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1 22:50:41

대한축구협회 우수선수 해외유학 프로젝트


1. 개요2. 상세3. 역대 유학생 목록4. 프로젝트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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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 대한축구협회에서 정책적으로 실시했던 국내 우수 유망주의 해외 유수 구단 유학 프로젝트였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손흥민 함부르크 SV에 입단할 수 있었다.

2. 상세

2000년 여름, 안정환 세리에 A AC 페루자에 입단하는 등 당시 한국 축구계에는 유럽 진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2년에 열릴 한일 월드컵에서의 선전도 중요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그야말로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체질 개선에 대한 여러가지 정책이 구상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이 당시 세종대학교 교수였던 프로 선수출신 이용수를 신임 기술위원장으로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한다. 이용수는 국내 유망주들의 이른 유럽 진출을 협회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시범케이스로서 당시 K리그 최고 유망주였던 이동국과 청소년대표팀에서 활약한 광운대 소속의 설기현을 유럽에 보내기로 한다. 정몽준 회장 또한 당시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현대중공업의 해외 파견 직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이 업무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그러나 이동국은 자신의 에이전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SV 베르더 브레멘에 임대 이적했고, 설기현은 대한축구협회가 전폭적으로 입단테스트를 지원한 끝에 벨기에의 중견팀 로열 앤트워프 FC와의 프로 계약을 따냈다. 그리고 설기현은 입단 첫 해 한국인 선수로서는 차범근 이후 실로 오래간만에 시즌 두 자리수 득점을 올리는 선수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또한 2002년 월드컵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면서 4강 진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성과에 고무된 대한축구협회는, 아예 이 업무를 연례 업무로 격상하며 하나의 정규 프로젝트로 발족한다. 2002년 5명의 선수가 프랑스 FC 메스로 건너가면서 이 프로젝트의 1기 선수들이 되었고, 이후 총 29명의 유망주들이 이 프로젝트로 유럽 혹은 남미 유수의 구단으로 1년여간 유학을 가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탑 유망주들을 보낸다는 것은 결국 K리그 유소년팀 선수들을 협회 차원에서 강탈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생기게 되었고, 결국 2009년 6기생들을 마지막으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이후 2011년 조중연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의 주도로 부활이 추진되었으나 역시 구단들의 반발로 불발되었다.

현재는 축구 유학이 민간에서 대중화되었고, 2000년대에 비하여 K리그의 유소년 인프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상황이라 이 프로젝트를 다시 부활시키기는 명분도 크지 않고 실익도 많지 않다는 평가다.

3. 역대 유학생 목록

볼드체가 된 선수들은 훗날 A매치를 소화한 선수들이다.

당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한 기수당 5~6명을 유학보낸다고 봤을 때 그 중 한 명만이라도 훗날 대표팀에 들어오면 대성공이라 언급했었다. 그 취지에 비춰볼 때, 이 프로젝트는 상당한 아웃풋을 내면서 나름 성공을 거뒀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1기의 양동현 레알 바야돌리드 CF와의 유소년 계약을 따냈고, 어경준과 강진욱은 프로젝트 종료 후에 FC 메스의 연장 계약을 제안받고 리그앙 경기에도 뛰게 되는 등 프로 데뷔까지 해낸다. 이후에도 남태희가 레딩을 거쳐[2] 발랑시엔 FC에 입단했고, 이용재 또한 FC 낭트에 입단하는 등 꾸준히 젊은 유럽파들이 탄생했다. 그 절정은 바로 손흥민이었다. 유학을 갔던 함부르크 SV와 계약을 연장하면서 정식 입단하게 되었고, 이후 그는 함부르크 1군, 레버쿠젠을 거쳐 토트넘에서 월드클래스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4. 프로젝트 중단

이렇듯 표면적 결과가 괜찮았던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국내 최고의 유소년 선수들이 일찍부터 해외로 유출되는 꼴이었고, 이것이 장기화될 경우 K리그 구단들의 유소년 투자 의욕 저하가 심히 우려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현장 일선에서 나오고 있었다. 실제 이 시기는 유럽은 물론 K리그 드래프트의 여파로 인해 일본 J리그에도 수많은 유망주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유망주 유출 문제에 예민할 수 밖에 없던 시기였다.

또한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여러 한계점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체육 단체가 민간 선수 이적시장에 개입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적시장에서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FIFA 공인 에이전트들의 사업 영역을 침범한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축구 유학 시장이 점차 성장하면서 이 같은 비판은 더욱 강해졌다.

여기에 FIFA의 18세 미만 해외 진출 금지 규정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심지어 이 규정이 소급 적용되면서 당시 FC 바르셀로나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이승우 백승호가 공식 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받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규정 도입 당시 FIFA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며 예외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FIFA가 더 이상 이를 예외로 처리하지 않으면서 이 프로젝트 또한 동력을 잃게 되었다.
[1] 본래 볼턴 원더러스 FC로 섭외되었으나, 계약 1달만에 계약이 파기되어 왓포드 FC로 대체되었다. [2] 레딩과 1군 계약까지 체결했으나, 당시 더욱 빡빡했었던 영국 취업비자 취득에 끝내 실패하면서 레딩에 남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