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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FF>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4대 데스포티스 Νικηφόρος Α΄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
|
칭호 | 데스포티스 |
출생 | 1240년 |
사망 | 1297년 (향년 56~57세) |
재위기간 | 1266년/ 1268년 ~ 1297년 |
제호 | 니키포로스 1세(Νικηφόρος Α΄) |
성 | 콤니노스 두카스 |
휘 | 니키포로스 콤니노스 두카스(Νικηφόρος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아버지 |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
어머니 | 테오도라 페트랄리페나 |
배우자 |
마리아 바타치나 안나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 |
형제 |
안나 콤니니 두케나 엘레니 앙겔리나 디미트리오스 두카스 콤니노스 |
자녀 |
마리아 앙겔리나 콤니니 두케나 타마르 앙겔리나 콤니니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
종교 |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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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4대 데스포티스.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이어갔다.2. 생애
이피로스 제3대 군주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와 테오도라 페르랄리파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249년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와 약혼하였고, 1256년 테살로니키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1258년에 사망했고 자식을 낳지 못했다. 1259년 9월 부친이 펠라고니아 평원에서 시칠리아 왕국- 아카이아 공국과 연합하여 미하일 8세에 대항할 때 참여했다. 그러나 펠라고니아 전투는 참패로 끝났고, 미하일 8세는 1259년 말 이피로스를 공략했다. 그는 적군을 피해 시칠리아로 망명했고, 거기서 병력을 지원받고 돌아와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미하일 8세와 계속 전쟁을 벌였으나, 1264년 패배를 면치 못했다. 결국 미하일 2세는 미하일 8세의 우위를 인정하였고, 그는 미하일 8세의 조카 안나 칸타쿠지니와 결혼했다. 1267년 또는 1268년 부친이 사망한 뒤 이피로스 전제국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반면 이복동생 요안니스 두카스는 테살리아를 물려받았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이자 이피로스의 우군이었던 만프레디가 전사하고 앙주의 샤를이 카를루 1세로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이에 맞섰지만 1272년 디라키움을 잃었다. 1274년부터 미하일 8세가 시칠리아 왕국를 상대로 공세를 가하자, 카를루 1세는 이피로스와 손잡기로 했다. 그는 이에 동의하여 1276년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 시칠리아 왕국과 함께 동맹을 맺었다.
1278년 3국 동맹군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부트린트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1279년 카를루 1세의 봉신으로 들어가고 부트린트를 시칠리아 왕국에 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군이 동로마군에게 패배했고, 알바니아에 있던 이피로스의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게 잠식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 민중이 봉기하여 카를루 1세의 프랑스군이 학살당한 시칠리아의 만종이 발발하면서,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를 잃어버렸다. 후원자가 힘을 잃자, 그는 동로마 제국에게 접근하였고, 아내 안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서 협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피로스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그는 그 대가로 이피로스에서 무제한적인 통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1284년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들인 미하일을 이피로스로 유인하여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에 분노한 요안니스는 1285년 군대를 일으켜 아르타 주변 지역을 유린했다. 한편 딸 타마르를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 결혼시켜서 이피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가를 통합하려 했지만, 미하일 9세가 아르메니아의 마리아를 택하면서 실패했다. 이피로스 내 반 동로마 성향의 귀족들은 그에게 나폴리 왕국의 카를루 2세와 협상하라고 설득했고, 그는 이에 설득되어 1291년 나폴리 왕국에 동맹을 제의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 소식을 접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피로스에 군대를 보내 응징하려 했지만, 카를루 2세의 봉신인 케팔로니아의 리카르도 오르시니와 아카이아의 플로렌스 대공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피로스는 이제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았고, 그는 딸 마리아를 리카르도 오르시니의 후계자와 결혼시켰으며,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루 2세의 아들인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결혼시켰다. 타마르와 필리포 1세의 결혼식은 1294년에 열렸고, 타마르의 지참금으로 아드리아 해의 해안 요새를 양도했다. 그러나 아드리해 해 연안의 그리스 주민들은 필리포 1세의 지배를 받기 싫어했고, 테살리아의 두카스 가문은 이를 틈타 필리포에게 넘어갔던 요새 대부분을 점거했다. 하지만 곧 나폴리 왕국이 개입해 요새를 되찾았고, 1296년 나폴리와 테살리아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니키포로스는 1297년경 사망했고, 아들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그 뒤를 이어 이피로스의 군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