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문 배경
빌지워터에는 처음으로 물에 잠긴 부두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쓸쓸한 전설이 하나 있다. 육중한 갑옷을 걸친 노틸러스라는 이름의 거인이 푸른 불꽃 제도 해안가의 검푸른 물을 배회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을 복수심에 사로잡힌 그는 예고도 없이 거대한 닻을 휘둘러 가여운 자들을 구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빌지워터의 공물'이라는 절대 어겨선 안 될 약속을 잊은 자들을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끌려들어 간 자는 누구도 그곳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한다. |
2. 장문 배경
노틸러스의 전설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 남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선술집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옛 전설에 따르면 그는 원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노틸러스의 이름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단순한 뱃사람이 아니라 난파선의 보물을 인양하는 잠수부로 기억하고 있다. 푸른 불꽃 제도 최남단을 지나면 배들의 무덤이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재물로 영생을 사기 위해 축복받은 땅을 찾아 항해하다 길을 잃은 배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어느 화창한 날, 이곳의 해수면 아래를 부유하던 화물들이 반짝거리며 손짓했다. 많은 배들이 주인 없는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잠수부를 찾았고, 그 육중한 체구로 빠르게 잠수할 수 있는 노틸러스가 단연 으뜸이었다. 갤리온선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폐활량을 가진 노틸러스는 몸을 줄에 매지 않고 물에 들어가곤 했다. 그는 선원들에게 항상 금이나 보석을 잔뜩 가져다주면서도 특별 급료 한 번 요구한 적이 없었다. 단지 바다로 나가기 전 바다에 동전을 던져 달라고 선장에게 부탁하는 게 전부였다. 이는 드넓은 바다를 숭상하고 달래기 위한 뱃사람들의 미신으로, 바다를 경외하는 많은 선원들이 무사귀환을 바라며 공물을 바치곤 했다. 수년에 걸친 인양 작업으로 찾기 쉬운 보물이 점차 고갈되고 인양된 보물도 줄어들어 가던 어느 날, 노틸러스의 동료들은 배와 고용 문서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매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선장이 배에 승선한 그날 아침의 여명은 유달리 붉은 빛이었다. 이국의 항구 출신인 그는 황동과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잠수복을 가져와 노틸러스에게 맞게 조정했다. 그가 이 배의 선장 자리를 산 것은 사실 노틸러스 때문이었다. 선장이 맑은 날에도 어두운 기운이 감도는, 다 허물어져 가는 배를 고집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강철 잠수복은 인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해저의 압력을 견딜 수 있었다. 그 시간이면 미지의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보물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선원들은 굶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낫다 생각했고 노틸러스의 몸에는 어느새 잠수복이 채워지고 있었다. 나무 갑판이 잠수복의 무게에 눌려 삐걱거렸다. 그때, 극심한 공포가 노틸러스의 목까지 차올랐다. 선원 중 누구도 바칠 공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틸러스가 물에 들어가자 선장은 웃으면서, 수염 달린 여신의 품에 잠들어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자신들에게 상상하는 것 이상의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장담했다. 노틸러스가 수면 위로 돌아오면 그제야 제물을 받치겠다는 것이었다. 노틸러스가 물속으로 들어가자 머리 위의 빛은 희미해졌고 사방은 고요해졌다. 강철 잠수복 안에서 울려퍼지는 그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바로 그때, 심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와 그를 잡아채 끌어 당겼다. 노틸러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물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선장이 원했던 보물이 아닌, 오랫동안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섬뜩하고 기이한 힘이었다. 노틸러스는 물 밖 세상과의 마지막 연결 고리인 닻줄을 움켜잡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미지의 힘에 저항하며 수면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금속으로 둘러싸인 그의 거대한 손가락이 수면에 닿기 직전 닻줄이 끊어져 버렸다. 노틸러스는 잠수복 안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비명을 지르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라앉는 닻을 꽉 쥔 채 칠흑 같은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시커먼 줄기들이 몸을 휘감았고, 노틸러스는 타고 왔던 배가 저 멀리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저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무언가… 달라진 후였다. 어둠은 더 이상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육중한 강철 잠수복은 매끄러운 껍질처럼 태고의 힘과 그의 영혼이 맺은 결속을 감쌌다. 한 줄기 빛도 닿지 않는 이 깊고 캄캄한 해저 바닥에 갇힌 노틸러스가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 선장은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노틸러스는 다짐했다. 모든 자들이 바다에 공물을 바치게 만들 것이라고. 이 다짐에 홀린 듯 노틸러스는 해안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빌지워터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수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선장도, 선원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되돌아갈 삶도, 복수할 대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노틸러스는 바다로 돌아갔다. 탐욕스러운 자들을 향한 분노를 드러내며, 거대한 닻을 내리쳐 그들의 배를 부숴버렸다. 이따금 파도와 함께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해안선 너머로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의 노틸러스는 여전히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
3. 뱀
아냐, 아냐. 앉아도 된다구. 이리 와서 같이 술에 빠져 보는 게 어떤가, 친구... 참, 뱃사람이 빠진다는 말은 하면 안 되지. 헤헤. 그래, 난 난파선을 몇 척 봤지. 그중엔 내가 자네만큼 젊었을 때 타던 배도 있었다네. 뱀이라는 이름의 배였지. 지금은 갈지자 해협 아래에 잠들어 있지만. 나도 유일한 생존자였어. 한 잔 사면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이거 말이야? 안 돼. 이건 쓸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친구. 이건 내 행운의 크라켄 주화야. 바다에 바치는 공물이지. 그래, 공물.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바다의 분노가 닥치리라."라는 말. 뱃사람이라면 다 알잖나. 수염 달린 여신이 내리는 벌 말이네...[1] 그렇다면 자넨 노틸러스에 대해 들어 본 적 없겠구먼? 심해의 타이탄 말일세. 주인장! 여기 한 잔씩 따라 줘. 맘에 드는 아가씨군. 이건 맥주 한 잔이 들어가야 나오는 이야기라네... 여기 이 친구가 살 거야. 크, 죽이는군. 그러니까 30년 전쯤 됐나.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 그 당시 난 학살 함대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작살잡이였어. 우리는 도끼처럼 뾰족한 지느러미를 가진 레비아탄, 그중에서도 큰놈을 잡아 항구로 운반하던 중이었지. 동이 트기 직전이었어. 빌지워터의 불빛이 저 멀리서 깜빡이며 손짓하고 있었지. 칼날고기와 포악한 상어 떼가 놈의 지느러미에서 흐르는 피를 따라 우리 뒤를 바짝 쫓고 있었고 말이야. 그런데 선장이... 뭐,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선장을 좋아하지 않았어. 신뢰하기 힘든 부류였거든. 아무튼 그가 출항하기 전에 공물을 바쳤다고 당당히 얘기하더군. "크라켄 주화 한 닢이 내가 바칠 수 있는 전부라네"라면서. 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그가 바다로 금화를 던지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지. 당연히 수상할 수밖에. 게다가 선장은 구두쇠인 데다가 부두의 건달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어쨌든 배는 출발했지. 그리고 타이탄이 우리를 공격했다네. 엄청나게 거대한 닻이 예고도 없이 물밑에서 '쾅' 하고 올라오더군. 용골을 완전히 박살내곤 주갑판까지 뚫고 올라왔지. 그리고 배를 붙들고는 물속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한 거야... 세상에, 난리도 아니었지. 파도는 거세게 휘몰아치고, 선원들은 갑판에 내동댕이쳐지고, 바다의 포식자들에게 잡아 먹히기도 했다네. 난 선장을 붙들고 소리쳤어. "이 사기꾼! 네가 공물을 바치지 않아 여신이 벌을 내린 거다!" 배는 빠르게 침몰했어. 하지만 그때 선체의 판자가 떨어져 나가 틈이 생기면서 닻이 깊은 물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지. 만약 거기까지였다면 더 많은 동료들이 탈출했을 거야. 하지만 노틸러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볼일이 남아 있었지. 선체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더군. 타이탄이 갑판으로 올라오자 엄청난 무게 때문에 배가 한쪽으로 쏠린 거야. 한때는 인간이었을지 몰라도, 그날 밤 파도를 뚫고 나타난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네. 난 선장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질렀어. "네놈 탓이야!" 그러자 선장의 눈이 커지더군. 노틸러스가 다가오고 있던 거야... 그래서 난 그를 기울어진 갑판 쪽으로 밀쳐 버렸어. 그런데 말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노틸러스가 한 손으로 선장을 낚아챘지 뭐야! 정말 엄청나게 크더군. 그자도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몸집은 아니었는데 노틸러스의 손가락이 선장의 몸을 완전히 움켜쥐었지. "그자를 바치겠소!" 난 그렇게 외치고는 바다로 뛰어들었어. 물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모르겠군. 고작 몇 초였겠지. 하지만 엄청난 시간이 흐른 듯했네. 그런데 바다의 포식자들이 날 잡아먹지 않더군. 자비로운 여왕 바다뱀이시여. 난 해협의 뾰족한 바위 위로 몸을 끌어올리고는 뱀이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봤다네. 노틸러스는 여전히 선장을 움켜쥐고 있더군. 꿈틀대는 모습이 꼭 낚싯바늘에 걸린 벌레 같았다니까. 하지만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어. 타이탄은 그저 동상처럼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시커먼 바닷속으로 사라졌다네. 어째서 날 살려 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공물을 바친 유일한 사람이라서? 아니면 이 이야기를 퍼뜨리기 위해 누군가를 남겨 둔 건가? 어쨌든 빌지워터에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고 죽음의 안개가 깔리면 그가 얕은 물가를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네. 천천히, 흔들림 없이, 그 저주받은 닻을 끌고 오는 소리가 말이지... 이봐, 조언 하나 해줄까? 항상 호주머니에 동전을 넣어 두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공물을 바치는 걸 잊지 말게. 선장이 공물을 바쳤다고 해도 믿지 말고. 자네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말이야. 아마 자넨 나만큼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 |
