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참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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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bfff><colcolor=black> 소 디오니시오스 Διονύσι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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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397년 ~ 미상 |
출생지 | 시칠리아 시라쿠사 |
사망지 | 그리스 코린트 |
지위 | 시라쿠사 참주 |
국가 | 시라쿠사 |
가족 |
대 디오니시오스(아버지) 도리스(어머니) 헤르모크리토스(동생) 히파리노스(이복 형제) 니사이오스(이복 형제) 아레테(이복 누이) 소프로시네(이복 누이) 아폴로크라테스(아들) |
시라쿠사의 참주 | |
재위 | 기원전 367년 ~ 기원전 357년 |
전임 | 대 디오니시오스 |
후임 | 디온 |
시라쿠사의 참주 | |
재위 | 기원전 346년 ~ 기원전 344년 |
전임 | 니사이오스 |
후임 | 티몰레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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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쿠사 5, 10대 참주.2. 생애
시라쿠사 4대 참주 대 디오니시오스와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의 로크리 출신의 귀족 여인 도리스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헤르모크리토스가 있었으며, 이복 형제로 히파리노스, 니사이오스, 이복 누이로 아레테, 소프로시네가 있었다. 아레테는 기원전 375년경 어머니 아리스토마체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삼촌인 디온과 결혼했으며, 그는 이복 누이이자 디온의 조카 딸인 소프로시네와 결혼했다.대 디오니시오스는 장남인 그를 신뢰하지 않아 자신을 찾아올 때 비무장 상태인지를 철저하게 조사받은 후 들어오게 했으며 국정에 관여하지도 못하게 했다. 이는 조카인 히파리노스 또는 니사이오스가 후계자로 지명되게 하려는 디온의 꼬드김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디온은 기원전 367년 대 디오니시오스가 사망한 뒤 그가 참주로 선임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대신 정무 경험이 없었던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플라톤은 디온의 주요 조언자가 되었고, 이를 기회 삼아 자신의 국가 철학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기원전 366년 두 번째로 시칠리아를 여행한 플라톤은 디온의 환영을 받으며 시라쿠사 궁정에 자리잡았다.[1] 그러나 시라쿠사에는 디온과 플라톤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필리스토스였다. 이 인물은 과거 대 디오니시오스에게 밉보여 시라쿠사에서 쫓겨났다가 소 디오니시오스 집권 후 복귀한 인사로 소 디오니시오스를 디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당시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었다. 디온은 카르타고에 서신을 보내 평화 협상을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디온의 반대 세력에게 발각되어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넘겨겼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필리스토스의 조언에 따라 디온을 반역죄로 고발했으며 디온은 시라쿠사에서 추방되어 그리스 본토로 망명했다.
디온이 추방된 후에도 플라톤은 이후에도 훌륭한 철학자로서 시라쿠사에서 존중받았지만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기원전 365년 시라쿠사를 떠났다. 이후 소 디오니시오스는 카르타고와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기원전 361년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을 다시 초빙했다. 플라톤은 친구 디온이 용서받는 것을 돕고 싶었던 반면 그는 플라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 싶어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의 설득을 받아들여 디온을 일단 시라쿠사로 복귀시켰지만 디온이 플라톤의 제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지자 자신을 실각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해 그의 소유물을 몰수했다. 플라톤은 궁정의 의심을 사자 기원전 360년경 시라쿠사를 떠났다.
디온은 이대로 가면 참주에게 처형당할 게 자명하다고 여기고 반기를 들기로 하고, 그리스로 가서 용병을 고용했다. 기원전 357년, 디온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소 디오니시오스는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로 항해해 디온을 요격할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디온의 예상과는 달리 5척의 배와 800명 가량의 용병을 데리고 카르타고의 영역이었던 시칠리아 서쪽에 상륙했고 카르타고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디온의 군대가 시라쿠사에 도착하자, 소 디오니시오스의 무능한 통치에 질려 있던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디온은 시라쿠사를 손쉽게 장악했다. 오직 참주의 권력의 중심인 오르티가 섬 요새만이 소 디오니시오스 휘하 용병들의 수중에 남았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오르티가 섬으로 이동한 뒤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 여러 전투가 벌어진 끝에 필리스토스가 이끄는 함대가 시라쿠사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하고 전사하면서 그의 지지 기반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몇 척의 배와 함께 탈출해서 이탈리아 남부의 로크리로 갔으며 아들 아폴로크라테스가 지휘하는 일부 용병은 오르티가에 머물렀다가 기원전 355년 신변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한 뒤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로크리 시의 참주로 군림하면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한편, 과거에 아버지가 확보해뒀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일부 도시들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자 노력했다.
기원전 354년, 그를 몰아내고 시라쿠사의 참주로 군림했던 디온이 피살당하면서 시라쿠사의 혼란이 심화되었다. 디오니소스의 이복 형제인 히파리노스가 정권을 장악한 뒤 압제정치를 펼치다가 몇년 후 사망하고 뒤이어 집권한 니사이오스는 유약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이 때를 틈타 시라쿠사 탈환전을 감행해서 기원전 346년 마침내 시라쿠사 입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로크리의 주민들은 그가 부재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그를 따르던 용병들을 모조리 몰아냈고 로크리에 남겨졌던 가족들은 모조리 살해되었다.[2] 이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시라쿠사의 패권은 완전히 사라졌고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 국가들도 시라쿠사에게 등을 돌리고 독자적인 참주를 세웠다.
그중 한 명인 히케타스는 레온티노이 시에 군림한 뒤 카르타고 및 시라쿠사 내 반 디오니시오스 세력과 손을 잡았다. 양측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진 끝에 기원전 344년 히케타스가 시라쿠사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소 디오니시오스는 다시 오르티가로 피신했다. 한편, 티몰레온 휘하의 함대가 시라쿠사의 모도시인 코린트에서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시라쿠사인들이 개입을 요청하자, 티몰레온은 함대를 이끌고 오르티가로 진군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고심 끝에 히케타스보다는 티몰레온에게 항복하는 편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항복했다. 티몰레온은 그로부터 오르티가를 접수받은 뒤 그리스 본토의 코린트로 이송시켰다.
그는 코린트에서 평범한 시민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기원전 337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를 만났다고 전해지나 사망 년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