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라이언 Nathaniel Ly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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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8년 7월 14일 |
미국 코네티컷주 애시퍼드 | |
사망 | 1861년 8월 10일 (향년 43세) |
미국 미주리주 배틀필드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준장 |
복무 기간 | 1841~1861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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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코네티컷주 애시퍼드 출신으로 1841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세미놀 전쟁에 참가했고 미국-멕시코 전쟁당시 멕시코시티 전투에서 멕시코군 장교를 생포하는데 공을 세웠고 콘트레라스, 추루부스코 전투에도 참가했다. 전후 캘리포니아의 원주민 포모족과 전투를 치러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미주리주의 연방하원의원이자 링컨과도 친분이 있었던 프랜시스 블레어 주니어에 의해 세인트루이스 주둔 연방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분리주의자였던 미주리 주지사 클레이본 F. 잭슨이 미주리의 남부연합 가담을 위해 암약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남부를 지지하는 일부 시민들에 의해 캠프 잭슨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대응해서 발포명령을 내려 시위대 피해 최소 25명이 사망했다. 남부 지지파 시민들이 세인트루이스 병기창의 신형 소총을 빼돌리는 것을 저지했고, 잭슨 주지사와의 회담에서 연방군과 남부연합 지지파 양측이 외부 지원군의 미주리 유입을 막자는 타협안을 반대하며 잭슨과 남부파에게 전쟁을 선언했다.
라이언은 신속하게 주도 제퍼슨시티 및 주정부를 장악하고 스털링 프라이스의 남부파 주방위군을 쫓아냈다. 잭슨 주지사 등은 인근의 분빌로 후퇴했지만, 라이언은 존 S. 마머듀크가 이끄는 남부 지지파 미주리주 주방위군을 분빌에서 격파하고 잭슨 등을 미주리주 남서쪽 끝으로 쫓아냈다. 라이언의 활약은 노예주였던 미주리주가 연방 소속으로 남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그는 북군 최초의 전쟁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라이언은 병력을 정비한 뒤 잭슨을 추격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프라이스의 주방위군은 인접한 아칸소주의 남부연합 군대와 합류하여 라이언의 6,000명에 비해 2배에 이르는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8월 10일 라이언은 윌리엄스크릭에서 벤저민 매컬러크가 이끄는 남군과 맞붙었으나 지휘 도중 남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북군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미주리의 대부분에 대한 지배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라이언의 죽음은 북부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고, 라이언의 상관 존 C. 프리몬트가 노예해방선언 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