4. 수장
붉은 파도가 밀려오고 나가네 갈고리에 매달고 뚝 잘라 내 속부터 겉까지 죄다 발라내세 하지만 여신의 몫을 바치지 않으면 심해의 타이탄이 잡으러 온다네 — '도살의 노래'에서 처음에는 핏빛 항구의 악취가 코를 강타했다. 복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악취는 항상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몸에 들러붙곤 했다. 활짝 열린 채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레비아탄의 배, 물고기의 내장을 헤치고 지나가면 몇 주는 된 고기 찌꺼기가 햇볕에 썩게 내버려 둔 회반죽처럼 자갈에 들러붙어 있었다. 거기에 만 마리는 되는 바닷새의 똥, 학살의 부두에서 일하는 더러운 일꾼의 오줌 냄새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비위가 강한 자라도 속이 뒤집히기 마련이었다. 수염 달린 여신도 취하게 할 만한 양의 럼주로 반다나를 흠뻑 적셔 두른다고 해도 그 악취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냄새였지만 사라 포츈은 그것이 상징하는 게 좋았다. 그것은 번영과 풍어, 막대한 현상금의 냄새였다. 붉은 파도는 주머니를 돈으로 채운 이들이 부둣가 술집과 도박판, 환락가에서 돈을 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수익의 일부는 사라의 몫으로 들어왔다. 수염 달린 여신께 맹세컨대 그 번영의 냄새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사라가 탄 작은 상륙정이 질척한 물을 가로질렀다. 상륙정은 뱃머리의 연철 촉수에 매달린 방풍 랜턴으로 깊어지는 저녁을 밝히며 나아갔다. 배 뒤쪽에 앉은 사라가 뱃전에 손을 걸치고 손가락 끝으로 기름진 수면 위를 가르자 일렁이는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붉은 파도와 함께 넘실거렸다. "아무리 선장님이라고 해도 너무 무모하시군요." 레이픈이 끙끙거리며 말했다. 노를 젓느라 몸을 앞뒤로 기울이며 땀을 뻘뻘 흘리는 레이픈은 빌지워터에서 잔뼈가 굵은 선원이었다. 바다의 물보라와 거센 바람 때문에 얼굴이 거칠었지만 럼주조차도 레이픈의 영리한 머리를 무디게 하지는 못했다. 사라의 양심이자 오른팔인 레이픈은 빌지워터의 어두운 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째서?" "수면 바로 밑에 식인 물고기와 살을 뜯는 장어가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내가 손가락이라도 뜯길까 봐 그래?" "손가락이 없으면 방아쇠도 못 당기죠." "넌 걱정이 너무 많아, 레이픈." "그게 제 일이잖아요. 선장님이 간과하시는 일을 걱정하는 거요." "지금 '문 서펀트호'에 가는 일처럼?" "맞아요. '냄새가 구리면 건드리지 말아라, 이 멍청아!' 아버지가 절 무릎에 앉혀 놓고 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은 여태껏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죠." 사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안 구린 냄새가 없는걸." "그렇다고 해도 사실이 달라지진 않아요." 레이픈이 어깨 너머로 물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돌아봤다. 어딘가에 문 서펀트호가 어두운 비밀처럼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오늘 바다는 불길합니다. 심해에서 굶주린 눈이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에요." "또 뼈가 쑤셔?" "그렇게 놀리셔도 40년 넘게 그 느낌을 따랐는데 아직 살아 있으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만해, 레이픈. 선장의 장례식이잖아. 꼭 가야 한다고. 게다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으로 가야 한다면 내 부관도 같이 가야 해."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말 그대로 숨이 막힐 듯한 암청색 고래수염 코르셋과 금색 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긴 꼬리가 멋지게 늘어진 진홍색 프록코트가 덮여 있었다. 옅은 크림색 리넨 반바지는 굽이 높고 윤이 나는 검은 가죽 부츠에 넣어진 상태였다. 은으로 된 크라켄 버클이 발목부터 무릎까지 달린 부츠였다. 실용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복장이었지만 선장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부유해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가난한 선장은 곧 약한 선장이었다. 그리고 빌지워터 약탈자들은 다른 포식자처럼 약자를 무자비하게 사냥했다. 레이픈도 말쑥하게 차려입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강등의 위협과 압력에 굴복한 레이픈은 바다표범 가죽옷을 빌려 입고 납작한 촉수 띠 장식이 둘린 높은 모자를 써야만 했다. 비늘이 달린 조끼는 노를 당길 때마다 단추가 터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곳에 꼭 가야 한다고 해서 기꺼이 갈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네가 내 뒤를 봐줘야 해. 앨라이 휘하에는 선원이 많았어. 이제 녀석이 죽었으니 모든 선장이 시궁창 쥐처럼 몰려들 테지. 앨라이의 선원들이 경쟁 관계에 있는 선장 밑으로 들어가면 곤란해. 잭도우호나 칼날 도살자단에 넘어가도 안 되고." "그건 그렇죠." 레이픈이 마지못해 동의했다. "힘 있는 선장들이 앨라이가 수염 달린 여신 품으로 가는 것을 보러 올 텐데, 과연 다들 휴전 협정을 따를까요?" "그럴 리가 없지." 사라가 코트를 젖혀 양쪽 겨드랑이 밑에 찬 권총 한 쌍을 드러냈다. 자루가 상아로 된 정교한 권총이었다. "하지만 나도 맨손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 "총은 틀림없이 압수할 텐데요." "왜 이래, 나한테 무기가 이것뿐인 줄 알아?" 사라가 머리 옆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위험하지. 하지만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 "일이 잘못되면 그 얘기 그대로 해 드리죠." 사라가 씩 웃었다. "그렇게 되면 물귀신이 돼서 날 괴롭혀도 아무 말 안 할게." 레이픈은 재빨리 검지와 약지로 뿔 모양을 만들어 심장에 대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노를 젓는 데 집중했다. 레이픈은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전했다. 그러나 사라가 마음을 정했을 때는 계속 압박하는 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게다가 사라도 레이픈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아는 사람보다 더 짜증 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사라는 레이픈의 말을 존중해 수면에서 손을 들어 올린 후 손가락에 묻은 거품을 튀겨 냈다. 그때 거품이 내려앉은 자리에서 잔잔한 수면을 깨뜨리며 이빨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레이픈이 그것 보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사라 뒤쪽에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울퉁불퉁한 빌지워터의 바위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거리에는 불빛이 깜빡였다. 사라의 사람들이 바다가 주는 이런저런 것들로 바쁘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섬의 바위와 산에 절대 떨어지지 않을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은 폭풍도, 해로윙도, 이따금 염탐하러 오는 녹서스 전함도 완전히 뜯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라 포츈과 마찬가지로 빌지워터는 생존자였다. 갱플랭크가 죽은 이후 사라는 그림자 군도의 불온한 세력과 맞서며 수없이 많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빌지워터에서 지배력을 굳히기 위해서는 피비린내 나는 지저분한 일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사라의 통제력은 여전히 처음 밧줄을 오르는 수습 선원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는 대가로 원한을 사 목숨이 위태로운 데도 사라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배가 보입니다." 사라는 레이픈 너머를 바라봤다.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서 서서히 어떤 형체가 나타났다. 문 서펀트호는 죽은 선장처럼 낡고 눈에 띄는 배로 선폭이 넓었다. 여러 돛대에 걸린 수십 개의 방풍 랜턴에서는 희미하게 빛이 났다. 두꺼운 비늘 조각으로 가득 메워 보강한 배의 목재는 마치 뱀처럼 보였다. 홈에 껴 딱딱하게 굳은 소금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돛은 아직 접힌 상태였지만 빛나는 흰 천으로 제작한 것 같았다. 앨라이가 돈을 꽤 들인 것이 분명했다. 적의 대포를 녹여 만든 선수상은 엄니가 달린 바다뱀 형상이었다. "수염 달린 여신이시여, 볼 때마다 배 크기에 깜짝 놀란다니까…" "확실히 거대하죠." 레이픈의 말과 함께 문 서펀트호의 차가운 그림자가 두 사람을 뒤덮었다. "도대체 앨라이 같은 구두쇠가 어떻게 이런 배를 샀지? 청어 주화를 냈으면 냈지, 크라켄 주화는 절대 안 쓰는 인색한 자식이었는데. 듣기로는 바다에 공물도 바치지 않고 다녔다고 하더군. 심해의 주인들에게 럼주 한 방울이나 구리 동전 한 닢도 안 바쳤다고 말이야." "저 배에 오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생겼네요.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다면 저 배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다에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은 선장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난 자크문트 자이글로스의 현상금을 받고 나서 백색 선착장 바다에 마법공학 소총을 던졌지." "기억납니다." 