이상스를 어느 정도 억제해야 한다(거세). 여기서 주이상스란 다름 아닌 죽음 충동에의 합일 충동을 의미한다. 자기를 파괴하거나 엉망으로 만드는 것들도 모두 주이상스에 포함된다(마약이라든가, 난교라든가, 기타 등등 혹은 일반적인 증상들도 모두). 그러므로 증상은 곧 죽음을 지연함으로써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삶 충동인 셈이다. 반대로 주이상스는 이를 가속화시키고 더 큰 짜릿함-고통을 느껴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것, 즉 상징계에서 벗어나서라도 죽음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근원적인 충동을 말한다.

3.5. 증세

역사적 흐름 앞에서 개인은 무언가를 하려고 선택할 수 없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그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한계가 정해져 있으니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한계 안에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한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라캉은 이것이 인간이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믿음을 증세라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과정이란 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좌절했지만 라캉은 그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발견한 정신분석이라는 방법론의 정수라고 보았다.

이를 넘어가는 최소한의 쾌락으로서의 주이상스를 설정한 것은 그렇다고 한들 다시 그것을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라캉철학은 아도르노의 그것과 차이를 보이는데, 아도르노는 그렇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라캉은 그렇게 살게 된 과정을 주체적인 차원에서 다시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보았던 것.

이 지점에 라캉철학이 지니는 윤리학적 의의가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 분석을 받는 개인[13], 분석주체가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이 던지는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이것과 마주할 수 있도록 분석가가 지속적으로 분석주체가 만들어낸 증세라는 환상과 마주하게 해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질러야 한다. 여기서 가로지른다 함은, 본래부터 환상이라 함은 유아기때부터 부모의 욕망( 혹은 세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없는 분석주체가 그것들을 설명하고 하나로 엮기 위한 사유들, 관점들인데, 신경증자라 함은 바로 이 환상이 자기파괴-혹은 신경증적으로 자기를 파괴하거나 조화되지 못해서 오는 고통들이다. 가로지른다는 의미는 곧 자신의 환상을 파기하고, 또 환상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며, 또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부모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또 부모 또한 자녀인 나에게 무엇을 욕망하는지 본인조차도 모르는)는 진실에 직면함으로써, 공백 앞에 서고 동시에 그 공백이 오는 근원적인 공허함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캉에 의하면 사실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들의 다양한 판본들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 그 판본을 창조하고 그것을 책임짐으로써(즉 그것이 거짓이고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살겠다-라고 결심함으로써)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신경증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증상(즉 생톰)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4. 한계

라캉은 정신분석학, 철학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라캉의 지나친 교조화 때문에 영향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남미에서는 라캉주의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14] 한국에서는 이상한 종교 집단처럼 되어버린 식이다.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포스트 구조주의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구조주의가 대세였을 시절, 라캉은 미셸 푸코,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와 함께 구조주의의 거두로써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포스트 구조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정신분석은 정신분석 따로, 구조주의를 비롯한 철학적 사조는 그것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는 데에다, 구조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평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영미에서 주류인 분석철학에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따라서 영미권 학문의 경향을 따라가는 한국 철학에도 영향이 적다. 당장 미국 유수 대학의 철학과 교수들이 편집한 주요 현대 철학 논문들을 엮은 핸드북에서 라캉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철학과 대립중인 정신분석학은 분석철학 조류에서는 언급 될 가치조차 없는 것. 굳이 라캉의 연구주제를 미국에서 현재의 분류법에 따라 분류하자면 심리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현대 심리철학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물리주의[15] 논쟁에 라캉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 물론 라캉이 살았던 시기가 시기인 만큼 현대 논쟁에서 비껴서 있는 건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김재권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 물리주의 논쟁은 활발했다.

그럼에도 문학이나 (분석철학 이외의) 철학계에서는 잘만 쓰이는데, 문학은 상징체계(언어)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상징계나 초자아로 도덕적인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라캉 계파도 있다.[16] 특히 욕망의 의미를 셋으로[17] 나눈 점 등에서 철학적 의의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분석학과 철학이 대립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라캉철학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관점을 취하는 자들도 있다.[18] 이로 인해 비평에 대한 공부를 한다면 한번쯤은 접하게 될 인물이다.

