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金英韓대한민국의 사업가.
기생 출신으로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운영하여 큰돈을 모았다. 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불교에 감화되어 당시시가 1,000억 원대의 대원각을 대한불교조계종에 시주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절로 탈바꿈하였기에, 길상사의 창건자로 여겨진다.
길상사 시주와 시인 백석의 연인이라 주장하며 유명해진 기생으로, 허언증이라는 설이 많다. 백석과의 관계는 김영한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백석 측은 이를 부인하였다.
기명(妓名)은 진향(眞香), 본명은 김영한, 법명은 길상화(吉祥華). 뮤지컬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자야가 바로 김영한으로, 김영한의 저서 <내사랑 백석>을 참고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서울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하면서 백석을 기리며 생활했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다(…). 딸(서 모 씨)도 있다. 서 모 씨는 길상사 시주와 관련해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송하여 승소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16년 병진(丙辰)년 음력 12월 25일( 1917년 1월 18일)생으로 현재의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17세 때, 여창명인(女唱名人) 김수정의 안내로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금하 하규일 선생의 넷째 양녀로 들어갔다. 하규일 선생[1]으로부터 3년간 가무를 배웠다.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 <검무>를 잘했으며,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잡지『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서둘러 귀국한다. 하지만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함경남도 함흥 땅에 주저앉는다.
1936년 오로지 은인이던 해관 선생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되어 큰 연회 같은 곳에 나가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서 해관 선생님의 특별 면회를 신청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함흥권번으로 들어갔다.
2.2. 대원각 운영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자야는 서울 성북동 산골짜기의 한식당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대원각은 훗날 길상사가 된다.그런데 등기부에 따르면 자야가 길상사 땅을 취득하기 전 소유주는 ‘조봉희’라는 사람이었다. 조봉희는 박헌영의 이부 누나이며,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 스님은 "실소유주는 우리 아버지이며, 6.25 전쟁의 혼란 이후 자야갸 꿀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3~4년 몹시 혼란스러울 때 자야는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고, 그 도움으로 대원각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2]
대원각은 군사 정권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2.3. 길상사 창건
김영한은 1987년,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 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비롯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절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시주 규모는 건물 40여 채와 대지 23,140㎡로,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었다.처음에 법정 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 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이고,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으며, 당시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길상사 건립 당시 '1,000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2.4. 사망
1999년 11월 사망했다. 김영한은 "나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화장을 치러 길상사 경내에 산골하였으며, 따로 묘지는 없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詩碑[3]가 세워졌으며,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사망 이후, 유일한 혈육인 서 모 씨가 자신의 상속분을 두고 카이스트와 소송전을 벌였다. 김영한은 자신의 재산 중 딸 서 씨에게 현금과 부동산 등 31억 원 상당의 재산을 남기고 나머지 122억 원은 “우리나라 과학 기술 발전에 써 달라”며 카이스트에 기증했다. 이에 서씨가 자신이 받은 상속액이 민법상 규정된 유류분보다 적다며 카이스트를 상대로 2000년 소송을 제기한 것.[4] 3년여의 소송 끝에 2003년 카이스트가 서 씨의 유류분을 인정해 44억 원을 지급할 뜻을 밝히고, 서 씨 역시 카이스트 산하 장학 재단에 이사로 취임하겠다는 의사를 보여 조정이 성립됐다.
이후 서 씨는 조정된 상속분을 모두 어려운 이웃을 쓰기 위해 기부했다. [5]
3. 백석과의 관계
백석과의 관계는 100% 김영한의 주장이며, 객관적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시인 백석이나 기생 자야의 입장에서 당시 관계를 객관적 증거로 남길 만한 상황이었는지, 곤란한 처지는 아니었는지에 대한 판단 여지는 남아있다.)어디까지나 김영한의 말에 의한 것으로 1936년 가을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첫날, 시인 백석(당시 24세)과 김자야(당시 20세)는 처음 만났다고 한다. 기생과 손님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당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백석이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 했고,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다고. 이 주장은 뮤지컬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반영되었으며, 경상남도 통영 출신의 란(박경련)이라는 여성을 좋아했던 백석이 김영한을 보자마자 좋아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3.1. 자야의 유래
김영한은 "『당시(唐詩)선집』을 사왔을 때, 백석이 그 책을 읽고 '자야(子夜)'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자야'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6] 하지만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백석은 이에 관련해 시 <두보나 이백같이>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자야라고 주장하는 여인은 여인은 김영한 외에도 더 나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나타샤라고 주장하는 여자 역시 여럿이다. 나타샤는 '이국의 여인'을 뜻하는데도 말이다.김영한의 주장을 담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백석 시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을 가사로 만들며 자야와의 사랑을 담은 것으로 그렸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바다」만 해도 통영의 바다를 거닐며 쓴 시로, 백석이 사랑했던 박경련(란)을 생각하며 쓴 연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역시, 자신의 친구와 결혼한 란에 대한 기억을 담고있다. 뮤지컬에 나오는 백석의 시와 서사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김영한은 "백석이 '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으나, 내가 백석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게 된다.