레이픈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한테 준다고 약속하신 총이었죠." "정말 잘 만든 무기였지. 포츈 맨스토퍼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어." "일부러 잔인하게 구시는 거 다 압니다." "친절한 여왕은 잔인한 법이지." 사라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동시에 레이픈이 상륙정 속도를 줄이며 뱃전에 묶인 커다란 하역망 아래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미 대여섯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문 서펀트호의 반들반들한 선체는 검은 절벽처럼 솟아 있었다. 저 위쪽에 매달린 등불에서 검은 실루엣이 움직였다. "이렇게 큰 배를 얕은 곳에 대 놨군요." 레이픈이 고갯짓으로 검은 선체에 얼룩덜룩 붙어 있는 녹조의 흔적을 가리키며 상륙정을 느슨하게 묶었다. "선창은 텅 비어 있을 거야. 선원 대부분은 육지에서 앨라이가 남긴 싸구려 술이나 퍼마시면서 잔뜩 취하겠지." "부럽네요." 레이픈이 노걸이에서 노를 빼내 뱃전에 고정하며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일어나서 하역망을 붙잡은 사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글쎄. 하지만 어떤 강한 여자가 그랬지. 앞이나 뒤로 가야만 할 때는 언제나 앞으로 가는 게 낫다고." 사라와 레이픈은 손을 움직여 문 서펀트호의 갑판으로 기어 올라갔다. 뱃전을 기어오르자마자 가죽 반바지와 비늘 셔츠를 입은 무표정한 쌍둥이 둘이 사라의 총과 레이픈의 작살 못 단검을 가져갔다. 우락부락한 두 여자는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육지에서 앨라이를 추모하며 럼주를 마시는 대신 서로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나 있는 선장들을 맞이하는 게 불만인 것이 분명했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바위 게 머리뼈로 만든 투구를 쓰고 익힌 바위 게 껍데기를 붙여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얼굴이 눈 모양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문신이 있는 쌍둥이가 총기 장인이 만든 권총을 보더니 씩 웃었다. 사라는 그 입안이 칼날비늘의 턱뼈에서 뽑아낸 이빨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사라는 높은 앞 갑판으로 이동하는 쌍둥이의 뒤를 따라가며 세 상자 중 압수당한 무기가 보관된 상자를 잘 기억해 뒀다. 오른쪽에 포탄 자국이 있는 상자였다. 상자 바로 앞에는 조각된 흑단 포차 위에 거대한 청동 대포가 놓여 있었다. 대포의 포구는 밀랍으로 막힌 상태였다. 안에는 돛에 싸인 앨라이 선장의 시신이 해저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럼주와 식초, 장뇌에 절여져 있을 터였다. "바다에 빠뜨리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워. 대포 말이야." "맞습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30파운드 포예요. 하지만 전통은 전통이니 어쩔 수 없죠." "그래…" 사라는 대포 옆에 어깨가 떡 벌어진 인물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 "전통을 따르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일어나겠지." 남자는 무지갯빛 비늘 로브를 휘감고 있었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생선 대가리 두건에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로브였다. 남자의 손에는 촉수가 휘감긴 낫이 들려 있었다. 사라는 곧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선장의 장례식에 바다뱀 몰이꾼이라. 흔치 않은 일이군." "크라켄 주화로 사지 못하는 것도 있을까요?" 삐죽삐죽한 두건을 쓴 바다뱀 몰이꾼의 얼굴 아랫부분은 구멍 난 산호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눈과 이마는 바싹 말려 투박하게 눈구멍을 뚫은 오징어 몸통으로 덮인 상태였다. 바다뱀 몰이꾼은 그 구멍으로 모여 있는 선장들을 살펴봤다. 넓은 갑판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빌지워터 약탈자들로 가득했다. 긴 코트, 광나는 부츠, 높은 모자, 고풍스러운 갑옷으로 치장한 선장들은 배에서 떨어지면 곧장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부를 상징하는 금은 인장과 훈장, 부흐루 낚싯바늘 목걸이, 심해의 주인들을 기리는 행운의 부적이 사라의 눈에 들어왔다. 싸우거나 술을 마시다가 알게 된 선장도 있었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선장도 있었다. 물론 다른 선장들은 모두 사라를 알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와 크림색 피부를 뽐내며 자신 있게 활보하는 사라 포츈은 어떤 상황에서도 돋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이 배에서는 독가시 사이에 있는 한 송이의 들장미일 뿐이었다. "많이도 모였네요." "죽음만큼 모두를 한데 묶는 것도 없지." 레이픈이 고개를 끄덕였다. "뚱뚱한 파도타기 선수가 굶주린 긴이빨 떼에 둘러싸이면 어떤 기분일지 알겠어요."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레이픈. 여기서 긴이빨은 바로 나니까." 레이픈은 답하지 않았다. 사라가 배의 중심선까지 갔다가 돌아오며 한 걸음 한 걸음 갑판의 움직임을 가늠했다. 권총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듯이 배도 파도를 넘고 바람을 맞는 방법이 저마다 달랐다. 사라는 정박한 배의 흔들림에 맞춰 움직이며 발밑에서 느껴지는 목재의 삐걱거리는 소리로 그 비밀을 알아냈다. "얕은 곳에서 항해하기 좋겠어. 이렇게 선폭이 넓은 배인데 놀라울 정도야." "전 선폭이 넓어서 마음에 듭니다." 레이픈이 본능적으로 다리 폭을 조정하며 말했다. "그러시군." 레이픈은 사라의 조롱을 무시했다. "쾌속정처럼 민첩하지는 않지만 거친 바다에서는 튕겨 나갈 일이 없을 거라는 데 마이런의 흑주도 걸 수 있어요." "그렇고 말고, 레이픈." 긴 하늘색 코트를 입은 호리호리한 여자가 말했다. 금색 테두리로 장식된 커프스와 청동색 술이 달린 어깨 장식이 눈에 띄었다. "낡았지만 대단한 배인 것만큼은 확실하지. 다크윌스 글로리호도 침몰시킨 데다가 머드타운 안개가 다가와 그 저주받은 은신처를 구하기 전에 레드 녹스토라호에 구멍까지 냈잖아." 소금으로 뻣뻣해진 뿔 두 개가 빡빡 깎은 여자의 머리에 비스듬히 달려 있었다. 생선국에 넣은 수란 두 개처럼 흔들리는 눈을 보아하니 이미 럼주를 잔뜩 퍼마신 듯했다. 여자의 피부는 기나긴 항해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매끈하고 노르스름해 보였다. "블랙스턴 선장님,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레이픈이 말했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은 해가 질 때마다 빌지워터에 퍼지지. 그 소문을 들은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아침에 그 소문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아내들은 저주를 퍼부어. 장담컨대 난 아주 건강해." 블랙스턴은 사라에게 돌아서서 멋들어지게 고개를 숙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쥔 사라는 즉시 경계했다. 취한 모습으로 가볍게 손을 쥔 블랙스턴의 손바닥에서 고생으로 얻은 굳은살과 화약으로 화상을 입어 생긴 굴곡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라 블랙스턴이라고 해, 포츈 선장." 블랙스턴이 사라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한 해 동안 아마란타인 해안을 습격한 후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지. 바다는 투명하고 하늘은 푸른 데다가 해안 마을에는 선장 하나가 열 번 태어나도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금이 있는 곳이었어." "그것참 멋진 곳인걸. 그런데 그런 곳에서 왜 돌아왔지?" "좋은 시절은 영원하지 않잖아. 그곳 주민들은 '소유'나 '죽지 않는 것'에 관한 관념이 좀 이상하더라고. 게다가 특이한 마법사까지 불러내서 바다와 하늘을 이용해 우리를 공격했지. 그런 것은 난생처음 봤어." "아, 그래서 배를 전부 잃으셨군요." 레이픈이 말했다. "꽤 잃긴 했지." 블랙스턴이 손을 흔들며 인정했다. "하지만 잠시 차질이 생겼을 뿐이야, 레이픈. 당장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지." "새 선원들과 얕은 곳에서 항해하기 좋은 배도 함께라면 더 좋겠지?" 사라가 넌지시 말했다. "뭔들 안 되겠어." 웃으며 그렇게 말한 블랙스턴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앞 돛대 옆에서 럼주가 새는 술통을 둘러싸고 모여 있는 선장들 쪽으로 돌아갔다. 그때 사라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아는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원수의 얼굴이었다. 레이픈도 그자를 보고는 사라의 팔을 붙잡았다. "휴전 협정을 기억하십시오." 레이픈이 다급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는 답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라는 팔을 빼내더니 무표정하게 남자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금발을 대충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남자는 말끔히 수염을 민 미남이었다. 그때 고개를 든 남자와 사라의 눈이 마주쳤다. 사라가 다가오는 것을 본 남자의 눈이 얼어붙었다. "사라." 남자가 사라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저기, 물론 우리가—" 그러나 사라는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 단숨에 다가가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남자는 24파운드 포로 쏜 포탄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오그라뜨렸다. 곧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사라의 무릎이 날아들며 끔찍한 소리가 났다. 뒤로 날아간 남자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달려들어 올라탄 사라는 권총을 찾아 손을 뻗다가 권총이 큰 돛대 옆에 놓인 상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른쪽에 포탄 자국이 있는 상자.' 사라는 남자를 쏘는 대신 멱살을 쥐고 머리를 끌어 올린 후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릴 준비를 했다. 남자는 쿨럭거리며 윙윙거리는 청동 톱니바퀴, 가죽끈, 딸깍거리는 기계로 된 손을 들어 올렸다. "제발 이러지 마." 남자가 부러진 코와 부어오른 입 때문에 쌕쌕거렸다. "잘 있었나, 피터.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피터 하커 선장.' 사라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피터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붙들고 있었다. 항상 핏빛 검을 죽였다며 자랑하고 다니던 손이었다. 피터는 크로우 선장, 브래그 선장과 함께 사라가 갱플랭크를 죽여 힘들게 얻은 전리품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크로우와 브래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라의 짓이었다. 