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23:27:03

더 잼

파일:Evening_Standard_logo_투명.png
이브닝 스탠더드 선정 20대 영국 록 밴드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25deg, #1D1D1B, #1D1D1B 20%, #1D1D1B 83.9%, #DD052B 83.9%); color:#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rowcolor=#000,#fff> 2019년 영국의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 The 20 greatest British rock bands of all time를 발표.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레드 제플린 라디오헤드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더 스미스 오아시스 더 큐어 더 클래시 스톤 로지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킹크스 블러 블랙 사바스 더 후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록시 뮤직 티렉스 더 잼 슈퍼 퍼리 애니멀즈 조이 디비전
같이 보기: 영국 밴드, 미국 밴드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 파일:jamlogo.png 더 잼
The Jam
}}}
파일:THE JAM.jpg
▲ 왼쪽부터 릭 버클러 · 브루스 폭스턴 · 폴 웰러
<colbgcolor=#225084><colcolor=#fff>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결성 1972년
영국 서리주 워킹
데뷔 1977년 4월 29일
싱글 <In the City / Takin' My Love>
해체 1982년 12월
멤버 폴 웰러 (기타 & 보컬, 1972-1982)
릭 버클러 (드럼, 1972-1982)
스티브 브룩스 (기타, 1972-1976)
데이브 월러 (기타, 1972-1973)
브루스 폭스턴 (베이스 & 보컬, 1973-1982)
장르 모드 리바이벌, 뉴 웨이브, 펑크 록
레이블 폴리도르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디스코그래피
3.1. 정규 앨범

[clearfix]

1. 개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활동한 모드 리바이벌, 펑크 록 밴드이다.

2. 상세

초기에는 모드 리바이벌로 더 후 킹크스로 비롯되는 60년대 영국 로큰롤을 재해석한 버즈콕스 풍의 펑크를 했다.

후기에는 파워 팝, 뉴 웨이브, 포스트 펑크 등의 느낌이 나는 음악도 선보였다. 이러한 음악적 행보는 이후 등장하는 더 스미스 리버틴즈, 스톤 로지즈 등 자국 출신의 후배 밴드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브릿팝의 대부이자 모드족의 화신이라 불리는 폴 웰러가 처음 음악 활동을 한 밴드이기도 하다. 더 잼은 폴 웰러의 원맨 밴드같은 면이 있었는데[1][2], 그가 프론트 맨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곡을 썼기 때문이다.[3]

대표곡은 'Town Called Malice', 'That's Entertainment', 'Going Underground', 'Eton Rifles' 등이 있다. 특히나 'Town Called Malice'는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려졌으며,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등장하기도 했다.[4] 'English Rose'라는 곡이 있는데 그들의 몇 안되는 어쿠스틱 곡이다. 하지만 웰러는 이 곡을 매우 쪽팔려 했다고...

대표 앨범은 < Sound Affects>, < All Mod Cons>. < The Gift>가 있다.

7-80년대를 다룬 모 영국 소설에서 음악에 관심없는 꼬맹이가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당대엔 국민 밴드라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UK 싱글차트에서 1위곡을 네 곡이나 배출했을 정도. 그러나 반대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제로. 주로 명반선이나 오아시스를 통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더 클래시하고는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정확히는 같은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가 모종의 이유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더 클래시는 '(White Man) In Hammersmith Palais'라는 노래에서 펑크 록을 한다는 애들이 혁명을 갖다 버리고[5] 돈만 좇아 양복을 갖춘다고 디스했다. 음악 성향도 극과 극였기도 했다. 다만, 해체한 지 세월이 지나고 나선 화해를 한 것 같다.

3. 디스코그래피

3.1. 정규 앨범


[1] 심지어 더 잼 해산 후 만든 스타일 카운실도 비슷했고 90년대에 들어서면 아예 솔로 데뷔를 해버린다. [2] 브루스 폭스턴은 해체 당시에 더 잼에는 3명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명은 폴 웰러가 아니었다고 발언했다. [3] 그런 면에서 훗날 오아시스 노엘 갤러거는 자기도 폴 웰러처럼 밴드 내의 메인 작곡가라면서 비슷한 처지라는 말을 한다. 특히 노엘 갤러거는 음악적으로 더 잼과 폴 웰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폴 웰러와 노엘 갤러거는 서로 사이가 굉장히 좋다. 같이 투어도 다니고, 서로의 공연을 도와주기도 한다고. 게다가 집도 옆집이다! 그래서 폴 웰러가 문자로 '야야 재밌는거 보여줄께 옆 창문 봐봐' 라고 날릴 때마다 봐야돼서 난감하다고도 했다 [4] 주인공이 혼자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이 음악에 맞추어 춘다. [5] 실은 폴 웰러도 상당히 정치적인 가사를 많이 쓴 편이긴 하다. 후신인 스타일 카운실도 노동당을 지지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다만 솔로 이후로는 그런 성향이 살짝 줄어드는데, 스타일 카운실때 열심히 해도 별로 효과가 없는거에 좌절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48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48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