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관중 일대의 네 관문[1] 중 하나. 일명 산관이라고도 불린다. 바오지시 남쪽 교외 친링 산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쓰촨성과 산시성의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진한 시대에 유방은 도를 수리하고 진창으로 진격하여 삼진을 정벌하는 것을 택해 이곳 대산관을 지나간다. 또한 삼국시대, 조조가 장로를 서정할 때 이곳을 거쳐갔으며 이후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이 산관으로 돌아와 진창을 에워싸고 항복을 권하자 조진은 이를 거부했다고도 하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대산관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가지고 있고, 예로부터 사천 지역과 섬서성 출신 병사들이 반드시 다투는 곳으로 유명했다.2. 역사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산관에서 발생한 전투는 70여 차례 벌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대산관은 서한[2]에 설치되어 명나라 말기에 폐기되었다. 관문 터에는 '진령'이라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고 산관령의 옛 산관 관문터 동쪽에는 '고대 산관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한왕 유방은 한신의 설인 도를 수리하고 진창으로 진격하여 삼진을 정벌하는 것을 채택하여 한나라에서 옛 길로 진창을 떠나 이 관문을 통과하였다. 후한 시대 연잠은 군사를 이끌고 산관으로 들어가 진창에 이르렀고 한 헌제 시기 조조는 장로를 공격하여, 진창을 거쳐 이곳 대산관을 건넜다. 이후 촉한 시기 제갈량이 산관을 나와 진창을 공격했다.
또한 정강의 변 이후 완안올출(김올출)이 이끄는 금군이 사천 지역을 공격하나, 오린에게 가로막힌다. 1141년 소흥화의 이후에는 이 곳 대산관으로부터, 회하 일대까지 금과 남송의 국경선이 되었다.
이후 금 선종이 몽골군의 위협을 피해 중도에서 변량[3] 지역으로 천도한 이후 남송이 금에 바치는 세폐를 끊었다는 구실로 금나라가 이곳 대산관을 함락시켰으나 남송의 군대에 가로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