사라는 맥그레건의 도살장에서 벌인 총격전에서 물러나며 다시 한번 피터를 보게 된다면 그때는 손을 가져가는 데서 그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가라앉는 영혼의 휴전 협정은 빌지워터의 오랜 전통이었다. 엄격히 시행되는 관습이라기보다 불문율에 가까웠지만, 덕분에 자주 치러지는 옛 바다 전설의 장례식에 선장들이 참석할 때마다 경쟁 관계에 있는 선원들이 모여도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라는 매번 그 난폭한 인간들이 그런 구시대 관습을 따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항상 사라의 마음 한구석에는 휴전 협정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했다. 단단한 손이 사라의 오른쪽 팔꿈치를 잡아 꽉 쥔 사라의 주먹을 끌어당겼다. 왼쪽에서 나타난 레이픈은 사라를 피터에게서 떼어 놓았다. "진정하세요, 선장님." 사라는 다시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레이픈이 말릴 때쯤에는 화가 사그라든 상태였다.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표현했다고 생각한 사라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럼주에 잔뜩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마지막 내리막길에 모인 모두 이 맹세를 명심하라." 사라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와 육신과 영혼에 아무 해도 없으리니." "총도 칼도 바다뱀도 주문도 없이." 레이픈이 덧붙였다. "가라앉는 영혼의 휴전 협정을 지켜라!" 피터가 마무리하며 허둥지둥 사라에게서 멀어졌다. 사라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레이픈과 함께 자신을 말린 자가 누구인지 돌아봤다. 값비싼 크라켄 가죽 코트를 걸치고 신선한 문어 다리 타이를 맨 등이 굽은 자가 반짝이는 가오리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평소 걸치고 다니던 누더기에 비할 바 없이 귀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쏜?" 사라가 레이픈의 손을 떨쳐 내며 말했다. "이제는 쏜 '선장'이지." 쏜이 값비싼 말린 해초 궐련 뭉치를 갑판에 뱉으며 말했다. 궐련 뭉치는 사라의 부츠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사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선장이라고? 언제부터?" 쏜은 막 망고를 훔친 화약 나르는 원숭이처럼 우쭐거렸다. "배를 구했거든. 네가 크로우와 브래그를 처리한 후 남은 선원들도 내 밑으로 들어왔고 말이야." 쏜의 숨에서 썩은 조개 냄새가 났다.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입고 뽐내도 본래의 모습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 넌 항상 찌꺼기나 주워 먹고 사는 놈이었지. 알았으니 비키기나 해." 쏜이 비켜서며 말했다. "내 말 명심해, 사라 포츈. 넌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또 그 소리군." 그렇게 말한 사라는 두 걸음 만에 피터 하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손가락을 파도처럼 움직였다. 마치 손가락 관절에 동전을 놓고 뒤집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손잡아 줄까?" 사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게 재미있나?" "재미있지. 그래서 웃고 있잖아." 피터는 이미 푸르게 부어오른 한쪽 눈으로 장갑 낀 사라의 손을 바라봤다.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숨을 쉬기도 벅찰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피터는 씩 웃었다. "멀쩡한 손을 주면 그것까지 쏴 버리려고?" "아직은 그럴 생각 없지만 두고 보면 알겠지." 피터가 손을 잡자 사라는 피터를 일으켜 세웠다. "여긴 왜 왔지, 피터?" "요즘 아무리 해적 비밀회의가 없다지만 전통은 따라야 하지 않겠어?" "다들 그 소리군." 사라가 힐끗 레이픈을 보며 말했다. 사라는 코트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터에게 건넸다.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한 피터는 입술과 턱에 묻은 피를 닦은 후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그냥 가져." 사라는 피터의 새 손을 향해 감탄하듯 고갯짓했다. "멋진걸. 빌지워터 물건 같지 않아." "맞아. 그러니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비터벨트 대장간에 새로 온 도제가 만들어 줬거든. 기스베르트라는 자운 녀석이었어." "비싸 보이네." "비쌌지." 사라는 피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맞춤옷과 기름이 좔좔 흐르는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빈 칼집에는 훌륭한 칼이 들어 있었을 것 같았다. 손을 잃은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재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맥그레건의 도살장에서 그냥 죽일 걸 그랬나." "나도 네가 왜 날 살려 줬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 물론 날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솔직히 난 어이없을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극적으로 복수할 만한 상대잖아."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지. 솔직히 널 죽이지 않은 건 갱플랭크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난 항상 갱플랭크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거든." "생각대로 되는 것 같아?" "노력 중이야." 사라가 인정하자 한쪽 손에 양철 술잔을 여러 개 든 레이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반대쪽 손에는 커다란 술병이 들려 있었다. "받으시죠. 휴전 협정에 따라 서로 죽일 생각이 없다면 앨라이의 술이라도 마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사라가 피터에게 잔 하나를 넘긴 후 자신의 잔을 가져가자 레이픈이 시럽 같은 갈색 액체를 한가득 따라 주었다. "화약은 건조하게, 검은 날카롭게." 레이픈이 말했다. "그러면 세상이 변할 것이니." 사라가 마무리하자 세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고개를 젖히고 술을 한 모금 머금은 사라는 지나치게 단맛에 움찔했다. 모래 같은 게 씹히는 것 같기도 했다. "끔찍하군. 아주 맛이 갔어. 혹시 앨라이의 시신을 대포가 아니라 술통에 넣은 것 아니야?" "앨라이는 잔인한 늙은이, 무자비한 선장, 노련한 살인자로 유명했지. 하지만 먹을 것에 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더군." 피터가 잔에 남은 럼주를 갑판에 쏟으며 말했다. "네가 앨라이랑 아는 사이였을 줄 몰랐어." 피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는 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물론 소문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문 서펀트호에 오른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앨라이는 수수께끼 같은 자였어." 쏜이 레이픈 옆으로 다가와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항상 베일에 싸여 있었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앨라이는 죽었는데 우리는 살아 있잖아." 사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레이픈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픈이 쏜에게 술을 넉넉히 따라 주었다. 쏜은 말을 계속했다. "그래. 여기 모인 자 중 앨라이를 잘 아는 자는 없어. 듣자 하니 앨라이는 육지에도 절대 발을 딛지 않았다고 하더군. 항상 그 악랄한 쌍둥이 중 하나를 보냈다나 봐. 그나저나 앨라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들었어?" "난 매질을 너무 많이 받은 심부름꾼 아이가 자는 틈에 죽였다고 들었어." 블랙스턴 선장이 손에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 레이픈은 블랙스턴의 잔에 적당히 술을 채웠다. "망꾼의 정신이 항상 멀쩡하길." 블랙스턴이 술을 들이켰다. "아, 술맛 참 좋군." 사라가 입을 열었다. "그랬다고? 내가 듣기로는 저녁으로 나온 가시오징어가 살아서 꿈틀대는 바람에 질식사했다고 하던데." 레이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학살의 부두 해체사들이 그냥 하는 말입니다. 동굴에서 선구를 파는 잡화상에게 들었는데 술에 취해서 바다에 빠진 거라고 하더군요. 주머니가 금화로 꽉 차서 수염 달린 여신의 품으로 곧장 가라앉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다들 무의식적으로 뱃전 너머 저 아래에 있는 바다를 바라봤다. 배 주변에서 액체 거울처럼 검고 깊은 바닷물이 소용돌이쳤다. 흔들흔들 비치던 배의 모습이 물에 흩어지더니 따개비가 붙은 선체를 철썩 때렸다. 거센 파도가 선체에 부딪혀 부서졌다. 밑에서 거대한 뭔가가 올라올 때 생기는 파도였다. "오늘은 바다가 불길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레이픈이 말했다. 사라는 숨을 내쉬고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눈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액운을 쫓아낼 때 하는 뱃사람의 전통이었다. "나이가 많았으니 그냥 죽었을지도 모르지. 원래 노인네들은 잘 죽잖아." 사라가 말했다. "안개가 밀려오고 있어." 블랙스턴이 턱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남동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본 사라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차고 축축한 안개에 가장 깊은 바닷속 해구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실려 왔다. 쏜이 말했다. "그 늙은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상관없어. 이제 이 배와 선원들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하지. 다들 그래서 왔잖아? 여기에서 이렇게 큰 상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어?" 네 선장이 서로를 탐색했다. 모두 서로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앨라이의 바다뱀 인장은 아무도 못 찾았나?" 블랙스턴이 말했다. "인장 말입니까?" 레이픈이 코웃음을 쳤다. "분명히 그 대포에 앨라이와 함께 봉인해 뒀을걸요. 어차피 요즘은 선장 인장에 신경 쓰는 사람도 없지만요." 사라가 말했다. "신경 쓰는 게 좋을지도 몰라. 예전 선장의 인장만으로 배와 선원들을 차지할 수 있다면 피를 흘릴 일이 줄어들지도 모르지." "피 조금 흘리는 게 무서운가 보지?" 쏜이 씩 웃었다. "그럴 배짱이 없나?" 사라가 쏜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휴전 협정이고 뭐고 다시 한번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 배짱이 얼마나 큰지 똑똑히 보여 주지." "신경을 건드리려던 것은 아니었어, 포츈 선장." 