라캉은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분석학자라서 철학계가 라캉의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라캉 비판의 방향성에 대한 오해가 있다. 라캉 비판의 초점은 요약하자면, 라캉 정신분석은 과학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 즉 신경증자나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고찰들, 그것의 근거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과학적·논리학적인 근거도 없고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실사례는 너무도 빈약하다.[19] 라캉을 싫어하는 철학자들이 라캉 정신분석을 괜히 비판하는 게 아니다. 당장 북미 주류 심리철학만 해도 물리주의가 주된 주제이다. 거기에 대고 상상계 같은 소리하면 "그게 문화 비평이지 철학이냐?"는 말밖에 안나온다. 그런 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정신분석학은 애초에 과학적·학문적 자질을 결여하고 있으니 철학이니 학문이니 하는 소리를 갖다붙이지 말고 그냥 문화 비평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주된 입장이다. 사실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볼 수는 없기도 하고. 해당 문단 참조

라깡이 자신의 입장을 정신분석학 안쪽이라고 명확히 밝히기는 했다. 이에 관해 김서영 교수의 서평을 아래 인용. 김서영 교수 서평
"라깡의 글들은 대게 정신분석의 임상과정에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는 『햄릿』과 같은 문학 작품의 분석에 있어서도 히스테리, 또는 정신 강박 등의 임상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므로 앞에서 거론된 라깡의 삼계를 임상과 무관한 사회학적 또는 정치적 맥락에서 다루는 것은 라깡 자신의 정신분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임을 밝혀둔다."[20]

5. 국내 상황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문학과에서 더 유명한 학문이 되었고,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문제는 국내에 제대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라캉의 사상은 라캉의 개인적 구어에 종속되어 있기에, 문어로써 변환이 불가능하고, 다른 언어로의 이행 또한 불가능하다고 한다. 언어의 본질적인 속성상 라캉의 사상이 전달되는 것도 100%는 불가능하다고는 하는데, 일단 라캉이 생전에 했던 말이나 썼던 문장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본인이 직접 에크리와 같은 저서에서 말하기를, 내 글은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뭘 위한 것이라는 거냐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낸게 아닐까

사실 이는 맥락을 생각하면 그럴만 하다. 대체로 어떤 사건 속에서 얘기되는 것들은 그 사건 자체를 바깥에서 바라보고 난 이후에 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즉 헤겔의 말마따나 이런 건 그 일이 끝나고 나서야 판단이 가능하다. 생전에는 그 언동이 판단 대상이 안 된다는 걸 이미 전제해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면 그럭저럭 납득할 수는 있다.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뻔한 사실인 건데, 굳이 그걸 부각했을 뿐이니.

주디스 버틀러를 예시로 들어 영미권에서 무시받지 않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주디스 버틀러는 문학 이론 쪽에서 큰 환영을 받지, 철학 쪽에서 잘나간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문학 이론이 프로이트, 라캉 등등 철학계에서는 비주류인 이론들을 많이 다룬다. 주디스 버틀러는 나쁜 글 컨테스트에도 선정될 만큼 '알맹이가 없으면서 말만 현란하다'는 것으로 철학자들에게 욕을 먹기도 한다. 애초에 문학 교수이기도 하고. 또한 일부 철학자가 라캉을 받아들인다 해도 영미 철학계 전반은 여전히 (대륙계 철학과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분석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일부 사례를 가지고 라캉이 영미철학에서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조금 성급해 보인다.

6. 국외 상황

슬라보예 지젝이 라캉을 열렬히 옹호하며 헤겔과 연역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남미에서는 라캉을 포함한 유명 정신분석학자들의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한다. 남미 특유의 정치 상황이 소규모 단위를 통해 진행되는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것. [21] 여기서 정신분석을 진행하는 분석가가 지역 사회의 문제에 중심에 뛰어들 수 있는 매개로서 작용하는데,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적 접근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이야기.

이에 따르면 분석가에게 분석을 받는 개인들이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와 마주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문제라는 것이 소규모 단위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교류가 막혀 있는 상황을 풀기 위한 매개가 되고, 이를 통해 특수한 유물론적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개개인이 자기 스스로의 욕망을 분석하고 타협된 선에서 실행하는 사회는 실제로 라깡이 제시한 유토피아에 가깝다.

