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해군 제독 라인하르트 셰어 Reinhard Sche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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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Carl Friedrich Heinrich Reinhard Scheer 카를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라인하르트 셰어 |
출생 | 1863년 9월 30일 |
독일 연방 헤센 대공국 오베른키르헨 | |
사망 | 1928년 11월 26일 (향년 65세) |
독일국 마르크트레트비츠 | |
복무 | 독일 제국군 황립 해군 |
최종계급 |
해군 대장 ( Admiral) |
지휘 |
제2전함전대 (II. Geschwader) 제3전함전대 (III. Geschwader) 대양함대 (Hochseeflotte) 해군참모총장 (Chefs des Admiralstabs) |
주요참전 | 유틀란트 해전 |
서훈 |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상(Großkreuz des Roten Adlerordens) 철십자 훈장 1,2급(Eisernes Kreuz II. und I. Klassee) 막스 요제프 군사훈장(Militär-Max-Joseph-Ord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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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저마리네의 제독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역사상 최대규모의 함대결전이었던 유틀란트 해전에서 독일 대양함대를 지휘했다. 사망 이후 이를 기리기 위해 크릭스마리네에서 활동한 도이칠란트급 2번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2. 1차 세계대전
후고 폰 폴 대장의 건강 악화로 인한 사임 후, 셰어는 독일 대양함대 총사령관 직위에 올랐다. 셰어는 해군을 전임자와 다르게 공격적으로 운용하고자 했고, 영국 해안을 포격하며 왕립해군을 도발했다. 빌헬름 2세의 명령으로 잠수함들의 활동이 제약되자, 셰어는 통상파괴전을 포기하고 잠수함을 수상함대를 지원하는 임무에 집중시켰다.셰어의 전략은 영국 함대를 일부 끌어내어 함정으로 유도한 후, 정찰부대와 전함들의 국지적인 전력 우세를 활용해 영국의 전력을 축차적으로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영국 해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승산이 없으므로, 함대 결전은 피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 측도 셰어의 전략을 눈치채고, 역으로 독일 함대를 함정을 파 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두 전략의 충돌이 바로 대규모 전함함대들의 조우전인 유틀란트 해전으로 나타났다. 영국 측도 해상에 나와있는 독일 함대의 규모를 모르고 있었고, 독일 측도 마찬가지였기에 대함대와 대양함대는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셰어는 데이비드 비티와 휴 에반 토마스를 잡기 위해 북진했지만, 갑자기 등장한 젤리코에게 T자 포화를 당하자 전 함대를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반전시키는 Gefechtskehrtwendung nach Steuerbord(우현 임전선회) 기동으로 빠져나갔다. 무력화된 비스바덴을 구원하고, 야간에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셰어는 같은 기동으로 다시 함대를 돌렸지만, 젤리코는 굿이너프의 정찰 덕분에 셰어의 기동을 알고 있었고, 다시 한번 T자 진형에 당한 셰어는 3번째 임전선회 기동으로 후퇴했다.
젤리코와 비티가 독일 함대와 항구 사이를 가로막자, 셰어는 야간에 어둠과 혼란을 이용하여 영국 함대 진형의 취약한 부분을 파악해 뚫고 지나가면서 대양함대를 항구로 귀항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항구로 돌아온 셰어는 샴페인을 주문하며 생환을 자축했다. 셰어는 히퍼와 함께 독일 내에서 영국 함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한 영웅으로써 큰 영예를 누렸다. 히퍼와는 달리 귀족으로의 신분 상승은 거절했다.
그러나 영국 함대와의 전투에서 수상 전력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셰어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선회하였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에도 셰어는 다시 함정을 계획하고 수상함 전력을 활용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홀첸도르프의 건강이 악화되자, 셰어는 1918년 8월에 대양함대 총사령관 직을 프란츠 폰 히퍼에게 넘기고 해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다. 독일의 전황이 악화되자 셰어는 히퍼와 함께 최후의 결전을 명령했지만 킬 군항의 반란으로 독일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