쏜이 검은 이와 썩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여기서 그 인장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앨라이의 선원들을 차지할지 말지 조금이라도 망설일 녀석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라는 같은 생각을 하며 쏜 너머 문 서펀트호 갑판 위에 모여 있는 다른 선장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앨라이의 배를 차지하기에는 너무 미숙한 선원들을 데리고 있는 잔챙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라와 술을 마시고 있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각자 개성이 뚜렷했다. 사라의 등에 칼을 꽂을 경쟁자가 있다면 이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쏜의 질문에 누가 채 대답하기도 전, 사라는 발밑에서 갑판이 느릿하게 내려가며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코트 안으로 손을 뻗은 사라는 은화를 꺼내 배 옆쪽으로 튕겼다. 쏜은 은화가 데굴데굴 굴러 물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라는 잠시 쏜이 은화를 따라 물에 뛰어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쏜이 말했다. "뭐하러? 네 배도 아니잖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사라의 말과 함께 문 서펀트호의 하얀 돛이 펼쳐졌다. "출항한다." 배는 울퉁불퉁한 암초와 위험한 모래톱, 침몰한 난파선에서 삐죽 튀어나온 잔해를 피해 조심조심 방향을 바꾸며 빌지워터 만 동쪽으로 나아갔다. 블랙스턴이 발견했던 안개는 이제 배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배는 쥐 죽은 듯 조용히 나아갔다. 간간이 선원들끼리 외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사라와 레이픈, 쏜, 피터, 블랙스턴은 끔찍한 럼주 맛에도 병을 계속해서 비워 나갔다. 두어 잔 마신 후 단맛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사라의 마음은 느슨해졌다. 병이 완전히 비자 레이픈은 빈 병을 배 밖으로 던졌다. 사라는 레이픈을 선창으로 보내 새 병을 가져오게 했다. 문 서펀트호는 더 깊은 안개 속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앨라이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얘기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얘기는 갈수록 우스꽝스러워졌다. 앨라이가 대양의 말썽꾸러기에게 잘못 걸려 황금 일각 고래 의상을 입고 바다에 끌려가 앨라이를 진짜 황금 고래로 착각한 핏빛 항구의 학살자에게 사냥을 당한 것이라는 피터의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그때 저 멀리 망대에서 외치는 소리가 안개에 묻혀 들려왔다. "뭐라고 한 거야?" 삭구 위쪽을 올려다보며 물은 사라는 시야가 살짝 핑 도는 느낌에 뱃전을 붙잡았다. 럼주는 질이 좋지 않았지만 상당히 독했다. 슬슬 조절해야 할 때였다. "'육지다!'나 '모래다!'라고 한 것 같은데?" 럼주 때문에 눈이 풀린 블랙스턴이 말했다.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모래다? 왜 그런 말을 하겠어?" "슈리마라도 봤나 보지." 피터가 킬킬거리며 럼주를 한 모금 더 털어 넣었다. 사라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때 쇠사슬이 갑판에서 떨어지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육중한 닻이 물을 첨벙 때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도착했군." 쏜이 진득한 궐련 뭉치를 바다에 뱉으며 말했다. 사라는 안개 속을 유심히 바라봤다. 물 위에 험준한 검은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소금 결정이 희미한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달조각 암초야. 대체 여긴 왜 왔지?" 사라가 말했다. "앨라이는 항상 자기가 어머니에게 마라이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 피터가 말했다. 쏜은 반박했다. "오징어 똥 같은 소리! 마라이의 피는 무슨, 앨라이는 마라이를 본 적도 없어." 블랙스턴이 말했다. "이야기는 그럴싸하잖아. 신비한 태생, 마법의 혈통 같은 배경은 모든 선장이 갖고 싶어 할 법한 이야기지. 나도 하나 생각해 낼 걸 그랬어." 그때 나무를 나무로 두드리는 소리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사라는 고개를 돌렸다. 바다뱀 몰이꾼이 촉수가 휘감긴 낫으로 높은 앞 갑판을 쾅쾅 치고 있었다. 바다뱀 몰이꾼의 반대쪽 손에는 눈부신 은빛으로 타오르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바다는 이 세계의 묘지이며 영혼은 아무런 표지 없이 바다에 잠든다." 산호 가면을 통해 쇠를 긁는 듯한 바다뱀 몰이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묘지에는 전부 귀한 자와 천한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상징이 세워져 있지. 하지만 바다에서 왕, 어릿광대, 왕자, 소작농은 전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자, 바다의 여행자들이여… 이제 바다에 공물을 바칠 시간이다!" "드디어 시작이군.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고." 사라가 말했다. "전적으로 동감이야." 피터가 말했다. 사라와 다른 선장들이 밀랍으로 포구가 막힌 대포 앞에 모여들자 바다뱀 몰이꾼의 시선이 그 위를 쭉 훑었다. 사라는 온몸에 술기운이 퍼진 것을 느꼈다. 제법 많은 선장이 배의 움직임보다 더 격하게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레이픈은 어디 간 거야?' 이제 럼주는 필요 없었다. 사라는 그저 레이픈이 자신의 옆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라와 레이픈이 승선하자마자 무기를 압수해 갔던 쌍둥이가 갑판 중앙으로 도르래 장치를 가져왔다. 두꺼운 밧줄 고리에 걸린 거대한 갈고리가 내려와 기름을 친 대포 심지 바로 뒤에 있는 운반용 고리에 걸렸다. "참 안타까워." 블랙스턴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앨라이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을 줄 몰랐는걸." 사라가 말했다. "뭐? 아니, 대포 말이야. 오르반제 30파운드 포잖아. 이제 세상에 몇 개 남아 있지도 않을걸. 저거 한 방이면 녹서스 전함 뱃머리부터 선미까지 깔끔하게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 그런데 저렇게 버려지다니 아까워 죽겠다니까." 사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복잡한 선박용 무기보다는 권총이나 소총에 더 빠삭했다. 하지만 저 청동 대포가 앨라이 같은 인색한 녀석과 함께 사라지기엔 너무 아깝다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앨라이가 가장 아름다운 무기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고 무덤으로 가져가 남은 이들을 마지막까지 골탕 먹이려는 것일까?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뭔가 잊은 듯한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게 투구를 쓴 쌍둥이가 갈고리를 대포에 고정했다. 바다뱀 몰이꾼이 다시 입을 열자 쌍둥이는 뒤로 물러났다. "빌지워터의 선장들이여, 오늘 다들 이렇게 모인 것을 보니 참으로 자랑스럽다. 도시 최고와 최악의 약탈자, 쓰레기와 보배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군." 상당히 불쾌한 시작에 웅성웅성 불평하는 소리가 일었지만 바다뱀 몰이꾼은 수염 달린 여신과 접촉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바다뱀 몰이꾼의 방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군도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미래로 향하는 수많은 길은 나가카보로스의 다리처럼 변덕스럽고 복잡하게 얽혀 있지. 하지만 난 나아갈 길을 봤다! 많은 길에서는 바다뱀 군도의 봉우리와 만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적들의 접근에 군도 사람들이 죽어 갔지. 하지만 한 길, 단 하나의 길에서는 위대한 지도자 밑에 모두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단결한 것을 보았다!" 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다뱀 몰이꾼이 이상한 족속이긴 했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너희는 앨라이 선장이 심해로 가는 것을 보기 위해 모였다. 이곳에서 선장의 신발을 닦을 가치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 선장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선장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쌍둥이가 근육에 힘을 주며 도르래 밧줄을 끌어 대포를 들어 올리기 시작하자 대포 뒷부분과 포차가 통째로 갑판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포신은 아래쪽으로 기울여졌다. 포구를 막은 밀랍이 아니었다면 그 속으로 앨라이의 시신이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다. "너희는 모두 나가카보로스의 기대를 저버렸다! 구리 동전 하나를 두고 뒤엉키는 쥐 떼 소굴의 쓰레기처럼 서로 싸우고 배신했지. 너희 중 옛 선장들처럼 함대를 일으켜 빌지워터를 바다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 다들 물속에 동전과 공물을 던지면서 무엇을 바라지? 안전? 축복? 아니, 너희가 바치는 것은 제물이야. 바다의 분노를 빌리기 위해 바치는 피의 대가. 그런데 바다가 고작 구리 동전이나 작은 물고기에 신경 쓸 것 같나? 아니, 빌지워터가 번영하려면 붉은 파도를 일으킬 공물이 필요해!" 사라는 바다뱀 몰이꾼의 광기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슬쩍 다른 선장들을 훑어봤다. 하지만 다들 럼주에 감각이 둔해져 저게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생각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사라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다. 피터가 사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터가 아무 말 없이 미소 짓자 사라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피터는 반 발자국씩 천천히 뱃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라는 다시 포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런…" 사라는 높은 앞 갑판 쪽으로 달리며 모자를 벗고 머리핀으로 위장한 단검 한 쌍을 빼냈다. 둥근 해골 모양 자루가 달린 단검은 바늘처럼 얇고 검은 강철로 되어 있었다. 사라는 이 단검을 어디에 꽂아야 한 방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그러니 내가 너희의 피, 너희의 제물을 바다에 바치겠다!" 바다뱀 몰이꾼이 소리치며 모두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모두를 이곳에서 죽게 불러들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가면과 두건을 벗어 던졌다. 사라의 눈에 희끗희끗한 수염이 달린 얼굴이 들어왔다. 