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라울 토로 훌리오 (Raúl Toro Julio) |
생년월일 | 1911년 2월 21일 |
사망년월일 | 1982년 10월 30일 (향년 71세) |
국적 | 칠레 |
출신지 | 코피아포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7cm | 75kg |
소속팀 |
에베르톤 데 비냐 델마르 (1933) 산티아고 원더러스 (1933-1934) 데포르테스 산티아고 (1935) 산티아고 원더러스 (1935-1937) 산티아고 모닝 (1937-1943) 산티아고 나티오날 FC (1944) 산티아고 원더러스 (1945-1948) |
국가대표 | 13경기 / 12골 (1936-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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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레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어린 시절
토로의 고향은 코피아포지만 토로가 어렸을 때 그의 가족들은 콘셉시온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토로는 콘셉시온에서 축구를 배웠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토로는 여러 팀을 거쳐 에베르톤 데 비냐 델마르에서 성인 팀에 데뷔하였다.그는 산티아고 원더러스와 데포르테스 산티아고를 오가다 1937년부터 산티아고 모닝[2]에서 뛰게 되었다. 이곳에서 토로는 1942년에 커리어에서 유일한 칠레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45년 이후에 그는 다시 산티아고 원더러스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기량이 떨어짐을 인정하고 1948년에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
토로의 칠레 대표팀 데뷔 무대는 아르헨티나에서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이었다. 1936년 12월 30일에 있었던 칠레와 호스트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이 토로의 데뷔전이었다. 토로의 데뷔전은 프란시스코 바라요에게 2골을 허용해 끌려가다 추격골이자 데뷔골을 넣었지만 1대2로 점수차를 좁히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토로는 7골을 넣어 대표팀 선배 다비드 아레야노에 이어 2번째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이 되었지만 칠레는 6개 출전국 중 5위에 그쳤다.토로는 칠레 대표팀 소속으로 두 번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더 참가했고 자국에서 열린 1941년 대회에는 주장으로 참가했다.
그는 대표팀에서 13경기에서 12골을 넣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토로는 1930년대 칠레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득점 능력도 뛰어났지만 롱패스를 활용해서 팀 동료들에게 양질의 크로스를 올리는 데에도 능했다.그는 실력과 함께 보헤미안 기질로 팬들에게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4. 뒷이야기
- 칠레엔 라울 토로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축구 선수가 2명이 더 있다. 이름값으로는 이 항목의 토로가 가장 높다. 나머지 2명은 칠레 성인 대표팀 출전 기록도 없다.
- 토로는 주당이었고 파티를 즐겼다. 게다가 상술한 보헤미안 기질로 인해 감독들이 토로를 컨트롤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5. 관련 어록
그는 발보다 뇌를 더 많이 가지고 놀았다.
그는 천재였고 양발로 공을 매우 잘 찼다. 그는 훌륭한 헤더, 스코어러이면서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약하게 연주했다. 때때로 일부 게임에서 토로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호마리우이다.
페르난도 리에라
그는 천재였고 양발로 공을 매우 잘 찼다. 그는 훌륭한 헤더, 스코어러이면서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약하게 연주했다. 때때로 일부 게임에서 토로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호마리우이다.
페르난도 리에라
토로는 내가 본 칠레 축구 선수 중 최고이다.
엔리케 오르마사발(Enrique Hormazábal)
엔리케 오르마사발(Enrique Hormazábal)
6. 수상
6.1. 클럽
-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42( 산티아고 모닝)
-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39, 1941(산티아고 모닝)
- 발파라이소 지역 리그 우승 2회: 1933, 1934( 산티아고 원더러스)
6.2. 개인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회: 1937
- 올해의 칠레 축구 선수 수상 1회: 1943( 산티아고 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