3.2. 백석과 동거와 이별
김영한은 "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의 11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주장했으나, 증거 자료를 전혀 내놓지 못하였다. 백석이 최고급만을 걸치는 패셔니스타에 결벽증이 있을 만큼 깔끔한 성격이어서, 그런 데서 살림을 차려 자고 먹을 사람이 아니다. 당시는 편지로 연락하는 시대라서 백석의 지인들만 해도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많을 정도로 백석은 편지를 자주 썼는데, 연인에게 편지 1통도 남기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지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백석은 1939년 1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부잣집 딸과 혼례했다고 하고, 김영한은 중국의 베이징,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등지를 1달 동안 여행했다고 한다. 백석이 결벽에 가까운 성격이라 과연 기생을 사귀었을지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백석이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명문 학교를 다닌 부유한 집안의 신여성들이었다. 첫사랑이었던 란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첫 아내 역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2번째 아내 문경옥 역시 고등 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그와 어울렸던 여류 문학가들 역시 모두 당대의 신여성들이었다.
김영한은 "백석이 홀로 만주 신징으로 떠났고, 해방 후 백석이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 후 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 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실제 그 기간 동안 백석은 북한의 유명 여성 음악가인 문경옥과 결혼해 2년간 결혼 생활을 하고 이혼했으며,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아내 리윤희와는 이후 50년간 해로한다. 김영한은 "백석은 다섯 여인보다 나를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4. 과장된 이야기들
4.1. 송준의 증언
송준은 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한 백석 연구자이다. 송준은 "생전 김영한을 직접 인터뷰했는데, 그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매우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백석의 시에 대해 거의 모르고, 그렇게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또 3년을 연애했다면서 편지 하나 가진 게 없다고 한다.그러면서 " 기생인 그녀가, 백석이 유명해지니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관계를 과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짤막하게 맺는다.
국문학계에서도 자야가 <내사랑 백석>이라는 책에 거짓을 많이 썼다고 본다. 백석이 자신을 만나기 전에 쓴 시인데 자신한테 헌사했다는 둥. 요즘으로 치면 텐프로 언니가 유명인의 애인이었다고 하는 격이랄까, 백석이 직접 자야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전혀 없다.
4.2. 이동순의 증언
국내 최고의 백석 전문가 이동순 영남대 교수는 김영한에 대한 이야기들 중 길상사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동순이 김영한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에 의하면 길상사는 일제 시대 친일파가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별장인데 해방후 정부 고위 관리가 자신의 첩인 김영한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김영한은 이 별장을 70년대부터 요정으로 개조하여 영업을 하였는데 유지비가 많이 들고 경영이 부실하여 대학에 기증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종교 기관으로 바꿀 생각으로 법정 스님과 여러 차례 만났다. 이후 김영한은 수년간 주저하며 기증 의사를 번복하였지만 끝내 기증으로 마음으로 굳히고 그다음 날 이 사실이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이라 한다.
5. 학력
1953년 김자야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
가곡의 천재 박효관에게 사사한
구한말 남창명인(男唱名人)이다.
[2]
출처: 서울신문
[3]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4]
다만 소송 대상에 김영한이 시주한 길상사는 제외됐다.
[5]
서 씨는 소송 중이었던 2002년 3월에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공시지가 8억 5,000여만 원의 성북동 임야 480평을 환경운동연합에 기증하기도 했다.
[6]
이 시는
중국
동진(東晉)의 '자야'라는 여자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