세월의 흔적으로 주름이 파인 얼굴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오른쪽 눈썹에서 왼쪽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가 가죽 같은 얼굴을 가로질렀다. 수염 가닥은 진주, 낚싯바늘과 함께 얇게 땋여 있었다. 청어 주화를 냈으면 냈지, 크라켄 주화는 절대 안 쓰는 자의 눈이었다. 항해할 때마다 바다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던 자. 수십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설과 소문을 통해 사라가 익히 아는 남자. "앨라이, 이 배신자 자식!" 사라가 소리쳤다. 쌍둥이는 사라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 대포 뒷부분을 높이 들어 올린 사슬을 놓을 수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배가 침몰할 때마다 과부의 저택에 울리는 종소리처럼 사라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 학살의 부두 도살장에서 무릎까지 끈적하게 차오른 내장을 헤치며 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늦었어, 포츈 선장." 앨라이가 말했다. 앨라이는 대포 뒤쪽으로 횃불을 내리며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사라는 단검을 던지기 위해 한쪽 손을 뒤로 뺐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은빛 불꽃이 기름을 친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귀가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폭발했다. 사라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문 서펀트호가 아직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게 큰 대포를 쐈으면 용골이 부러져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나는 게 정상이었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높이 울리는 잡음과 미칠 듯이 날카로운 소음, 뭉개진 소리만이 귀를 채울 뿐이었다. 사라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팔에 피가 흐르는 느낌에 몸을 움찔했다. 먼 뒤쪽에서 흐릿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야말로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광경보다도 끔찍했다. 그때 사라는 배가 가라앉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대포에는 유산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되 배는 멀쩡하도록 설계된 장치였다. 그 끔찍한 힘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앨라이를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한 사라는 넓게 퍼진 포탄 파편을 대부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선장들은 그리 운이 좋지 않았다. 갑판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대포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금까지 숨을 쉬며 살아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시신으로 변했다. 하지만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무리 뒤쪽에 있던 선장들은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수염 달린 여신의 이름을 울부짖고 있었다. 사라는 그 소리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피가 흥건한 바닥에 블랙스턴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블랙스턴의 근사한 푸른 코트는 가시 달린 아홉 가닥 채찍으로 마구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블랙스턴은 미동조차 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블랙스턴의 밑에서 쏜이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쥐새끼 특유의 행운으로 블랙스턴을 인간 방패 삼아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은 피한 모양이었다. '레이픈! 레이픈은 어디 있지?' 레이픈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는 레이픈이 알아서 잘 살아남았길 바랄 뿐이었다. '살았을 거야. 레이픈이잖아. 레이픈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어.' 그때 사라의 눈이 난간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피를 흘렸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피터 하커.' 피터가 씩 웃자 증오가 솟구쳤다. 의기양양하게 웃는 저 비열한 쥐새끼는 앨라이의 함정을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니, 처음부터 음모에 가담한 게 틀림없었다. 번지르르하니 유창한 언변으로 자신의 본성을 잘 모르는 선장들을 꾀는 미끼 역할을 했을 터였다. 사라는 갑판 해치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달조각 암초까지 배를 몰고 온 선원들이 긴 도살용 칼을 들고 나타났다. 앨라이가 시작한 일을 끝내려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느릿한 꿈의 한 장면처럼 움직이며 선장들의 목숨을 확실히 끊어 놓았다. 사라는 치솟는 분노에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눈을 깜빡이자 고통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 '젠장, 그래도 난 살아 있잖아! 뭐라도 해 봐!'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순식간에 소리가 돌아오고 시야가 뚜렷해졌다. 죽어 가는 이의 비명에 가까스로 일어선 사라는 다시 한번 단검을 들어 올렸다. 앨라이는 연기가 나는 대포 뒤에 멀찍이 서서 팔을 높이 든 채 광기 어린 눈으로 자신이 벌인 짓의 결과를 감상하고 있었다. 사라는 다시 앨라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앨라이의 뒤에서 쌍둥이가 달려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사라는 대포를 뛰어넘어 눈 모양 문신이 빼곡한 쌍둥이의 얼굴을 부츠로 냅다 갈겼다. 쇠처럼 단단한 부츠 굽 밑에서 칼날비늘 이빨이 깨지며 쌍둥이가 뒤로 붕 날아갔다. 가볍게 착지한 사라는 게 투구를 쓴 쌍둥이가 송곳니 박힌 거대한 곤봉을 머리 쪽으로 휘두르자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곤봉은 갑판 판자를 박살 냈다. 한 바퀴 굴러 일어선 사라는 단검을 쥔 주먹을 쌍둥이의 등에 꽂았다. 단검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게 껍데기 갑옷을 뚫는 대신 미끄러질 뿐이었다. 갑판에서 곤봉을 비틀어 빼낸 쌍둥이가 휙 돌자 사라의 머리 위로 곤봉이 아슬아슬 스쳐 지나갔다. 문신을 한 쌍둥이도 어느새 일어서 있었다. 얼굴에 피가 흐르자 빼곡한 눈 문신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 오싹해 보였다. 문신을 한 쌍둥이는 칼날에 날카로운 톱상어 이빨이 붙은 긴 단검 한 쌍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주먹과 팔꿈치, 발을 미친 듯이 내지르며 사라에게 달려들었다. 사라는 공격을 쳐 내며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일격을 간신히 면할 뿐이었다. 싸움에서 버티고는 있었지만 얇은 단검은 권총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대포가 있는 곳까지 밀려났을 때쯤 사라의 셔츠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라는 근접전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계획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했다. 한쪽에서 게 투구를 쓴 쌍둥이가 다시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신을 한 쌍둥이가 단검을 낮게 그었다. 사라는 단검이 허벅지 옆쪽을 스치는 고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 사라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이번에는 단검이 목을 노리며 날아왔다. 팔을 들어 막자 날카로운 칼날이 곧장 코트 천을 갈랐다. 그 충격에 팔을 타고 화끈한 고통이 흘렀다. 하지만 소매 뒤쪽에 특별히 엮어 넣은 쇠막대 덕분에 칼날이 살에 닿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승리감에 짧은 함성을 내지른 상대는 사라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에서 웃음을 거뒀다. "전투복 전문점 '제디안 앤 손즈'에서 맞췄지." 사라는 단검으로 목을 공격했다. 그 충격에 상대는 눈을 부릅떴다. 사라가 일어나 쓰러진 여자를 걷어차자 다른 쌍둥이가 절규했다. 단검으로 곤봉을 상대하면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다. 사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힐끗 뒤쪽을 봤다. '오른쪽에 포탄 자국이 있는 상자…' 이길 확률을 반으로 높일 기회였다. 게 투구를 쓴 쌍둥이가 분노에 차 송곳니 박힌 거대한 곤봉을 들어 올리며 사라를 향해 돌진했다. 곤봉이 무시무시한 호를 그리며 내려오는 것을 본 사라는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철로 된 곤봉 머리가 사라 뒤에 있던 상자를 박살 냈다. 사라는 재빨리 돌아 게 껍데기 갑옷 사이에 난 틈을 단검으로 공격했다. 쌍둥이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휘청거리자 사라의 손에 있던 무기가 떨어져 나갔다. 사라는 뒤로 돌아 망가진 칼, 황동 너클, 철 곤봉을 옆으로 제치며 산산이 부서진 상자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제발 나와라…" 사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곤봉을 들어 올리다가 갑판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부러진 칼자루와 휘어진 칼날뿐이었다. 쌍둥이 중 하나가 자신이 가지려고 권총을 따로 빼돌린 것일까? '안 돼, 안 돼…' 그때 사라의 손바닥에 매끈한 상아 자루가 닿았다. 그 무엇보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사라는 쌍권총을 손에 쥐고 격발 장치를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옆으로 날리며 한바탕 총을 갈겼다. 게 껍데기 갑옷은 칼과 갈고리를 막을 순 있어도 총기 장인이 만든 권총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뜨거운 총알이 갑옷을 꿰뚫자 쌍둥이는 피를 흘리며 대포 위로 쓰러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라는 갑판의 흔들림이 변한 것을 감지하고 바짝 긴장했다.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미묘한 변화였지만 바다의 너울이 바뀌면서 뱃머리 기울기가 분명히 달라졌다. "이런, 느낌이 안 좋은데…" 사라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앨라이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쌍둥이가 죽어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쌍둥이를 죽이다니!" 