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19:49:10

대한노 1세


대한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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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o I the Great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미상
고대 카르타고[1]
사망 기원전 340년대
고대 카르타고
국적 카르타고
가족 기스코(아들)
지위 카르타고 시라쿠사 사령관
참전 전쟁 시칠리아 전쟁[2]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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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정치가. 사라쿠사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워 1인자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참주가 되려는 마음을 먹고 쿠데타를 꾀했다가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

기원전 368년, 카르타고와 참주 대 디오니시오스가 이끄는 사라쿠사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카르타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군사력이 약해졌고, 리비아인과 사르데냐인이 카르타고의 지배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에 카르타고 정계에서는 그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마고 가문의 위세가 약해졌고, 한노와 수니야트가 권력을 놓고 분쟁했다. 한노가 승리하자, 수니야트는 디오니시오스에게 카르타고의 군사 기밀을 알려줬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수니야트는 처벌받았고, 카르타고에서는 그리스어 사용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디오니시오스는 카르타고의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인을 몰아내려 했다. 그의 군대는 에릭스 산을 점령하고 셀리눈테 시를 점령한 뒤, 릴리베이를 포위했다. 그러나 한노가 200척의 배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여, 에릭스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고, 시라쿠사군은 곧 철수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이 시점에서 프린캡스 카르타기니엔시움(princeps Carthaginiensium)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동등한 자 가운데 1인자'라는 의미이다.

기원전 345년, 소 디오니시오스가 몰락하면서 시라쿠사가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독립하였고, 그중 레온티니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완전 장악하고 히케타스를 시라쿠사의 새 통치자로 삼고자 하였다. 한노는 히케타스를 돕기 위해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당시 그가 보유한 군대는 150척의 함선, 50,000명의 보병, 300명의 병거, 2,000명의 기병에 달했고, 수많은 공성 기계와 막대한 식량도 갖췄다고 한다. 이들은 엔텔라로 진격해 시골을 황폐화시키고 도시를 봉쇄했다. 이에 엔텔라 주민들이 주변 도시들에 구원을 청하자, 가렐리아가 1,00명의 호플리테스를 파견했으나 격파되었다. 결국 엔텔라 시는 항복했고, 히케타스는 소 디오니오스가 소유한 오르티가 섬을 제외한 시칠리아 전체를 소유할 수 있었다.

얼마 후, 히케타스는 코린토스에서 파견된 티몰레온 휘하의 그리스 용병대가 레기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카르타고군에 전했다. 카르타고군은 그리스 함대를 차단하기 위해 20대의 삼단노선을 파견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레기아인들을 도우러 왔을 뿐 시칠리아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거짓말 해 카르타고 사절과 함대를 속이고, 시칠리아의 도시 타우로메니아에 잠입했다. 그는 타우로메니아에서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시라쿠사로 진군해, 시라쿠사 일부를 장악한 뒤 소 디오니시오스를 코린트로 이송시켰다. 한노가 상륙을 막지 못하자, 실망한 카르타고인들은 그를 소환하고 마고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마고는 5~6만의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를 포위했지만, 카타나에 주둔한 티몰레온이 시라쿠사에 지속적으로 보급해줬기 때문에 함락이 어려웠다. 이에 마고와 히케타스는 카타나를 공략하기로 하고, 최고의 전사들을 선발해 그곳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수비대 지휘관 네온이 포위한 적군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경계가 허술한 점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하여 그들을 도망치게 만든 후, 시라쿠사의 또 다른 지역인 아흐라디나를 점령하여 그 주변의 성벽을 요새화하고 사방에 경비병을 배치했다. 마고와 히케타스는 카타나로 진군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하자 즉시 철수했다.

한편, 한노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의 추가 병력이 상륙하는 걸 저지했다. 그러다가 악천후가 며칠간 지속되자 적이 건너지 못하리라 여기고 시라쿠사로 항해하여 요새를 지나면서, "코린토스군이 바다를 건널 때 격파했다"라고 외쳐서 수비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날이 개었고, 그리스인들은 해협을 지키는 함대가 없는 걸 보고 재빨리 뗏목과 어선에 올라 시칠리아 해안으로 이동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에 상륙한 그리스군과 합세한 티몰레온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시라쿠사에서 카르타고군을 몰아냈다. 마고는 몇 차례의 패전을 겪은 뒤 히케타스의 간절한 설득을 뿌리치고 아프리카로 도주했다가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 일련의 실패로 위상이 떨어지고 지휘권마저 박탈당하자, 한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뒤엎은 뒤 참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딸의 결혼식과 나라의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 연회를 벌이겠다는 핑계로 원로원 의원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모이게 한 뒤 한꺼번에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곧 발각되었고, 한노는 카르타고 시를 탈출한 뒤 2만 명의 노예를 무장시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리비아인과 누미디아인이 자신의 편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돕지 않았고, 그 사이에 진압군이 요새를 공략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노는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그의 일가족과 친적들도 처형되었다. 아들 기스코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해외로 도주했다가, 기원전 340년 크리미스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이 사라쿠사군에 패배한 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환했다. 그는 시라쿠사 정부와 협의해 카르타고의 시칠리아에서의 영향권을 유지하는 평화 협약을 체결하는데 기여했다.
[1] 튀니지 튀니스 아밀카르 [2] 제6차 시칠리아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