국제정신분석학회(IPA)나, 한국 정신분석학회(KAPA)에서 프로이트 이야기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라캉의 이론과 거의 관계가 없다.이론 소개 정도 하는 수준.거기에 심리학에서는 공식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험과 통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며 자연과학에 가까운 연구방식을 채택하는 인지심리학 등에서 정신분석학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연구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임상심리학을 공부한 후 상담사가 되려고 하는 경우에는 상담 방법론으로 정신분석을 골라 수련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분석학계에서는 자연과학적인 심리학적 발견들과 신경생리학적 발견들을 참조하고 흡수하면서 이론을 수정하거나 보완하고 있다.

주류 철학은 정신분석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 애초에 전제 자체가 판단 불가능하다는 무의식을 깔고 들어가는 정신분석학과 판단 가능한 것인 자아에서 시작하는 현상학, 그리고 이해 불가능한 것을 세분화하는 정신분석학과 이해 가능한 것을 총체화하는 체계화 철학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렬하게 나타나고 있는 나라가 프랑스.

[1] 다만 이것은 라캉 본인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측의 '주장'에 가깝다. 보다 정확히는 '라캉이 독해한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식의 보완'이라고 이해하면 옳을 것이다. [2] 사위인 자크 알렝 밀레가 주도를 해서 출판중. [3]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 이론을 참조 [4] 상상계 [5] 즉 결여된 부분이 핵심인데, 비어있는 부분과 욕망을 배태하는 부분으로서의 상징계를 의미 [6] 허수 [7] 즉 아무 것도 아니면서 욕망하게끔 유인하는 [8] 전공자적 시선으로 보면 라캉철학이라기보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재해석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적 치료와 철학은 크게 보면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라캉이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사유를 빌린 것은 맞지만, 상상계와 실재계 등 철학적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후기에 가서 자신의 중심으로 놓고 정신분석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엄연한 관점에서는 철학이라 보기에 무리가 많다. 철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부만을 돌거나 일부분만을 맹공격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상만으로 라캉-지젝을 재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9] 애초에 사유를 빌렸다는 따위의 발언을 일부 철학자들이 극혐하는 것이다. 철학을 엄밀한 과학 혹은 논리학의 연장선상이거나 축제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인데, 논리구조를 통해서 참 거짓을 판별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유를 빌린다는 말부터를 극혐하는 것. [10] 권택영 저서, 자연과 인간 참조 [11] 이는 후기 라캉에서는 별로 중요한 개념은 아니다. [12] 물론 인간과는 달리 자기인식 이후에 더이상 거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13]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분석주체라고 부른다 [14] 하지만 남미 라캉주의자들조차도 영미로 수학하러 떠났다가 라캉주의의 실증성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15] 물리주의(physicalism) : Everything is physical.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과 물질로 구성된 구조들이다. 이것들은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나 심성 같은 것도 물리계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논리가 물리주의이다. 영혼이나 정신과 같은 비물리적인 것이라 보이는 것들은 어떻게 볼것이냐에 대해 물리주의자들은 물질,물체들과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 영혼이나 정신은 인과적으로 무력하고 따라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주의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리계이므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세계는 물리적 세계 밖에 없다. 따라서 심성 같은 것이 물리계 안에서 인과적인 영향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는 식. 유물론(materialism)과 비슷한 것이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물리적인 현상들과 물리학적 법칙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유물론이라는 표현 대신 쓰여지고 있다. [16] 영미계는 물론 대륙에서도 라캉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이 많다. 이 라캉 계파는 대륙에서도 특이한 종자들이다. [17] 각각 '타인이 욕망하는 대상'(불필요한 명품 및 사치품 등)을 욕망, '타인의 욕망'(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등이 누리는 인기)을 욕망, '타인'(애정이나 소유욕 등)을 욕망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모두 함축하여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였다. [18] 헤겔만 봐도 개소리한다고 경기 일으키는 사람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라캉은 철학자도 아니고 철학적 의의는 그야말로 1도 없다. 물론 프랑스 철학 쪽에서는 라캉의 철학적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대립 계기를 라캉 때문이라고 보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정신분석학은 그저 마음에 대한 탁견 쯤으로 취급하고, 정신분석학에는 논리적·학적인 근거가 아예 결여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면 그냥 정신분석학 자체가 문제이므로 라캉은 아예 안중에도 없게 된다. [19] 이게 한국의 학계에서 프랑스 철학을 싫어하는 이유기도 하다. [20] 김영하론을 위하여: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는가>|작성자 gradiva72 [21] 출처 : Marx and Freud in Latin America: Politics, Psychoanalysis, and Religion in Times of Te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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