앨라이가 외쳤다. 사라는 앨라이의 양쪽 무릎에 한 발씩 총을 쐈다. "오늘 선장들을 죽인 대가다." 갑판 위에서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른 앨라이는 눈물을 흘리며 사라를 향해 힘없이 낫을 휘둘렀다. 사라는 낫을 가볍게 쳐 내고 앨라이의 턱 밑에 권총을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어? 오늘이 정말 네놈의 장례식이 됐네." 그때 또다시 갑판이 움직이자 배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부상자들조차 물속에서 깊게 울리는 소리가 올라오자 점점 조여 오는 어둠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사라는 배의 목재가 무시무시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사라가 앨라이의 목에 권총을 더 세게 쑤시며 다그쳤다. "또 뭘 하려는 속셈이야?" "난 모르는 일이야." 앨라이가 흐느끼듯 말했다. 앨라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 특유의 광기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바다에 대가를 치를 때가 됐군. 너도 같이 가 줘야겠어…" 사라는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9년 전, 빌지워터 북쪽에 다다라 만 안쪽으로 마지막 속도를 내고 있을 때였다. 드라켄게이트에서 현상금을 차지하고 돌아오던 사라와 선원들은 아이언워터 만 밖에서 날렵한 무장상선을 타고 질주하는 밀수업자를 발견했다. 그자는 부흐루 사원의 보물을 약탈한 후 바다뱀 군도에서 달아나는 중이었다. 사라는 아직도 거대한 크기의 바다뱀 나팔이 우르릉거리며 바다에 울려 퍼지던 소리를 기억했다. 선원들과 함께 물속에서 나온 심해 크라켄이 무장상선을 산산이 조각내 승선한 모든 이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공포도 여전히 생생했다. 크라켄이 사라가 탄 배 아래를 지나갔을 때 갑판의 움직임이 딱 이랬다. 사라는 뱃전으로 달려가 안개와 바다를 살펴봤다. 달조각 암초의 바위를 중심으로 검은 바다가 비밀스럽게 소용돌이쳤다. 얼마나 깊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런 바다에서 가라앉은 배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심지어 군도에 잔해가 쓸려 오는 일조차 없었다. '대체 뭐가 있는 거지…?' 바로 그때, 그것이 보였다. 20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심해에서 거대한 몸체의 타이탄이 올라오고 있었다. 광대한 돔 같은 투구가 물을 가르며 올라왔다. 한 쌍의 눈은 용광로 같은 주황빛으로 빛났다. 주변 물은 흔들리는 형태를 둘러싼 검은 기운의 영향으로 미친 듯이 끓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부식한 철판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몸은 수없이 많은 침몰선에서 뜯겨 나온 사슬로 감겨 있었다. 한쪽 어깨에 걸친 어마어마한 크기의 갈고리 닻은 가장 깊고 어두운 심해의 썩은 수초에 휘감긴 채 검은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사라는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일종의 괴담에 불과했다. 부둣가 술집에서 주정뱅이들이 공짜 술을 얻어먹으려고 술에 잔뜩 취한 이들에게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사라도 저것의 이름을 알았다.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육중한 걸음으로 굉음을 내며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심해의 검수원이 공물을 거두러 온 것이다. 모두 그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꺼리는 존재였다. "노틸러스…" 노틸러스가 문 서펀트호를 향해 닻을 던지자 물이 폭발했다. 닻이 갑판과 충돌하며 오랫동안 어둠 속에 고여 썩어 있던 해일이 배를 덮쳤다. 목재가 완전히 뚫리면서 닻의 어마어마한 무게가 가해지자 배는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었다. 난간에 부딪힌 사라는 배가 점점 아래로 기울자 서둘러 어깨 총집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선원들이 경사진 갑판에서 미끄러지거나 물속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닻이 배 옆에서 떨어져 나가자 배는 급격히 균형을 되찾았다. 사라는 돛대가 쩍 갈라지는 소리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은빛 돛을 부풀리며 잔가지처럼 꺾어진 중간 돛대와 뒤쪽 돛대가 산산이 부서진 갑판에 서 있던 십여 명 위로 떨어졌다. 사라는 용골이 버틸 수 없는 수준의 압박을 받아 구부러지면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물을 막고 있던 목재가 쪼개지며 갑판을 따라 검은 물이 간헐천처럼 솟구쳤다. 사라는 앨라이를 돌아봤다. 앨라이는 자신의 무덤이 되어야 했을 청동 대포에 매달려 있었다. "너 때문이야!" 사라의 외침과 동시에 물에서 노틸러스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한때 필멸자였다기에는 너무나 크고 거대한 손이 앞 갑판을 내리치자 나무를 깎아 만든 난간이 박살 났다. 곧바로 다른 쪽 손이 검고 기름진 물질로 번들거리는 사슬을 휘날리며 뒤따랐다. "진짜일 리 없어!" 앨라이가 노틸러스의 모습에 이성을 잃고 빽빽거렸다. "저건 그냥 전설 속 존재라고!" "내 눈에는 아주 진짜 같은데!" 사라가 소리쳤다. 그 뒤로 나무가 박살 나고 돛이 찢어지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비명이 불협화음처럼 들려왔다. 노틸러스가 육중한 몸을 뱃전 위로 기울이자 뜨거운 열기가 사라를 덮쳤다. 지옥 같은 노틸러스의 시선이 사라에게 향했다. 치명적인 열기가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듯했다. 그 감각은 심해의 타이탄이 사라의 영혼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혐오스럽게 퍼져 나갔다. 노틸러스의 육중한 무게 때문에 배가 또다시 기울었다. 사라는 갑판이 미친 듯이 기울자 도르래 밧줄의 고리를 붙잡았다. 도르래가 격하게 흔들리면서 대포 앞쪽이 옆으로 미끄러지자 매듭을 지은 끝부분이 팽팽해지며 대포의 엄청난 무게를 견뎠다. 포차 바퀴를 고정한 나무쐐기가 불길하게 삐걱거렸다. 앨라이가 대포를 붙잡고 사라 쪽으로 다가왔다. "혼자 갈 순 없어! 바다가 날 원한다면 너도 같이 끌고 가겠다!" 앨라이는 제일 질 나쁜 싸구려 술을 마시고 정신이 나가 악다구니를 치는 빌지워터 골목의 불구자처럼 미친 것 같았다. 앨라이가 선장들을 속이기 위해 입었던 바다뱀 몰이꾼 로브는 어느새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앨라이의 목에는 은과 황동으로 된 세 바다뱀이 뒤얽힌 모습의 인장이 가죽끈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도르래에 매달린 사라는 앨라이를 발로 차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앨라이는 미친 사람 특유의 힘을 발휘하며 사라의 목을 할퀴었다. 깨진 손톱에 긁혀 피가 나자 사라는 필사적으로 잡을 만한 곳을 찾았다. 배는 점점 더 옆으로 기울어 좌현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노틸러스는 다시 닻을 끌어당긴 후 거대한 나무꾼이 도끼를 휘두르듯 내리쳤다. 믿을 수 없이 큰 덩어리가 갑판 중앙을 꿰뚫자 마침내 용골이 굉음을 내며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배의 선미가 급격히 상승하며 앨라이의 선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안개 속에서 메아리쳤다. 바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옛말이 있었지만, 사라는 선장들을 죽인 배신자 놈들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었다. '다 물에 빠져 죽으라지.' 닻을 내리친 충격으로 튀어 올랐던 배 앞쪽이 다시 바다로 쾅 떨어지자 뱃머리에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다시 수직으로 기울었다. 그 무게 때문에 뱃머리는 매 순간 빠른 속도로 더 깊숙이 가라앉았다. 곧 수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터였다. 사라 옆쪽 갑판에서 쿵 소리가 났다. 문신으로 뒤덮인 앨라이의 딸이었다. 시신에는 아직 사라의 단검이 박혀 있었다. 시신에서는 번들거리는 검은 액체가 흘렀다. 날카롭게 신음하는 금속성과 함께 노틸러스가 앨라이를 향해 거대한 건틀릿을 뻗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손아귀로 앨라이의 몸통을 단단히 붙잡고 끌어당겼다. 앨라이는 연인을 껴안듯 미치광이처럼 재빨리 사라를 붙들었다. 사라는 앨라이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망할 공물을 바쳤어야지." 사라가 으르렁거렸다. 앨라이는 사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바다는 나와 함께 너까지 끌고 갈 거다!" 앨라이가 소리쳤다. "오늘은 아니야." 사라가 뒤쪽으로 팔을 뻗어 시신에 박힌 단검의 해골 모양 자루를 쥐었다. 세게 당기자 단검이 뽑혀 나왔다. "이 녀석을 원해?" 사라가 단검을 거꾸로 고쳐 쥐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사라는 앨라이의 목을 노렸다. 앨라이의 머리가 뒤로 꺾이자 사라가 재빨리 손을 뻗어 앨라이의 목에서 풀려 떨어지는 가죽끈을 붙잡았다. 사라를 붙든 앨라이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노틸러스가 앨라이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사라의 밧줄 고리를 고정하던 갑판 고리가 끊어졌다. 대포의 무게가 도르래를 잡아당겼다. 위로 들리며 대포와 앨라이에게서 멀어진 사라는 침몰하는 배 위에서 거칠게 흔들리며 노틸러스가 몸을 돌려 다시 바다로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쪽 쇠주먹에는 비명을 지르는 앨라이가 움켜잡혀 있었다. 노틸러스가 공물을 가지고 어두운 아래로 돌아가자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거품이 뒤따르며 물이 앨라이를 에워쌌다. 사라는 끌려 내려가는 앨라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앨라이의 눈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앨라이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표식조차 없이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힐 운명이었다. 문 서펀트호의 뱃머리가 거의 수직이 되자 사라는 돌출된 바다뱀 선수상에 닿기 위해 밧줄을 앞뒤로 흔들었다. 은빛 송곳니에 신발이 닿았다. 사라는 바다로 서서히 가라앉는 배 위에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사라는 배의 뒤쪽 절반이 거의 물에 잠긴 것을 보았다. 수직으로 선 좁은 선미에 몇 안 되는 선원이 모여 있었다. 밧줄을 타고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생존자 중에는 피터 하커도 있었다. 사라는 증오심으로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피터가 말했다. "난 어이없을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극적으로 복수할 만한 상대라고 했잖아.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적어도—" 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 피터를 향해 밧줄 고리를 올가미처럼 던졌다. 