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05 23:43:32

디온 크리소스토모스

이름 디온 크리소스토모스
( 그리스어: Δίων Χρυσόστομος)
출생 40년경
사망 미상
직위 프루시아의 수사학자, 철학자, 역사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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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프루시아 출신의 수사학자, 철학자, 역사가.

2. 행적

40년경 로마 제국 비티니아 속주 프루시아(오늘날 튀르키예 부르사)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수사학 및 철학 교육을 받았다. 특히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다고 하며, 허구적인 주제에 관한 연설을 자주했다고 한다. 한 번은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정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연설해 많은 이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필로스트라투스는 < 소피스트의 생애>에서 그를 "소피스트의 명성을 가진 철학자들" 중 한 명으로 간주했다. 그는 철학자로서 플라톤의 사상과 스토아 학파, 냉소주의 사상을 결합한 절충주의자였으며, 종말론적 신화를 저서에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페르시아인의 후손이라고 칭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에 상당히 박식했다.

그는 프루시아에 살면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수사학과 철학 관련 저서를 집필하다가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 기간(서기 69~79년)에 로마로 이주했다. 그러나 82년 도미티아누스로부터 황제를 음해할 음모를 꾸몄던 관원에게 조언을 한 혐의로 로마, 이탈리아, 비티니아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 그는 데모스테네스의 연설문과 플라톤의 파이돈만 챙기고 거지 행색을 한 채 로마를 떠났다. 그 후 자신을 방황하는 냉소학파 철학자로 내세웠다.

그는 트라키아, 마이시아, 시키티아, 그리고 게타이 등 로마 제국의 북쪽 경계의 지역 및 부족들을 잇따라 여행했다. 이때 다뉴브 강 하류 북쪽 연안에 살고 있던 게타이족의 역사를 집필했다. 당시 도미티아누스는 게타이 족의 강력한 이웃인 다키아인들과 다키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게타이 족을 회유해 다키아인과 전쟁을 벌일 계획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그가 게타이 족의 정보를 담은 저서를 편찬해 황제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귀환 허가를 받아내려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현재 실전되었다.

96년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필로스트라투스에 따르면, 그는 어느 로마군 요새에서 이 소식을 들은 뒤 도미티아누스의 복수를 하자고 외치는 병사들을 설득해 원로원에 반기를 들지 않게 하고 새 황제 네르바에게 충성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네르바가 그를 사면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 황제의 성인 '코케이우스'를 자신의 이름에 추가했다. 그는 프루시아에서 공공 건물 건축에 많은 자금을 기부했다. 몇년 후 네르바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절 임무를 맡아 로마로 갔지만, 로마에 도착했을 때 네르바는 이미 죽었다. 이에 그는 다시 라인 전선으로 가서 새 황제로 옹립된 트라야누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트라야누스는 그를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102년 다키아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트라야누스는 그를 대동한 채 원정을 떠났다. 그는 106년에 다시 로마로 찾아가서 황제의 영접을 받고 왕권에 관한 네 편의 저서를 바쳤다. 당시 디온의 집안은 3대에 걸쳐 막대한 재산을 공공건물 건설 비용으로 기부하느라 빈곤해졌는데, 트라야누스는 그의 재산이 회복되도록 해줬고, 디온은 이를 바탕으로 여러 건축 계획을 수립, 집행했다. 그러나 프루사 출신의 몇몇 시민들은 디온이 참주가 되고자 시민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111년 프루사 출신의 한 부자가 디온이 "자신의 친척들을 매장한 건물에 황제의 동상을 세워 불경죄를 저질렀으며, 공금을 남용했다"라고 고발했다.

당시 비티니아 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문제의 동상은 건물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며 고발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밝혔으며, 고발측 변호사들이 많은 주장을 제기했는데 그 중 일부만 실제 사건을 언급했다며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총독으로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현지에서 바로 판결을 내리지 않고 고발자와 디온에게 니케아로 와서 그들의 주장을 다시 진술하게 했다. 판결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무죄가 선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디온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발 사건 후 10년 이내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각에서는 그 중 한 명이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아버지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