어떤 작살잡이도 이렇게 정확히 던질 수는 없을 정도였다. 고리는 피터의 목에 올가미처럼 걸렸다. 사라는 피터가 고리를 벗을 새도 없이 권총을 꺼내 위로 겨누었다. "앨라이한테 안부 전해 줘, 피터." 사라가 방아쇠를 당겼다. 대포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견디고 있던 도르래가 박살 나며 곧장 바다로 추락했다. 사라는 찰나의 순간 공포에 질린 피터의 눈을 감상했다. 곧바로 팽팽히 끊어진 밧줄이 선미에 서 있던 피터를 확 끌어당겼다. 비명은 피터가 물에 빠지는 것과 동시에 멈췄다. 피터는 대포에 끌려 곧장 깊은 심해로 사라졌다. 바다뱀 선수상 위에 선 사라는 문 서펀트호의 선미가 마침내 거품이 이는 물과 쪼개지는 목재에 뒤섞여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끝까지 잔해에 매달려 미친 듯이 첨벙거리던 선원 몇 명도 난파선이 가라앉는 힘에 이끌려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밑을 내려다본 사라는 길어 봐야 몇 초 후면 자신도 같은 운명에 처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바다에 빠뜨리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죠."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라는 미소를 지었다. 어깨 너머로 상륙정에 탄 레이픈이 보였다. 홀딱 젖은 레이픈의 몸에는 베인 상처와 멍, 물린 자국이 가득했다. 뱃머리에 달린 방풍 랜턴이 이제 안전하다는 듯 따뜻하게 맞아 주며 까딱이는 것 같았다. "칭찬 고마워, 레이픈." "대포 얘기였습니다." 레이픈이 조심스레 사라 쪽으로 노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30파운드 포였어요." "맞아. 하지만 전통은 전통이니 어쩔 수 없겠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나저나 대체 어디 갔었어? 위에서 난리가 났을 때 내 옆에 있었어야지." 레이픈이 어깨를 으쓱했다. "술병을 가지러 내려갔다가 살인을 저지르려고 준비하는 앨라이의 선원들과 마주쳤어요. 발각된 게 못마땅했는지 저를 공격하더군요. 빼앗은 무기로 몇 명 해치우긴 했는데, 잘못하면 골로 갈 것 같아서 포문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상륙정이 있는 곳까지 헤엄쳐 가다가 수면 아래에 사는 온갖 생물에게 신나게 물어뜯겼고요. 그래도 이렇게 왔잖아요. 안 올라타고 그 배와 함께 가라앉을 작정이십니까?" "이 배의 선장은 이미 배와 함께 가라앉았어." 사라가 선수상에서 상륙정으로 훌쩍 올라탔다. 사라가 안전하게 오르자 레이픈은 노를 저어 운이 다한 문 서펀트호로부터 멀어졌다. 선수상과 가장 높은 돛대가 마침내 거품, 밧줄, 부러진 목재와 함께 소용돌이치며 가라앉았다. 상륙정 뒤쪽으로 이동한 사라는 레이픈이 구조한 승객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륙정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찢긴 하늘색 코트와 금색 커프스, 해어진 청동색 어깨 장식이 보였다. "블랙스턴? 아직 살아 있어?" "간신히 숨은 붙어 있죠. 허풍이 많은 여자지만 앨라이 같은 쓰레기와 함께 수장될 만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냥 물에 빠져 죽게 두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사라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저나 대체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해도 안 믿을걸." "선장님이 그 망할 대포를 갑판에 쏴서 배가 가라앉은 것 아닙니까?" "내가 아니야. 저 위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앨라이 짓이었어." 사라가 더는 묻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이건 손에 넣었지." 사라가 손을 폈다. 은과 황동으로 된 세 바다뱀이 뒤얽힌 모습의 원판이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앨라이의 인장이군요." "요즘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해도 앨라이의 선원들에게 보여 주긴 해야겠지. 일단 술부터 깨야겠지만." 레이픈이 씩 웃었다. "이번 일이 '완전히' 시간 낭비는 아니었네요." 보트 뒤쪽에 털썩 주저앉은 사라는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달조각 암초의 우뚝 솟은 바위를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물에서 기어 나온 형체 하나가 물을 털어 내는 모습이 보였다. 값비싼 크라켄 가죽 코트를 걸친 등이 굽은 자였다. "쏜." 사라가 속삭였다. "쥐새끼들은 꼭 어딜 가나 살아남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레이픈이 노를 저으며 말했다. "또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요?" "아니." 사라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도 없어." |
5. 구 배경
5.1. 최초 배경
노틸러스는 과거, 전쟁 학회의 후원으로 아직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양을 탐험하기 위해 수호자의 바다로 떠난 원정대원이었다. 아직까지 그 누구의 침입도 허한 적이 없는 먼 바다까지 탐사해 들어간 노틸러스와 동료들은 어느덧 걸쭉한 검은색 액체가 흐르는 드넓은 해역에 다다랐다. 원정대 중 누구도 이 액체가 뭔지 정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새로운 건 뭐든 다 조사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으나, 노틸러스 외에 그 누구도 미지의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나서는 이는 없었다. 노틸러스가 육중한 잠수복을 걸치고 함선의 난간 위로 기어올라간 바로 그 순간, 찐득한 액체 속에 숨어 있던 뭔가가 그를 잡아채는 것이었다. 뱃전을 붙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함선까지 통째로 흔들렸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은 동료 선원들이 그만 해서는 안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도와달라는 애원의 눈길을 외면한 채, 난간을 꽉 틀어쥔 노틸러스의 손아귀를 비틀어 떼어버린 것이다. 시꺼먼 물 속으로 떨어져 내리던 그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붙든 건 어이 없게도 배의 닻이었다. 시꺼먼 줄기들이 몸을 칭칭 감는 가운데, 노틸러스는 타고 왔던 배가 저 멀리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사위가 깜깜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뭔가가… 달라진 후였다. 육중한 강철 잠수복이 매끈한 껍질처럼 몸을 감싸, 안에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들어 있는지 감춰 버렸다. 과거의 기억은 모두 어렴풋한 안갯속처럼 여간해서 떠오르지 않았지만, 단 하나는 또렷했다. 햇살 한 줄기도 닿지 않는 이 깜깜한 해저 바닥에, 자신은 혼자 죽도록 내버려졌다는 것. 손에는 자신을 물 속으로 밀어내 버린 자들의 함선에서 떨어져 나온 닻이 아직도 굳게 들려 있었다. 달리 어떤 목표도 떠올릴 수 없던 그는 잊어버린 자기 존재에 대한 단 하나의 단서, 헤엄치거나 달릴 수도 없게 만드는 육중한 이 닻을 들고 정처 없는 발길을 터벅터벅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 지,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꿈 속 같은 심해에서 노틸러스는 한없이 방황했다. 그러다 마침내 빌지워터에 다다랐을 땐,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아낼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도, 가족도, 자신이 일궈냈을 그 무엇도 되찾을 길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겁을 먹은 뱃사람들이 노틸러스를 전쟁 학회로 인도했으나, 그 곳의 소환사들은 과거 후원했던 원정대의 선원들 명단은 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 무렵 리그 오브 레전드에 대해서 알게 된 노틸러스는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자들을 찾아내 응징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게 됐다. |
5.2. 유니버스 업데이트 이후 배경
"완전한 어둠 속에서 소진되어 버린 자라면, 전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 노틸러스 한때 노틸러스는, 아직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양을 탐험하기 위해 수호자의 바다로 떠난 원정대원이었다. 아직까지 그 누구의 발길도 허한 적이 없는 먼 바다까지 탐사해 들어간 노틸러스와 원정대는 어느덧 걸쭉한 검은 액체가 흐르는 드넓은 해역에 다다랐다. 대원 중 누구도 이 액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새로운 건 뭐든 조사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으나, 노틸러스 말고는 미지의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노틸러스가 육중한 잠수복을 걸치고 함선의 난간 위로 기어올라간 바로 그 순간, 찐득한 액체 속에 숨어 있던 뭔가가 그를 잡아챘다. 그가 뱃전을 붙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함선이 통째로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만 겁을 집어먹은 동료 선원들이 해서는 안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도와달라는 애원의 눈길을 외면한 채, 난간을 꽉 부여잡은 노틸러스의 손아귀를 비틀어 떼어버린 것이다. 시꺼먼 물로 추락하는 와중에 버둥거리던 그가 필사적으로 붙잡은 것은 어이없게도 함선의 닻이었다. 시꺼먼 줄기들이 몸을 칭칭 감는 가운데, 노틸러스는 타고 왔던 탐험선이 저 멀리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사위가 깜깜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무언가… 달라진 후였다. 육중한 강철 잠수복이 매끈한 껍질처럼 몸을 감싸, 그 안에 자리한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든 감춰 버렸다. 과거의 기억은 모두 안갯속처럼 어렴풋하여 여간해선 떠오르지 않았지만, 단 하나 또렷하게 남은 것이 있었다. 햇살 한 줄기 닿지 않는 이 깊고 캄캄한 해저 바닥에, 자신은 혼자 죽도록 내버려졌다는 것. 손에는 닻이 아직도 굳게 들려 있었다. 자신을 물 속으로 밀어내 버린 자들의 함선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아무런 목표도 떠오르지 않던 노틸러스는 잊었던 자기 존재에 대한 단 하나의 단서와 함께, 그러니까 헤엄칠 수도 달릴 수도 없게 만드는 육중한 이 닻을 들고, 터벅터벅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 채 영원히 계속되는 꿈속과 같은 심해에서 그는 한없이 방황했다. 그러다 마침내, 빌지워터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땐 이미 그의 과거를 알아낼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도, 가족도, 자신이 일궈냈을 그 무엇도 되찾을 길이 없었다. |
[1]
원문은 "Oh, by the bearded lady..."로, by 뒤에 자신이 경외하는 대상을 넣어 놀라움을 나타내는 영어 표현이다. 올바른 번역은 "수염 달린 여신이시여.."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